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거듭난 삶 2024. 4. 13. 00:17
728x90

군인 백부장의 신앙

 

마태복음 85-13;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참조 : (누가복음 71-10, 사도행전 10)

 

 

마태복음의 기사에 의하면,

 

첫째로, 고침 받은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그 병은 나병(癩病)이었다.

예수는 이에 손을 대서 고치셨다고 한다. 이에 이어서

 

둘째로, 고침 받은 자는 이방인으로서 그는 로마 군대에 속하는 백부장의 종이었다.

그리고 그 병은 중풍으로서 예수는 먼데서 말씀을 가지고서 이를 고치셨다고 한다.

 

한 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으로서 하늘 안, 땅 위의 모든 권능을 아버지에게서 받은 하나님의 아들의 행하심으로 보아,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문제는 기적은 아니다. 이에 따르는 사실이다.

기적으로서 나타난 예수의 성격, 주의, 신앙이다.

 

백부장은 오늘로 말하면 소대장, 또는 중대장이다.

훈련된 로마 군대에 있어서의 소위, 또는 중위이다.

저급사관이기는 했으나, 잘 로마 군인의 정신을 나타내고, 규율 바르고, 위권 있고 엄숙하여 잘 상관의 명에 복종함과 동시에, 또 부하로 하여금 잘 자기 명에 따르게 했다.

로마제국의 위대는 이 엄숙한 군대에 의해 얻어지고 또 유지되었던 것이다.

 

군대는 반드시 압제의 도구라고는 할 수 없다.

잘 이것을 사용하여 평화는 확립되고 또 지지된다.

로마제국 400년의 평화는 그 일면에 있어서 확실히 그 유력한 군대의 혜택이었다.

그 보호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은 비교적 단시일에 당시의 문명 세계를 복음화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질서 법률은 그리스도교가 중히 여기는 일이다.

따라서 그 유지의 임무에 있었던 로마 군인은 절로 복음에 이끌려 그 존숭가 또는 구도자였다.

 

복음서의 이 경우에 있어서 뿐 아니라, 사도행전 10장에 있어서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경우 같은 것, 22장에 있어서의 바울을 보호한 백부장 및 천부장의 경우 같은 것,

기타, 23, 24, 28장등에 나타난 백부장은 모두 복음의 보호자였다.

 

사도들 특히 바울이 그들을 중히 여긴데 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군인을 사랑하고 군인은 예수를 사랑했다.

군인이 만약 참된 군인이라면 그러함이 당연하다.

 

마태복음에 의해 전해진 둘째의 기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이 일에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이방인, 더구나 이 이방의 군인에게 드물게 보는 독실한 신앙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신앙이란, 간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실로 군인의 장소는 그 간단한 데 있다.

명령에 따르고 명령을 행하게 하면 그것으로 만사는 족한 것이다.

이유와 의론의 필요는 조금도 없다. 명에 다만 따른다. 그것이 군인의 생명이다.

 

시인 테니슨(1441역주)경기병의 돌격의 노래에 말한 대로,

 

우리들은 왜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복종하여 죽으면 족하다고 하는 것이다.

 

백부장은 이 정신으로서 예수께 임한 것이다.

 

백부장, 사람을 보내어 예수께 말씀드리게 하기를 주는 친히 오실 것 없습니다.

주님을 제 집으로 모셔오는 것은 너무 송구합니다.

제가 주님 앞으로 나가기도 너무 송구합니다. 다만 한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리하면, 제종은 낫겠습니다. 저도 역시 권위아래 속한 자로서,

제 아래에도 또한 병졸 있어서, 이더러 제가 가라 명하면 가고,

저에게 오라 명하면 옵니다.

제가 종에게 이것을 하라고 명하면 곧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6-8)

 

무슨 일이든 명령과 복종으로서 행해지는 군대에 사는 자는 누구에게 대해서도 이 정신으로써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이 정신을 치하하셨다.

백부장의 이 말을 듣고서 주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아직 이러한 신앙을 보지 못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에서 서에서 와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고,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슬퍼하며 이를 갈 것이다라고.

 

예수는 로마 군인의 무사도를 칭찬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 특히 그 종교가들은 얼마나 노했으랴!

 

이방인이 더구나 이방의 군인들이 동에서 서에서 와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고, 유대 국민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리라는 것이다.

 

이는 약속의 땅과 그 백성을 모욕하는 말로서, 그 무례야 말로 용서못할 것이라고 하여,

그들은 심히 분개했으리라.

 

하지만 예수의 예수이심은 이에 있다.

그는 진선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나라의 내외, 백성의 이동을 묻지 않았다.

선한 일은 누구에 의해 어디서 행해진대도 선한 일이다.

 

예수의 도덕은 그의 애국심에 초월했다.

 

로마인이거나, 바리새인이거나, 선인은 선인이다.

유대인이거나 바리새인이거나, 악인은 악인이다.

 

예수는 인류의 교사이다.

특히 유대인에게 파견된 이른바 백성의 학자는 아니다.

예수의 이 인류적 태도는 그의 기적만큼 그것만큼 위대하다.

옳다. 기적 이상으로 위대하다.

그리고 예수는 여기서 그의 이상을 발표하셨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먼저 곧 백부장의 종의 병을 고쳐주시어 그의 말씀을 실행하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서의 군인계급에서 허다한 충실한 제자를 택하시어 이 말을 실행하셨다.

 

그리스도의 지상의 교회를 일컬어 Church militant라 한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말할 것도 없이 전투의 일종으로서, 투지 없는 자가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의미에 있어서 교회는 군대의 일종이다. 이것은 법률가나 사상가의 변론회는 아니다.

너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 명하면 온 자의 중합이다.

 

즉 권위가 행해지는 곳으로서 의론이 행해지는 곳은 아니다.

이에 있어서 일지, 그 지도의 임무에 나선 자도 거의가 군인의 집에서 태어난 자이든가

또는 군인 기질의 사람이었다.

 

지금 여기서 그 2, 3의 예를 들면,

 

사도 이후의 초대의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신앙 학식, 남보다 뛰어나 이미 부패된 교회에 있어서 순복음의 신앙으로 부동했던 죤 크리소스톰(8203크류소스토모스 역주), 로마 장군의 유자(posthumous child)로서, 또 어머니로서는 무사 기질의 현부인 안투사(2126역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크리소스톰의 일생애가 실로 무사적 그리스도교의 호모범으로서, 그 당시 및 후세에 끼친 감화력이란 거의 바울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것이 있다.

 

또 가까이는 영국의 설교사로서 지금에 이르러서도 계속 많은 경모자를 가지며, 일본의 그리스도 신자로서 그 감화를 입은 자도 또한 적지 않은 프레데릭 W. 로버트슨(875역주), 육군 포병 사관의 아들로서, 그의 일생애가 그리스도에게 쓰이는데 군인의 정신을 가지고서 한 자였음은 그를 아는 이가 잘 아는 일이다.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는 제스이트파의 창설자 익나티우스 로욜라는, 군인이 선교사로 화한 사람으로서, 그의 정신을 받아 유명한, 사비에(-사비에르)는 멀리 우리 일본에 전도하고, 우리나라에 있어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호명되는 그 기를 연 분이다.

 

기타 계수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있어서 프로데스탄트 주의의 그리스도교가 전해지자, 처음으로 이것을 받아 그 신자로 된 이가, 나베시마(1580-1657)의 참모 무라다 와까사라는 무사였다.

 

그 후, 같은 복음을 받아 일본국의 교화에 그 일신을 맡긴 자로 니아지마죠우군(1380역주), 혼다요우이쯔군 등, 한가지로 무사의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기이한 것은, 일본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그 감화력이 가장 위대했던 자의 두 사람은 자신 군직을 몸에 지녔던 사람이었다.

 

즉 구마모도의 캡틴 제인즈(Captain Janes 제인즈), 사뽀로의 콜로넬 클라크(-클라크)가 그들이었다.

즉 일본에 있어서도 복음은 군인에 의해 전해져 군인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실로 많은 사람들 동에서 서에서 와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된다.

 

예수는 평화의 임금이신데, 그 부하로서 충실한 군인을 구하신다.

그리고 군인이 복음의 전사로 화한 때, 가장 유력한 평화의 사자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렵지 않다. 복음은 간단하다. 명료하다.

그리고 거의는 명령에 의해 행해지는 일이다.

 

예수가 승천에 있어서 최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마태복음 끝장의 나중에 기록된 다음 말씀이다.

 

하늘 안, 땅 위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이러므로, 너희는 가서, 만국의 백성에게 침례를 주고,

이것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제자를 삼고,

또 내가 모두 너희에게 명한 말씀을 지키라고 그들에게 가르치라,

대저 나는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이것은 대장군이 부하에게 발한 명령이다.

나는 대권을 받았다. 내 명령을 전 세계에 전하라는 말씀이다.

어찌해서라고 문제를 만들어 공구할 말씀은 아니다.

예언자 이사야 같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며, 곧 복종해야 할 명령이다.

 

그리스도교는 철학적 종교라 하고, 먼저 그 철학적 근저를 궁구하고서

그런 후에 나설 것이라는 자들은, 도저히 예수의 충실한 제자일 수 없는 자이다.

 

백부장은 일면하여 예수께서 어떠하신 인지를 알았다.

그는 곧 그 발아래 엎드려 말했다.

 

주여, 나는 당신을 내 집에 모시는 것을 크게 송구해 합니다.

다만 한마디 해주옵소서. 그리하면 내 종은 낫겠나이다.

 

참된 신앙은 이같이 하여 생기는 것이다. 예수께 만난 그날 그때에 생기는 것이다.

복음서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예수께 따라나선 것도 또한 순간적 결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4:1이하).

 

법학사 또는 사상가 또는 예술가가 일생 드려 예수를 연구하여 그를 알 수 없음은

그들에게 군인 기타 모든 거짓 없는 사람들에게 있는 이 신뢰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보라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그 마음에 거짓이 없다. ’(요한복음 1:47).

 

그리고 참된 로마인, 참된 그리스인, 참 영국인, 참 일본인은 모두 그처럼 예수에게로 간 것이다.

 

번거러운 이치와 우원한 의론과 복잡한 설명은 무사의 금물이다.

조금도 철학을 겁낼 것 아니다. 과학은 이것을 환영한다.

 

하지만 진리는 진리, 일목요연하다. 군명(inperial command) 이에 따르는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마음으로서 예수께 나아감으로서 만,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왕, 내 전신을 드려 잘못됨이 없는 분이심이 판명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아, 귀한 것은 일본의 무사도이다.

무사도는 복음을 접목하기에 가장 좋은 대목(stock)이다.

 

이 나무에 접붙이는데 이 새 가지(young branch)로서 하여,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 있어서의 무사도(武士道)의 쇠운은, 복음위해 가장 탄식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일본의 정화로서, 아마도 아시아 문명이 나은 최선의 것이리라.

원하기는 그것이 아주 끊기지 않은 이 마당에서 복음을 접수하게 되기를.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