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거듭난 삶 2024. 3. 2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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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말씀

 

마태복음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참조 : (누가복음 620-23)

 

축복의 말씀은 8음이다. 그 각각이 아름답다.

 

혹은 교묘히 조각된 다이아몬드 같이, 복음의 빛은 찬연하여 그 각면에서 아름답게 빛나며,

전면은 새로 조화하여 일대 보석을 형성한다.

 

복이 있다고 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써 축복을 선고하신 것이다.

 

그 사람이 육복(六福)을 느낀 것 아니다.

그는 슬퍼하고, 굶주리며 목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그 자신도 그 한사람이다)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때에,

예수는 복이 있다고 선고를 내리신 것이다.

 

잘못 없는 예수의 의전이시다. 축복은 실현한 것은 아니다. 예언되고 약속된 것이다.

사람의 평가는 아니다. 하나님의 선언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으로써 받아야 할 것이다.

 

마음(또는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다.

 

마음에서 가난한 자, 영혼의 근저에서 가난한 자를 말한다.

소유물에 가난하면서 마음으로 거만 떠는 자가 있다.

 

이 세상의 빈자에게 유가 많다.

하지만 진정한 빈자는 소유물에도 영에도 가난한 자이다.

자기에게 의뢰할 만한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자이다.

 

청빈을 즐기는 자 같은 것, 이 종류의 빈자는 아니다.

자기에게 자랑할 만한 의도 사랑도 믿음도, 덕은 물론(物論)의 일, 아무것도 없는 자로 느끼는 자, 즉 근본적으로 가난한 자, 그러한 자는 복이 있다고, 예수는 선고하신 것이다.

 

이 일 절의 가장 좋은 주해는 누가복음 189절에서 18절까지이다.

찾아볼 것이다.

 

천국은 즉 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행복의 전부이다.

그 반면은 마음의 상태이고, 다른 반면은 경우의 실현이다.

 

천국은, 완성된 영혼과 완성된 우주로서 된다.

그러므로 천국은 지금 이미 있는 것이고, 또 후에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보라.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은 지금, 이 세상에 있어서 주어지리라는 것이다.

미래의 일은 아니다. 현재의 일이다.

 

마음의 빈자, 근본적으로 겸손한 자, 지금, 미래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기다리지 않고서 천국을 그것으로 할 수 있다는 예수의 선언 또는 약속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다. 의와 화평과 성령에 의한 기쁨에 있다,

로마서 1417절에 있어서 바울이 주창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확실히 신자가 지금의 생애에 있어서 받을 수 있는 천국이다.

천국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천국임에 틀림없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한다.

 

모든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저 하나님에 따르는 근심(슬픔)은 후회 없는 구원을 얻는 회개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세상의 근심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린도후서 7:10)고 있다.

 

사업 실패의 슬픔, 죄악노현(disclosure)의 슬픔, 기타, 이 세상의 모든 슬픔,

이것은 모두 살을 빼고 뼈를 마르게 하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애이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 따라가는 비애가 있다.

자기 죄를 슬퍼하고. 흠점 많은데 고민하며, 빛을 우러르면서도 어두움에 방황하는 것을 탄식한다.

 

또 세상이 언제까지나 하나님께 거슬리고, 그 결과로서 언제까지나 화환 곤궁 중에 고생함을 슬퍼한다.

 

자기 위해 슬퍼하고 세상위해 슬퍼한다.

그러한 자는 복이 있다고, 예수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른바 고귀한 비애(noble sorrow)이다.

하지만도 고귀한 까닭에 그것만큼 깊이가 있다. 세찬 바 있다.

루터(1119역주), 크롬웰(559, 183역주), 버년(4250, 292역주)등이

모두 실험한 바의 비애이다.

 

몇 년이나 암흑에 헤매는 고통이다. 자기로서는 불행의 정상이다.

이 세상의 냉소, 교회의 의심을 받기에 이르게 되는 비애이다.

 

그런데 예수는 말씀하신 것이다.

 

그 사람은 복이 있다.

 

그 사람은 위로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인간의 말로서 위로는 의미가 가벼운 말이다.

일본어의 (위로라는 말) ‘나구사메,

나구’(던짐) 또는 나구’(평온해짐)에서 나온 말이다.

 

걱정스러운 것을 던짐’, 또는 평온을 얻음’, 걱정 전환’, 그것이 위로이다.

 

즉 슬픔의 위로, 또는 완화이다. 이것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위로는 깊은 무게 있는 의미의 말씀이다.

진정한 위로는 슬픔의 제거이다. 슬픔의 원인을 제거하여, 이것에 대신하는데 기쁨으로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신다는 것이다.

실로 위대한 약속이시다.

죄를 슬퍼하는 자에게, 그 죄를 제거하시고, 이에 대신 하는데 의로써 하신다는 것이다.

 

죽음을 슬퍼하는 자에게 죽음을 명하여 이에 대신하는데

다시 죽지 않는 생명으로서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위로이다.

 

울고, 슬퍼하며, 크게 걱정하는 소리, 라마에서 들려왔다.

라헬이 그 자식들을 슬퍼하고 그 자식들이 없으므로 위로를 얻지 못했다(마태복음 2:18)고 있다.

 

그리고 라헬을 위로하는 유일한 길은 그녀가 잃은 자녀를 다시 그녀에게 주는데 있다.

그것 이외의 길로서 그녀를 위로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의미에 있어서 라헬을 위로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헬뿐 아니라 모든 자녀를 잃고서 울고 슬퍼하며 크게 걱정하는

이 세상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로하신다는 것이다.

아들을 다시 그 부모의 품에 돌려주어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이에 있어서 부활의 희망, 그리스도 재림의 희망, 만물 부흥의 희망이 예수의 전도의 초기에 있어서 이미 전시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로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 동사이다.

천국은 이 세상에 있어서 지금 주어진다는데 대하여

위로는 미래에 있어서 주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 세상에 있어서도 신자에게 위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약속의 위로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의 눈물을 모두 씻겨주시고, 또 죽음 없고, 슬픔 고통 없다’(계시록 21:4)는 위로의 말씀이다.

 

그러나 말씀이지 사실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사실로 되어 나타나는 때에, 그때에 진정한 위로가 있는 것이다.

 

유화(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주해자는 말한다.

여기 말하는 유화는 하나님께 대한 유화(온유)로써, 사람에 대한 유화가 아니라고.

 

즉 원어의 프라우스 praus’는 종교적인 말이라고.

만약 그러하다면

 

유화한 자란 불평 없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모든 곤고를 받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수 자신이 이 의미에 있어서의 유화(온유)한 자의 모범이었다.

그는 고난을 당하여도 스스로 겸비하여 입을 열지 않으셨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셨다‘(이사야 53:7)고 그에 대하여 예언된 것 같이 그는 행하셨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면서 몸에 재난이 임해도 이에 견디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미하는 마음, 그것이 유화한 마음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유화한 자는 물론 사람에 대해서도 유화하다.

잠잠하여 하나님의 매를 받으신 예수는, 또 잠잠하여 사람의 비방을 받으셨다(베드로전서 2:21-24조역),

 

그러므로 유화(온유)한자는 이 세상에 있어서 눌리는(박해 받는), 언제나 열패자의 지위에 놓인 자이다.

 

그런데 예수는 선고하여 말씀하신다.

 

그 사람은 땅을 얻을(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여기에 분명히 예수의 종말관이 보여 있다.

신자는 단지 영지만 은혜받는 자는 아니다.

물적으로도 또 마침내는 세계의 소유주로 되는 것이라고.

놀라운 선고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자기를 맡긴 자,

이 세상에 있어서는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무산계급,

언제나 불리한 나쁜 지위에 있는 자,

그 사람이 마침내는 온 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까닭에 참된 그리스도 신자는 재산분쟁을 하지 않는다.

또 특히 사회주의를 제창하여 귀족이나 부호에게 부의 분배를 강요 않는다.

 

신자는 고요히,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그에게 주시는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