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거듭난 삶 2024. 4. 15.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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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제어

 

마태복음 823-27: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참조 : (마가복음 435-41, 누가복음 822-25)

 

예수는 기적으로서 병인을 고치셨다.

 

다만 손을 대시는 것만으로 나병환자를 고치셨다.

먼 데서 소리를 발하시는 것만으로 백부장의 종을 고치셨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다. 이것만으로도 큰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적은 이것에 그치지 않으셨다.

그는 또 대풍을 잔잔케 하셨다. 귀신을 쫓아내셨다. 죄를 사하셨다.

 

즉 우주를 제어하고, 영계를 지배하시고, 양심을 주재하는 권능 있음을 보여 주셨다.

 

예수는 단지 개인의 구주가 아니시다. 우주의 주재자이시다.

 

혹은 하늘에 있고, 혹은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에베소서 1:10)고 있어서 그는 천상천하, 만물의 중심적 세력이시다.

 

예수는 과연 그러한 절대의 기적을 행하셨을까?

 

그가 병인을 고치셨다는 것은 믿기에 어렵지 않다.

대인물의 정신적 감화에 비상한 것이 있는 까닭에, 이것이 원동력이 되어 마침내 육체의 병이 낫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서, 우리들은 조금도 괴이히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일언(一言)으로서 사람의 병을 고치고,

일언으로서 바다의 파도를 잔잔케 한다는 것은 전연 별종의 일이다.

 

전자는 이것을 믿기에 어렵지 않다 해도 후자는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예수가 천연계에 베풀었다는 기적은, 이것은 사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아 무관하다는 것이 많은 유력한 신학자의 의견이다.

유명한 카임선생(Keim -10113역주) 같은 이는 이 설의 유지자이다.

 

사실 과연 그럴까?

복음서의 기사 그것이 전연 사실적이 아닌가?

 

여기에 아무런 무리한데가 없다. 장식도 없으려니와 형용도 없다. 사실 있는 그대로이다.

 

폭풍(풍속 30이상의 강풍 hurricane)이 일어난 때에, 예수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은 위험이 자신에게 다가옴을 보자, 그를 깨우면서 말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아보시지 않습니까?.

 

이 소리를 듣고서 예수는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다.

 

고요하라, 잔잔하라.

 

이에 바람은 그치고 물결은 아주 잔잔해졌다고 한다(마가복음의 기사에 의한다).

 

이것뿐이다.

그러한 절대의 기적을 행하셨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간단한 기사랴!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러한 대 기적을 행했다고 하면 그 기사에 수만어(數萬語)를 써도 오히려 부족함이 있었으리라.

 

예언자 엘리야가 갈멘 산상에서 비를 기도한 기사마저도 열왕기상 제18장 전장에 걸쳐 있다.

니찌렝(2208역주)의 소우슈우=사가미)에 있어서의 기우의 기사 같은 것, 피 끓고 혼백 뛰는 모양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호상의 구풍(hurricane)을 잔잔케 하신 형편은 전혀 이것과 다르다.

 

예수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 향하여,

잔잔하라, 입을 닫히라고 하시니 바람 그치고, 파도는 잔잔해졌다고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마치 권위 있는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정숙을 명하여 그 명이 행해지는 것과 동연이다.

우주의 주재자가 바람과 바다의 정숙을 명하여 그대로 된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기록하는데 길 필요가 없고, 간단한 기사로 족하다.

 

하지만 약한 인간의 눈으로서 볼 때, 간단하고 장대하다.

우리들도 역시 이것을 읽고서, 사도들과 한가지로,

 

바람과 바다조차도 복종한다. 이는 누구신가?’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는 그러한 일을 하실 수 있지 않는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인류의 왕이시며, 만물을 부흥하고, 사자를 부활케 하시는 이시라는 것이 성서의 주장이다.

 

그는 소()하신 구주가 아니시다. 크신 구주이시다.

 

그는 공맹 석기라고 하여, 공자(2282역주)나 석가(2282)와 유를 같이하는 분은 아니시다.

 

그는 하나님이 육체를 취하여 나타나신 분으로서 세상의 터가 놓여지기 전부터 성부와 영광을 함께 하신 분이시다. 그러하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고, 또 우리들도 구원할 수 있는 분이시다.

 

사람이신 구주는 몇 사람 있대도, 세상도 나도 구원할 수는 없다.

 

공자는 위인이라고 하나 그가 세계는 말고, 그의 생국인 지나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바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드, 헤겔, , 스펜서, 모두 위대하기는 위대하다 해도 코로 호흡하는 사람’(2:22참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에게서 구원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인류는 한때 미국 전 대통령 윌슨(952역주)에게서 세계의 구원을 기대했다.

그런데 그의 사업은 대 실패로 끝나고, 그 자신마저 실의 실망의 끝을 마쳤다.

 

레닌(Lenin 1870-1924 쏘련 볼쉐비끼당의 창설자), 끌레망소(Clemenceau 1841-1929 프랑스의 정치가), 로이드 죠지(Lloyd George 1863-1945. 영국의 정치가),

인류의 구주로서는 얼마나 약한 사람들인가!

 

다만 한 사람, 나사렛 예수는 우주를 제어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인류도 나도 구원할 수가 있다.

 

그에게 의지하여 우리들은 실망하지 않는다. 그에게 맡겨 우리들은 안전하다.

그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힘(능력)이 있는 때문에 나는 그가 마지막 날에 나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믿는다.

 

만물, 그의 명에 복종하는 까닭에 나는 새 하늘과 땅이 나타나 하나님 우리들의 눈의 눈물을 모두 씻어 주시고, 또 죽음 없고, 슬픔 탄식 고통 없는 복된 상태와 실현될 것을 믿는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이 기적은 있어서는 안 될 기적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기적이다.

 

이러한 신앙이 오늘의 일본인 전체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일본인 뿐 아니라, 서양인의 다수도 역시 이것을 믿지 않는다.

옳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마저 이 신앙을 말하는 자는 아주 적다.

 

하지만 이것이 성서의 신앙이라는 것,

또 오늘까지 그리스도교 전체의 신앙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들은 요한복음 발단의 말이 이 신앙을 전하는 것임을 안다. 이르기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만물이 이에 의해 창조되었다.

창조된 것으로서 하나도 이에 의하지 않고서 창조된 것은 없다.

 

그리고 제14절에 이르러서

 

말씀, 육체로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있음을 보아,

 

이상의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신 말씀임을 안다.

예수는 만물의 창조주라는 신앙이다. 놀라운 신앙이다. 하지만 모든 크리스천의 신앙이다.

그리고 이 신앙이 신약성서를 관철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는 바울의 신앙으로서 이 신앙을 고조하고, 요한복음 및 계시록은 요한의 신앙으로서 이 신앙을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단지 위대한 인격자로 보는 것만으로는 성서는 알지 못한다.

 

나는 알파이다. 오메가이다. 처음이요, 나중이다. 시작이요, 끝이다’(계시록 22:13)라는 것은

 

그가 자기에 대하여 하신 말씀으로서 1900년간의 그리스도 신자 전체는 이 말씀을 문자대로 믿어 온 것이다.

 

물질 과학의 입장에서 이 신앙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철저한 신앙생활은 이 신앙 위에서만 행해진다.

 

내 구주는 우주 만물의 주재자이시다. 사물로서 그에 의하지 않고서 창조된 것은 없다.

모든 것 그에 의하지 않고서 행해지는 것 없다고 해득하여 내게 참된 평안이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물결이 일어나도, 지진이 일어나도, 뇌성이 나도 모두 그가 통치하시는 것, 그가 이것을 일으키시고, 그가 이것을 멎게 하시는 것을 알 때, 나는 위험 많은 이 세계에 있어서 영원한 평안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과 천연이라 하여, 천연을 하나님의 상대로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는 바람을 천사(사자)로 하시고, 불꽃을 사역자로 삼으신다 (히브리서 1:7)고 있어서,

 

천연을 하나님의 사자 또는 사역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연을 두려워 않고 도리어 이것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의 사람은 천연의 정복이라고 하면, 천연 과학으로서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으로서 시작한 것이다.

 

누가 능히 세상에 이기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가 아니랴!’(요한 제15:5)

사도 요한의 말은, 인류의 사상발달사에서 보아 의미 깊은 것이다.

 

세상은 원어의 코스모스이고, 천연계도 포함하는 말이다.

실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자가 천연계에 이길 수 있어, 근대과학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천연과학이 불교국인 지나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리스도교국의 구미에 일어나고 번영한 것은, 그 안에 깊은 신앙상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 요한복음 1633절에 있어서의,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 말라. 내가 이미 세상에 이겼다

 

주 예수의 말씀 같은 것, 단지 영적으로만 해석할 것은 아니다.

또 물적 즉 천연적으로도 해석할 것이다.

 

예수는 천연에 이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위 천재를 만난대도 두려워할 것 못된다.

천재도 그의 장중(in his hand)에 있다. 그의 허가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또 우리를 해할 수는 없다.

 

예수가 천지 만물을 주재하시는 것이라 믿어, 우리도 또한 그와 함께 대풍 거칠게 설레는 물결 위에 고요히 베개하고 잘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의 이 신앙에 대하여 사람은 말하리라,

 

만약 그렇다면 이번의 지진 같은 것은 이것을 어떻게 보는가,

이것 역시 예수께서 일으켰다고 하는가?

가령 이것을 일으키지 않으셨대도 어찌하여 그는 이것을 멎게 할 수 없었던가.

 

만약 그러한 질문을 바울에게 했더라면, 그는 로마서 919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으로서 대답했으리라.

 

아아 사람아, 너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거슬리느냐.

지음 받은 자는 지으신 이에게 향하여,

당신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20).

 

예수는 사람이시며 또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는 바는 사람의 보는 바와 다르다.

사람은 목전의 일 외에, 볼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영원한 미래를 투시 하신다.

 

우리들 신자라 해도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 재해를 일본에 내리셨는지를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일본 위해 생각하시고 인류 전체 위해 생각하시어, 그런 것이 선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고 믿는다.

 

옳다. 믿는 것이지, 안 것은 아니다. 우리들 자신에게도 이 일에 대해 많은 의심이 생기는데,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이렇게 믿는다.

 

그리고 이 신앙은 틀리지 않는다고 믿는다.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지금부터 100년 또는 200년을 거쳐 뒤를 돌아다보고,

사려 있는 일본인은 모두 이 대지진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게 되리라.

 

그리고 바울과 함께 외쳐 말할 것이다.

 

아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는 깊도다.

그 심판은 측량할 수 없고, 그 길은 알아 낼 수 없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랴? 누가 그와 함께 상의를 했던가!

누가 그에게 드려 그 보수를 받으랴!

대저 만물은 그에게서 나와 그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에게 돌아가는 도다. 영광 한 없이 그에게 있으리로다. 아멘’ (로마서 11:33-36)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