갈릴리 & 십자가의 길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거듭난 삶 2024. 3. 2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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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과 새사람

 

누가복음 527-39: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참조 : (마가복음 215-22절 마태복음 99-13)

 

예수는 사람으로서 가장 현저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르는 곳 도처에서 현저(특이)한 말씀을 발하셨다.

그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말은 영구불변의 진리였다.

 

그 같이, 그가, 마태가 마련한 연회의 석상에서 발하신 2, 3의 말씀은,

이것 또한 위대심원한 말씀이었다.

 

실로 은혜의 말씀은 감로처럼, 이르는 곳 도처에서 그의 입으로부터 떨어졌다.

그리고 이것을 기록한 복음서는 인류가 가지는 가치 아주 귀한 지혜의 보고(寶庫)이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현저(특이)한 말씀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서 가장 유력했던 것은,

항상 그의 비평가로서 그의 뒤를 따라, 그에게 무슨 실수 있을까고 비평의 눈초리로 그의 언행에 주목한 바리새파의 사람들 및 학자들이었다.

 

예수가 발한 가장 놀라운 말씀은, 이들 직업적 종교가에게 답하고, 또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말한 것이었다.

 

세상에 실은 비평가만큼 유익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의찰 또는 공격이 있어서, 깊은 진리는 발해지고, 드높은 향기는 발해진 것이다.

 

인류가 가진 귀한 진리의 반 이상은, 반대의 비평에 답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임을 알 때,

진리 천명 위해 비평 반대가 얼마나 필요한가가 헤아려지는 것이다.

 

회개한 세리 마태가 마련한 연회의 석상에 있어서 학자와 바리새인은 예수의 제자에게 불평해 말했다.

 

당신들, 세리 또는 죄 있는 사람과 함께 음식함은 어떻게 된 것인가.

 

백성의 교사로서 자임하는 자가, 속리 속인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는 힐문이다.

 

이에 대답하여 예수는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는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병 있는 자 이를 요한다.

 

이것은 풍자이면서 동시에 교훈이다.

너희 바리새의 교사들은 건강자 이다. 그러므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리 마태는 병인이다. 그러므로 나를 요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확실히 아이러니(irony)이다.

참된 병인은 이들 종교가이고, 비교적 건전한 것은 마태와 그 동료였다.

 

예수는 여기서 확실히 아이러니를 말씀하신 것이다.

풍자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예언자는 거의 이것을 썼다.

잠든 양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풍자는 때때로 유효하다.

 

건강한 자, 나는 죄를 범한 기억이 없으므로 반드시 대왕생을 이룰 것이라고 한 고 오꾸마후(261역주)같은 사람,

 

기타, 사죄의 복음을 들어도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우리나라(일본) 다수의 이른 바 신사와 숙녀, 그러한 사람들에게 향하여 예수는 같은 것을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필요 없다. 나는 자기 죄로 고민하며, 사죄를 울며 찾는 자를 찾을 것이다라고.

 

그리고 만약 이를 부앙천지 하여 부끄러움 없다고 하는 자칭 군자가 예수께 향하여

 

나는 과연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인가고 묻는다면,

 

그는 대답하여 말씀하시리라.

 

너는, 건강하다고 하는 까닭에 병인이다. 너희의 죄는 남았다’(요한복음 9:41참조)라고.

 

 

다음은 단식 문제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속리속인배와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에 그의 흠점을 보았다.

그들은 또 그가 성대한 향연에 초대되어 쾌음 포식하는 것에 흠점을 보았다.

흠점, 또 흠점이다. 그들의 눈은 흠점을 보는데 날카롭다.

 

그들은 예수에게 물어서 말했다.

 

요한의 제자는 종종 금식을 한다. 우리들 바리새의 제자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당신의 제자는 마시고 먹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당신의 종교에는 절제 단식 없는가의 물음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이에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없다. 내 종교에 규칙으로서,

또는 수양수단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받는 길로서 단식은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난업 고행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단식에 아무 공덕도 없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어 하는 단식이 있다.

신랑의 친구가 신랑과 작별하는 때에, 비애의 극에 음식을 폐하는 것 같은 단식은 있다.

 

즉 자연적인 단식은 있다. 인공적인 단식은 없다.

그리고 내 제자가 그 신랑과 헤어지는 때는 반드시 온다.

그 때, 너희는 그들이 참으로 단식하는 것을 보리라.

 

(마태복음 1721, 마가복음 929절에 기도와 금식이라고 있는

금식의 두 자()개역성서에 제거되어 있는데 주의하라).

 

바리새인 및 학자들의 예수의 행위에 관한 적의적 비평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예수와 그들과의 사이에 근본적 상위가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는 새로운 사람인데 그들은 옛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의 교훈을 받을 수 없다.

예수가 제자로서 그들을 택하지 않고, 도리어 어부 및 세리를 택한 것은 이것 때문이다.

 

만약, 억지로 그들을 제자로 할 것인가, 이는 그의 불행으로서 또 그들의 불행이다.

마치 새로운 부대를 가지고 낡은 옷을 대는 것같이,

또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것과 같다.

 

신구(新舊) 서로 맞지 않는 까닭에 해()있고 익()없다.

 

예수의 복음은, 바리새인 및 학자, 오늘의 말로서 한다면 관료적 종교가 및 학벌적 신학자와 서로 맞지 않는다.

 

이것은 훌륭한 정부 또는 교회를 떠나 보통의 생애를 보내는 자, 즉 평민 또는 평신도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라 하고 구()라고 한다.

()의 일에 있어서는 때(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이다.

 

()의 신구를 말함이 아니다. 물론 유행의 신구를 말함이 아니다,

영육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영은 영구히 새로운 것, 육은 영구히 낡은 것이다.

 

의문의 낡은 것으로가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로마서 7:6)고 바울이 말한 이 구별이다.

 

정부라든가, 교회라든가, 규칙이라든가, 의문이라든가, 교파라든가, 학파라든가 이는 모두 육의 일로서, (낡은)일이다. 이것에 영의 자유는 없다. 영구히 생생한(발랄한)바는 없다.

 

바리새인 아무리 열심히 라도, 그 열심히 란, 주의(主義) 또는 교의(敎義)의 열심이고,

생명의 따뜻한 바가 없다.

 

영에 비하여 육은 모두 기계적이다. 인공적이다. 붕당적이다. 인습적이다.

그 받드는 주의는 아무리 새롭대도, 그 유지하는 설은 최신의 설이라 해도,

주의(ism)라든가 법식이라든가 계통이라든가 하여, 법을 만들고 파를 이루는 것은 모두 육에 속하는 것으로써 낡은 바 있다.

 

생명을 전유할 수 없다. 어떠한 학설도 생명의 의의를 다 말할 수 없다.

 

영은 영이다. 생명은 생명이다.

이화학의 술어로써 생명을 나타내려 하여도 할 수 없듯이, 교의 또는 신학으로써 영을 설명할 수는 없다.

생물에 대하여, 광물 및 모든 무생물은 낡은 바 있다.

영에 대하여, 육 및 모든 육성은 낡은 바 있다.

이상의 의미에 있어서, 바리새인 및 학자는 낡은 이 었다.

 

같은 의미에 있어서,

 

오늘의 모든 정부자 및 교회자, 학자 및 박사, 문학박사, 법학박사, 신학박사, 목사, 선교사, 사회주의자, 볼세비스트(Bolshevist) 모두 다 낡은 바 있다.

 

그들은 그 신봉하는 주의를 달리하고, 그 의거해서는 주장을 달리한다 해도,

그 근본의 정신에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즉 그들은 모두 육의 사람으로서 낡은 바 있다.

 

하나님께 거스린 아담만큼, 형제를 죽인 가인만큼 낡은 바 있다.

마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왕이, 당을 달리하면서 근본의 정신을 함께한 까닭에

예수에 대하여 일치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정치가, 종교가, 학자, 주의자는 모두 낡은데 대하여

예수 한 분은 언제나 새로운 바 있다.

 

세상에 참으로 신인이라고 칭할 분은 다만 예수 한 분이시다.

그는 순수한 영의 사람, 영원한 생명의 보유자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설(新說) 무수히 제창되고 있으나,

사람으로서 언제나 새로운 분은 다만 예수 한 분이시다.

 

기타는 모두 낡은 것이다.

단체를 만들어 다수를 그 안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세상에 펴려하는 자는 모두 낡은 것이다.

 

구신학도 낡은 것이다. 신신학도 낡은 것이다. 육은 모두 낡은 것이다.

이 세상은 언제나 낡은 것이다.

 

새로운 것은 다만 하나, 영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영을 맞이하고 이를 마음에 거하게 한 자만이 진정한 신인이다.

 

기타는 모두 구식이다. 영계의 방카라(gypsy의 뜻)이다. 옛 아담의 옛 자녀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는 낡은 사람들에게 향하여 일편의 동정 없을 수 없었다.

 

낡은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새 로도주를 좋아하는 자는 없다.

이는 묵은 것이 좋다고 하는 때문이다’ (5:39).

 

구인은 곧 신인될 수 없다.

옛것을 사모함은 사람의 자연이다.

() 종교에 달라붙는 사람, () 사상에 잡히는 사람, 그들에 대하여 동정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가 신인의 모범이라 해서,

구식의 사람을 멸시하는 것 같은 협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이 그의 복음을 쉽게 해득치 못하는 이유를 잘 아셨다.

그는 적에 대해서까지 깊은 동정을 가지셨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