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주리고 목마름 같이 의를 사모하는 자

거듭난 삶 2024. 3. 29.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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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말씀 2

 

주리고 목마름 같이 의를 사모하는 자’,

 

의에 주리고 또 목마른 자로 역할 것이다.

 

()에 주리고 욕()에 목 타는 것이 사람의 상성이다.

드물게는 지식에 주리고 목 태우는 자가 있다.

 

하지만 의에 주리고 목 타는 자는 더욱 드물다.

 

사람에게 의인으로서 높임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자기의 양심을 만족시키려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의롭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욕망이다.

그리고 이 욕망 있어서 비로소 진정한 종교심이 있는 것이다.

 

종교 다른 것 아니다.

완전한 의에 달하는 일이다.

 

하늘에 계시는 네 아버지의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는 것이,

 

예수께서 그 제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요구에 응하려 하여 노력 분투한 자가 있었다.

또 있다는 것은 실로 인류의 명예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여 헐떡임 같이, 내 영혼은(목이 타서)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찾나이다.

어느 때엔가 내가 가서 하나님 앞에 나가오리이까’ (시편 42:1-2)고 이스라엘의 시인은 노래했다.

 

그리고 단지 원방에서 의의 하나님을 동경할 뿐 아니라, 그 앞에 달하고자 하여 용진한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예가 다소의 바울이다.

 

로마서 제7장은 가장 선명하게 이 정신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다.

 

아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실 이는 누구랴?

이는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까닭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루터(2277역주), 버년(4rnjus 250, 292역주), 크롬웰(559, 183역주),

브레이너드(Brainard 1718-47. 미국의 인디언 선교사)등에게 모두 이 곤고가 있었다.

 

근대인이 모르는 곤고이다.

그들의 이른바 <질풍노도(疾風怒濤) Sturm und Drang>

(1770년대 독일에 일어난 일체 속박 배제의 독일의 문학운동)과는 질을 달리하며,

자기의 완성을 욕구하는 곤고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이다.

 

인류의 분투사에 있어서,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의에 달하고자 하여 싸운 그 싸움보다도 격렬한 것은 없다. 그러한 사람에 대하여,

 

예수는 또

 

그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고하신 것이다.

 

이는 무익한 분투가 아니라, 무모의 욕구가 아니라고,

그는 가르치신 것이다. 실로 놀라운, 단호한 선고이시다.

 

의에 주리고, 완전에 갈망하는 자는 그 욕구대로, 배부를 수 있다는 선고이다.

 

사람은 물으리라, 그렇다면 사람은 소망하여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고?

 

옳다’(그렇다)고 성서는 대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크리스천은 그것이 참 임을 실험 했다.

 

의에 배부르는 길에 두 가지가 있다.

 

그 제1은 의롭다함을 얻는 일,

, 의인 못되는데 의인으로서 인정되는 일이다.

 

그 제2, 실질적으로 의롭게 됨을 입는 길이다.

 

1, 죄의 이 세상에 있어서, 죄의 몸 이대로,

신앙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일이다.

 

2는 신앙의 결과로서 영화 부활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완전하심 같이 완전해지는 일이다.

 

1은 현세의 일이고, 2는 내세의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까닭에 이자 모두 확실한 것이다.

 

죄의 이 몸에 거하는 동안 우리들은 완전하게 의()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죄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우러러보는 일에 의해,

그의 의를 내 의로 할 수가 있다.

 

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시는 까닭에

우리가 신앙으로서 자기를 그리스도 안에 두는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정하지 않으신다.

 

일은 이론은 아니다. 실험이다.

하나님의 의에 내쫓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늘에 숨는 때,

죄는 이미 우리를 괴롭히지 않고, 내 마음은 평안함을 얻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의 필연의 결과는 십자가 속죄의 신앙이다.

그리고 이 신앙을 얻어 이 세상, 이 몸에 있으면서 나는 의에 배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앙에 의한 의는 완성된 의는 아니다.

신자는 금세에 있어서 신앙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내세에 있어서 사실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네 마음 가운데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에 완성할 것이다’ (빌립보서 1:6)라고 있다.

 

우리들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시는 때,

우리도 이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는 것이다. (골로새서 3:4)라고 있고,

 

사랑하는 자여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다.

후에 어떻게 될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나타나는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닮을 것을 안다’ (요한 제13:2)고 있다.

 

신자의 의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에 주리고 목타는 것은 결코 무익한 욕구는 아니다.

천연의 만사에 있어서 욕구는 충족의 예언이다.

 

볼 것이 있기 까닭에 보는 눈이 있는 것이다.

들을 음이 있는 까닭에 듣는 귀가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의의 욕구 있음은 그것이(채워져) 만족될 증거이다.

 

그리고 죄에 빠진 인류가 의의 실현을 불가능시 하는 까닭에

예수는 이 놀라운 선언을 하여, 의의 추구와 실행을 장려하신 것이다.

 

자비한 자는 복이 있다

 

그 자의(字意)는 명료하다. 사실은 과연 어떤가가 문제이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자비한 자는 반드시 복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자비한 자는 불행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자비한 자는 손()이다.

 

자비는 성공하는 길은 아니다. 자기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서 타인의 이익을 꾀하여

이 세상의 성공은 아주 확실치 않다.

 

특히 국가의 외교 정략에 있어서 자비는 금물이다.

약국(弱國)을 동정하고, 그 귀존 이익을 생각하여 부강을 가져온 국가는 하나도 없다.

그 점에 있어서 영국, 이국, 불국, 미국, 일본, 모두 가려 뽑을 바는 없다.

 

외교적으로 볼 때, 자비한 자는 불행이다. 그 나라는 모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마저, 자비는 자비로서 보답되지 않는다.

 

약한 타 교회를 털어, 강한 자기의 교회를 왕성하게 하는 일은 별로 악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있다.

 

우승열패가 진화의 이치라고 믿어지는 오늘 자비는 연약인 것으로 배척할 것이다.

 

니체(-후세의 최대유물 역주참조)의 철학이 근대인에게 환영되는 이유의 하나는,

확실히 동정이라 일컫는 여성적 성격의 배척에 있어서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가르쳐 말씀하신다.

 

자비한 자는 복이 있다. 그 사람은 자비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자비한 자는 자비를 받는다. 누구에게? 어디서?

이 세상에 있어서도 다소는 그러하다.

하지만 특히 현저하게 하나님께, 미래의 재판의 터에 있어서 이다.

 

자비를 행하지 않는 자는 심판받을 때, 또 자비를 받지 못한다. 자비는 심판에 이긴다’(야고보서 2:13)고 사도 야고보가 가르친 대로이다.

 

그리고 신자는 무엇보다도 이 심판을 두려워하며 안전하게 이것을 통과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용의 공포라고 하는 자는 누군가?

자기 죄를 깨달은 자는 이 공포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옵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143:2)라는 것은 성시인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모든 성도에게 이 외침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라버리시는(불태우시는)분이시다’ (4:24)라는 것은 광인의 뇌리에 그려져 있는 상상은 아니다.

 

수면 상태에서 깬 때의 사람의 실험이다.

그리고 자신이 심판받을 지위에 있는 자는 타인을 심판하는데 관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심판을 목전에 두고서, 사람에 대한 자비는 자연히 일어난다.

 

손익 또는 성공 실패의 문제는 아니다.

내 영혼 영원의 운명에 관한 문제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비는 미래의 재판의 관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강한 미래 관념이 없는 곳에 진정한 깊은 동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정은 사람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위해서이다.

심판을 아버지에게 맡기신 예수는 말씀하셨다.

 

자비한 자는 복이 있다. 그 사람은 심판받을 때에 자비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다윗은 말했다.

 

여호와여, 주는 자비한 자에게는 자비한자로 되어 나타나시나이다’(시편 18:25)라고.

 

사람은 자기가 행한 대로 하나님께 취급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