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복이 있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난 삶 2024. 3. 30.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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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말씀 3

 

복이 있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나님은 깨끗하시다.

그에게 접하는데 마음의 청결을 요한다.

 

사람이 (누구나) 만약 깨끗하지 않으면 주께 뵈올 수가 없다’(히브리서 12:14)고 있다.

 

주께 뵈올 수 있는 자격은 이것, 명상도, 공부도, 난행 고락도,

마음을 깨끗이(거룩하게)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볼 수는 없다.

 

사람은 말한다, 청수(clear water)에 물고기 살지 못한다고. 물고기는 거처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하신다.

 

마음의 청결이란, 청정결백, 일점의 오예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혹은 말한다. 이는 성적으로 순결한 것을 뜻함이라고.

즉 남자로서는 수도사의, 그리고 여자로서는 동정의 생애를 보내는 일이라고.

 

하지만 승니 반드시 마음이 깨끗한 자 아님은, 허다한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

그 반대로, 허다한 깨끗한 생애는 결혼생활에 의해 영위되었다.

성적 관계를 불결로 보는 것은 많은 불결을 만들어 내는 원인으로 된다.

 

누구든지 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침상을 더럽히지 말라.

음란한 자와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히브리 13:4)라고 있다.

 

성서는 청결과 독신생활을 동일한 일로서는 보지 않는다.

 

마음이 깨끗한 자, 마음에 거짓 없는 자이다.

 

그 좋은 예는 나다나엘이다. 예수, 그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기를,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그 마음, 거짓 없는 자다’ (1:47)라고.

 

그러한 사람은 일본인 중에도 있다.

참된 일본인으로 그 마음에 거짓이 없는 자다라고 일컬어 틀림없는 자가 있다.

그 사람은 물론 크리스천은 아니다. 그러나 크리스천 됨의 가장 좋은 자격을 가지는 자이다.

 

세인은 그를 불러 정직자라고 한다. 정직한 것 외에 아무 취할 것 없는 자로서 멸시된다.

하지만 예수는 그를 축복하여 말씀하신다.

 

너는 복이 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현세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배하는(아는) 일이다’(고린도후서 4:6).

 

그 결과로서 내세에 있어서는 목전에서 가까이 재림의 그리스도에 접하는 일이다.

 

그 때에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다’(고전 13:12)고 있는 대로 이다.

 

이른바 견신이라 하여 막연하게 하나님을 명상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예수께 사사하는 것, 다시 나타나서는 그에게 주로서 쓰이는 일이다.

 

평화를 구하는 자는 복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평안(평화)의 하나님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은 바울이 종종 쓴 말이다.

(로마 15:33: 고린도후서 13:11; 빌립서 4:9),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평안의 하나님’ (히브리서 13:20)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하나님은 혼란(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 (고린도전서 14:33)이라고

바울은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참되신 하나님은 특히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전쟁, 쟁투는 그의 혐오(hate)하시는 것.

그러므로 분쟁을 즐기는 자로서 그의 자녀일 수는 없다.

 

물론 때로는 의 위해 싸우지 않을 수 없다 해도,

그것은 평화를 구하기 위한 쟁투이지, 쟁투위한 쟁투는 아니다.

 

평화(화해)는 가장 신성한 행위이다.

 

평화는 구한다, ‘평화를 행한다이다.

평화를 도모()한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나라와 나라와의 사이의 평화를 꾀(도모)하는 것이 상성(常性)이다.

 

하지만 가장 귀한 평화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화해)이다.

 

복음 다름 아니다. 이 귀한 화해(평화)이다.

 

모든 것,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로 하여금 자기와 화해케 하시고,

또 그 화해케 하시는 직무를 우리에게 주셨다.

즉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케 하시고,

그 죄를 이에(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고 오히려 화해케 하시는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이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을 입어 그리스도의 사자로 되었다.

즉 하나님, 우리들에 의해 너희를 권면하신대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신하여 너희에게 원한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린도후서 5:18이하). 이것이 참 유일의 화해이다.

 

이 화해가 있어서 모든 다른 화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를 구하는 자는 모두 복이 있지만, 여기 보인 평화를 구하는 자는 특히 복이 있다.

전도의 복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제출하신 조건 아래, 사람으로 그와 화해케 하는 일, 그 일이 전도이다. 그리고 이 일에 종사하는 자는 복이다.

 

이른바 신자가 생기거나 안 생기거나 사회가 고쳐지거나 고쳐지지 않거나, 일 그것이 복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고하고, 복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고하고,

시온에 향하여, 네 하나님은 통치하신다고 하는 자의 발은,

산위에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사야서 52:7, 로마서 10:15)고 있음은,

 

이 일에 종사하는 자의 복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전도에도 여러 가지 있을 것이나, 하나님과 사람과의 평화를 꾀(도모)하기 위한 전도,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이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한다.

 

부모의 뜻을 이루려 하는 것이 아들의 지망이다.

지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울 자를 보고자 하면, 진정한 전도사를 찾을 것이다.

천상에 있어서의 그의 복에 대하여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의 위해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다’.

 

모든 의에 대하여 그러하다. 그러나 다음절에

 

나를 위해 사람이 너희를 욕하고, 또 핍박이라고 있으매,

특히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 복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 틀림없다.

 

복음을 믿고, 이를 말했기 때문에(주장했기 때문에)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뜻이다.

 

무릇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려고 뜻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것이다. ’(디모데후서 3:12)라고 있다.

 

박해는 진복음의 부수물이다. 이는 바울이 이른바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낙인) (갈라디아서 6:17)이다.

 

참 신앙으로 사는 증거는,

몸 안에 있어서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평화, 인내, 자비, 양선, 온유 등이다.

그리고 몸 밖에 있어서는 불신자 및 거짓신자에게서 받는 박해이다.

전자는 주관적 증거, 후자는 객관적 증거이다.

 

안에 있는 것은 밖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참 신앙이 전해지는 때 박해가 일어나지 않은 예는 없다.

박해는 내 신앙의 실질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박해에 만나는 일 없이 사람은 아직 참된 그리스도 신자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복이 있을 진저 의 위해 박해 받는 자는이다.

 

그 반대로 누가복음에 보여주는 것 같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 있을 진저’(누가복음 6:26)이다.

 

() 복음은 육의 사람에게는 반드시 배척받는 소질을 지닌 것이다.

 

이른바 세상에 환영되는 종교는 악마의 종교이다.

그 일에 대해서는 고금동서 변함없을 것이다.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다.

또 의 위해 박해받는 자의 것이라고 한다.

 

마음의 공허, 즉 절대적 겸손은, 그리스도 신자의 내적 상태의 총칭,

의 위해 핍박받는 일 즉 박해는 외적 상태의 총칭이다.

 

안으로 겸손하고 밖으로 박해받는 자, 그 사람이, 천국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리시는 복의 전부를 지금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신자의 모든 욕구는 천국의 실현과 함께 채워지고, 그 고난도 또 이와 함께 위로된다.

 

축복의 말씀은 그리스도 신자를 팔방에서 관찰하고, 또 천국을 팔방에서 설명하여 양자의 부합일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교의 축사도(reduced drawing)라 칭할 만한 것, 복음적 진리의 보옥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이른바 성인, 부앙천지하여 부끄러움 없는 사람은 아니다.

 

자기 공핍을 느끼고, 죄를 슬퍼하며,

유화하여 평화를 사랑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마음에 거짓 없이, 그리고 세상에 배척받는 자로 보여,

우리들의 인생관은 일변하는 것이다.

 

동시에 또 그리스도의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그것과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안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