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거듭난 삶 2024. 3. 2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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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의 수훈

 

마태복음 5-7

누가복음 620-49: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요한이 잡힌 후, 예수 갈릴리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마가복음 1:14)하고,

 

가버나움에 이르러, 예수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1:21).

 

예수 두루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며 그 회당에서 말씀(가르치심)을 전하시며’(1:39),

 

예수, 다시 가버나움에 오시니 그가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져,

곧 많은 사람이 모여와 예수 그들에게 말씀(가르치심)을 전하셨다’(2:1)고 한다.

 

예수 또 해변으로 가시니,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이들을 가르치셨다’(2:13)고 한다.

 

가르치시는 것이 예수의 제1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많은 것을 전하지 않는다.

주로서 그의 행동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르치심은, 이것을 달리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의 이 결핍을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치심의 가장 좋은 모범은, 산상의 수훈이다.

마태, 누가복음이 이것을 전한다.

 

마태의 것은 그 5장에서 7장에 이르고, 107절로 되어있다.

누가의 것은 그 620절에서 49절에 이르고, 29절로서 끝난다.

 

그러므로 일독하여 그 대의를 알고자 하면 누가복음에 의함이 가하다.

그러나 보통 산상의 수훈’(산상 보훈)이라 하면 마태복음 소재의 것을 가리킨다.

 

그 순순하게 천국의 시민의 자격, 의무, 경계를 말하여 내려가는 것은, 달리 그 유를 볼 수 없다.

그리스도 신자의 대헌장(Magna Carta)이라 불리며, 지대지중한 문자이다.

 

산상의 수훈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먼저

 

첫째로 우리들의 마음에 두어야할 것은

그것이 천국의 복음이지, 그리스도께서 선고하신 새 율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것을 천국의 율법으로 보는 까닭에 전연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전도를 시작함에 있어서 갈릴리의 봄을 맞아 기쁨의 나머지 말씀하신 복음, 즉 기쁨의 소식이다.

 

그것은 분명히 그 발단의 말씀에 의해 보여졌다.

 

복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복이 있다

예수는 입을 열자마자 8회 거듭 말씀하셨다.

 

성 암브로스(-암브로시우스)는 이것을

음악의 8음을 내는 8개의 아름다운 종소리에 비유했다.

 

복이 있다로서 시작된 이 대설교가 사람을 위협하고 또 심판하는 것 아님에 틀림없다.

 

모세의 율법은 시내산상, 불연기 오르는 곳에서 뇌명으로서 받았다.

이에 반하여 예수의 산상수훈은 갈릴리 호반의 바람 서늘한 곳의 푸른 잎 돋아나는 소산 위에서 주어졌다.

 

산상의 수훈을 보다 엄한 예수의 율법으로 보는 자는, 전연 이것을 오해하는 자이다.

우리들은 은혜의 주로부터 은혜의 말씀을 받는 태도로서 그 연구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태복음에 있는 산상의 수훈은 3107절로 되어있는 대설교이다.

그리고 그 11구 모두 중요 문자인데, 그러나 그 안에 또 경중의 차 없을 수 없다.

 

어느 설교에도 있듯이 예수의 이 대설교에도 또 정점(climax)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점을 아는데 따라서 그 전체를 살필 수가 있다.

 

그리고 정점은 712절이다.

 

,

그러므로(이 때문에), 무릇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일은 너희 또한 남에게도 그 같이 하라.

 

복이 있다는 즐거운(유쾌한) 일성(一聲)으로서 산 아래를 발족한 이 신앙적 대등산은 황금률(the golden rule)로서 전 세계에 칭송되는 이 일절에 이르러, 산마루의 정접에 달한 것이다.

 

이것을 후지산(2277역주)에 비유할 것인가?

8개의 축복은 이것을 산기슭의 8호로 보아 놓으리라.

그리고 오르고 올라 꼭대기까지 오른 곳, 즉 후지산이라면 켕가미네라는 곳이 산상의 수훈에 있어서의 황금률이다. 그 사이에 무나쯔끼 핫쵸우라고 하는, 절벽에 유사한 곳도 있다.

 

율법도 있다. 심판도 있다.

하지만 산은 은혜의 산인 것으로서

그 산기슭은 축복의 호수, 그 산마루는 사랑이다,

 

우리들은 중간의 거암 처창 한데 마음이 빼앗겨 전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5장 처음의 2절은 이 대설교가 행해진 경우를 말한 것이다.

 

예수의 성명 사방에 펴지니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요단 저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에게 듣고자 했다(마태복음 4:25).

 

이제 가버나움에 있어서의 베드로의 집은 이 군집을 받기에는 너무나 좁았다.

또 동네와 호수와의 사이에 그들을 수용할 장소가 없었다.

 

이 광경을 보고, 예수는 그들을 인도하여 뒤편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원어에 있어서는 산은 특별한 산, 즉 그 산이라 있으매,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또는 사방 전방위해 종종 올라가신, 그분 특애의 산이었으리라,

 

그는 거시서 않으셨다고 있으매,

그는 잠시 그들을 가르치시려고 착석하신 것이다.

 

청중, 산상의 고대에 모이고, 제자들은 그의 발아래 앉았다.

봄은 이미 중간, 푸른 풀은 부드러운 깔개를 놓고, 꽃은 웃으며 새는 지저귀어, 수훈 최량의 재료를 주었다.

청중과 천연 있어서, 그는 입을 열고, 숙연히 침묵을 깨뜨려 말씀하기 시작했다.

 

복이 있다.

 

53절 이하 12절까지는 수훈의 서언으로서 볼 수가 있다.

복음의 소개의 말인 동시에 그 축사 또는 경개이다.

 

만약 그리스도교를 응결(condensation)한 것이 산상의 수훈이라면 그 정요(essence) 그 모두를 장식하는 것이 이들 축복의 말이다.

 

(1 복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2 복이 있다. 슬퍼하는 자는, 그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3 복이 있다. 유화한 자는 그 사람은 땅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4 복이 있다. 주리고 목마른 사람 같이 의를 사모하는 자는, 그 사람은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5 복이 있다. 자비한 자는, 그 사람은 자비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6 복이 있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7 복이 있다. 평화를 구하는 자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기 때문이다.

(8 복이 있다. 의로운 일 위해 박해 받는 자는, 천국은 곧 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축복의 말씀은 8절이다.

모두 놀라운 말씀이다. 처음으로 이것을 들은 자는 경해의 감에 잡혔으리라.

 

축복은 사모할 만해도 그 조건이 의외이다.

예수가 복이 있다고 하신 자는 모두 이 세상이 불행으로 여기는 자이다.

 

이 세상은 말한다.

 

부한 자는 복이 있다.

위 있는 자는 복이 있다.

지혜 있는 자는 복이 있다.

학식 있는 자는 복이 있다.

천재 있는 자는 복이 있다.

권력 있는 자는 복이 있다.

 

하지만 예수는 그 모두를(어느 것도) 복이 있다고 칭하지 않으셨다.

 

그 반대로, 예수가 복이 있다고 한 자는, 이 세상이 불행이라는 자였다.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사람에게 박해받는 자, 주리고 목마름 같이, 부귀 아니고 의를 사모하는 자, 유화(온유)한 자, 그러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한다.

 

어리석음인가, 이상인가, 거룩함인가?

 

청자는 그 의미를 찾는데 궁했으리라. 하지만 예수는 권위로써 이들 말씀을 발하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예수의 확신이었던 것이다.

 

즉 세상의 행복은 불행이다.

세상이 말하는 불행은 행복이다.

 

이 세상과 천국과는 전연 성질을 달리한다고 예수는 가르치신 것이다.

수훈 발단의 말씀이 이미 혁명적이다.

누가 이에 감당할 자 있으랴!

 

세상이 이에 감당할 수 없음은 물론, 이른바 그리스도 신자까지도 이를 들어도 믿지 않는다.

 

가난의 행복, 비애의 행복, 기갈의 행복, 박해의 행복,

예수는 개구 일번 그러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산상의 수훈이 무엇인지는 이 놀라운 서언에 의해, 거의 추측할 수가 있다.

 

산상의 수훈 또는 설교의 이름은 영어의 The sermon on the mount

또는 독일어의 Die Bergpredigt의 역자이다.

 

그러나 이는 적당한 이름은 아니다.

마가복음이 기록한 것같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과 맞다.

 

훈계 또는 설교가 아니다. 복음이다.

예수가 천상에서 가져온 즐거운 소식이다.

이름은 사실을 보임을 요한다.

 

이것을 복음이라 일컫지 않고, 수훈이라 불렀기 때문에, 많은 유해한 오해를 부른 것이다.

 

예수, 허다한 사람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라고 있다.

 

보고, 이를 피하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군중을 피하여 제자들을 데리고 고요한 산에 올라가,

거기서 그들(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도 일찍이 이 해석을 취하여 이것을 세상에 소개한 일이 있다.

하지만 먼 나라(지역)에서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 한 청중이,

그가 산에 올라갔다고 해서, 산기슭에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보고서는, ‘데리고로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정오의 의미로 이것을 부기한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