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거듭난 삶 2024. 4. 1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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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家事)의 축복

 

마태복음 814-15: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참조 : (마가복음 129-31, 누가복음 438-39)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고치셨다는 일은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으로 보여,

세 복음서 모두 그 기사를 싣고 있다.

 

그 중에서 마가가 가장 자세하고, 누가가 다음, 마태가 가장 간단하다.

 

예수는 함부로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고, 이것을 행하심에 깊은 이유 있음을 알아,

세 복음서가 모두 이 기적을 전함을 볼 때,

그 중에 무슨 깊은 의미가 있었음이 추량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를 찾음에 있어서 가장 좋은 길잡이로 되는 것이,

간단한 마태복음의 기사이다.

 

기자가 예수의 행하신 허다한 기적 중에서 대표적인 9개를 택하고,

그 안에 이 기적을 가한 것으로 보아,

그 무엇 때문의 기적이었는지를 거의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들에게 있어서 기적은 실로 기적인 것으로서

근세 과학으로서 설명해 버릴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첫째로 주의할 것은,

고침 받은 자가 베드로도 아니고, 또 그의 아내도 아니며,

그의 아내의 어머니 즉 장모였다는 것이다.

 

즉 예수에게 있어서 인연이 먼(관계적은) 자로서, 그의 전도 사업에는 관계가 극히 적은 자였다.

우리들은 다만 1, 여기서 그녀에 대할 뿐이고, 그 후의 그녀의 생애에 있어서, 성서는 아무 기록한 바가 없는 것이다.

 

베드로의 아내는 그와 함께 전도에 종사했던 것은, 고린도전서 95절에 있어서의 바울의 말씀에 의해 알 수 있다 해도, 예수께 고침받은 그녀의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는지, 감감하여 소식 없다. 그녀는 전도 사상 아주 하찮은 지위에 섰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이 기적이 행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 기록된 기적이 예수께서 큰 바람을 잔잔케 하셨다는,

우주 제어를 표호하는 기적이었음을 알 때, 우리들은 이 작은 듯이 보이는 기적 안에,

깊고 커다란 의미를 발견치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 호반의 활동의 일인, 그가 본전으로 정하신 베드로의 정숙한 가정에 있어서,

아마도 그 취사를 맡고 있는 그 아내의 어머니가, 그 땅의 풍토병인 열병에 괴로움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동정해 마지않아, 손을 펴서 이에 대시니, 열은 곧 물러가고,

그녀는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고 한다.

 

일은 예루살렘 교외 베다니에 있어서의 마르다, 마리아의 자매에 관한 기사와 한가지로

예수의 가정미를 보여준 것으로서, 이것을 아름다운 가정소설의 일절로 볼 때,

순금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왕이신 예수가 행하신 일이매,

여기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 또는 기쁨이다.

 

나는 생각한다. 주는 가사(家事)를 축복하시기 위해 이 기적을 행하신 것이라고.

마치 결혼을 축복하시기 위해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신 기적을 행하신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본래 가정의 사람이었다. 그의 보잘 것 없는 나사렛의 가정은 그의 지상의 천국이었다. 그는 잘 가정의 세력을 아셨다. 이는 나라의 터, 교회의 주춧돌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천막 안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사 정리의 책임을 맡은 자, 그는 지상에 있어서의 하나님 나라의 요람(cradle)을 관리(취급)하는 자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가 그 임무에 임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에 있어서 인류는 가냘픈(섬약한) 부인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집의 경우에 있어서, 이 임무는 그의 아내의 어머니(장모)가 맡았다.

그녀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부지런한 노숙의 부인이었다.

그녀 있기 때문에 가정은 청결하게 질서가 있고, 집사람 전체가 굶주리는 일 없이, 또 앓지 않는 것이다.

 

솔로몬이 그녀(여인)를 칭양한 말에 이르기를,

 

그녀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즐겨 손수 일한다.

그녀는 상인의 배와 같다. 먼 나라에서 그 양식을 운반한다.

그녀는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 그 집사람에게 양식을 준다

그녀는 그 손에 솜뭉치를 들고, 그 손가락 가락을 잡는다

그녀는 집사람 위해 눈을 두려워 않는다.

그것은 그들(집사람) 모두 홍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잠언 31:13-15, 19, 21)라고.

 

그녀 있어서 가정 있고, 그녀 없이 가정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녀가 특히 귀한 이유는, 그녀 자신은 자기의 귀존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도 또 전체로 그녀의 귀존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취사(cooking)이다. 재봉이다. 이는 고용인이 할 수 있는 일,

굳이 주부인 숙녀가 이것을 할 것 없다고 하는 자가 있다.

하지만 예수는 그 나사렛 가정에 있어서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잘 아셨다.

 

취사도 사랑을 요하고, 재봉도 사랑을 요한다. 사랑 없는 식물에 맛은 없다.

사랑 없는 의복에 따뜻한 맛 없다.

맛 없는 냉냉한 사회에 있어서 맛과 열을 제공하는 것은 가정인 것으로서 그 원천은 주부이다.

 

세상은 할머니’ ‘주인 아주머니(마담)’라고 하여 그녀를 업신여기지만

모든 참된 행복은 그녀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잘 아신 예수는, 호반의 전도를 마치고 베드로의 집으로 돌아와 그의 장모가 열로 고생함을 보시자, 그가 하나님이심의 능력을 나타내어 그녀를 고쳐주시고, 그녀의 일을 축복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세계의 일을 몸에 지신 주께서, 가정의 소사에 일신을 맡긴 하찮은 부인에게 유의하실 리 있느냐고 묻는 것이 세상 사람의 버릇이다.

 

하지만 인류의 구주이신 까닭에 그는 그녀에게 능력을 경주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당일의 경우에 있어서 베드로의 장모는 가장 중요한 지위에 선 자이다.

 

그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 드니라고 있다.

 

예수와 그 제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편안히 쉴 수 있게 할 자는 그녀를 두고 달리 없었던 것이다.

 

전도는, 단지 사상있고 변설있는 이른 바 전도사의 일 뿐은 아니다.

그들을 키우고 그들에게 안주할 거처를 제공하는 자도 또한 전도의 대임에 임한 자이다.

 

예수는 이날, 세계교회의 중요기관으로서의 부인 후원의 필요를 인정하여 이를 축복하시기 위해 이 기적을 행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이 일이 좀 대규모로 나타난 것이 누가복음 81-3절이다.

찾아 볼 것이다.

 

예수 베드로의 아내의 어머니(장모)의 병을 고치셨다.

전에는 로마 군인의 신앙을 사랑하사, 그 종의 병을 고쳐주시고,

후에는 갈릴리 호면에 거칠게 부는 대풍을 잔잔케 하여, 제자들의 생명을 구원하셨다.

 

일은 서로 관련하여, 주 예수의 마음()과 그 가르치심의 성질을 보여 그릇됨이 없는 것이다.

 

만물을 주재하시는 그에게, 인종 국민의 차별은 없고, 또 사업 존비의 상위는 없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가장 비천하게 보이는 자가 가장 높고, 필요하지 않게 보이는 자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께서 그 어머니 마리아에 대하여 효양을 다했다고, 별로 성서에 써 있지 않으나,

그러나 베드로의 장모에게 베푼 기적 같은 것, 확실히 마리아에 대한 존숭의 마음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를 낳고 그에게 따뜻한 가정을 제공한 마-가레트가 일으킨 것이다.

 

웨슬리형제(571)에 의해 메도디스드교회가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들의 경건한 어머니인 수잰너(13179역주)에 의해 생겨났던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아내의 어머니(장모)를 고쳐주신 예수는, 지금도 또한 많은 눈에 띠지 않는 아내와 조모를 고쳐주시고 있다.

 

예수는 우주의 주인인 동시에 또 부엌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눈은 그곳에 주목되고, 그의 사랑은 거기서 일하는 자의 위에 나타나신다.

일은 소사가 아니라 대사이다.

초대의 그리스도 신자가 예수의 이 기적을 중요시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교는 부엌의 종교라고 듣고서 웃는 자는, 아직 그것이 어떠한 종교인지를 모르는 자이다.

 

부엌은 이것을 하녀에게 맡겨두고, 자기는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며 악을 연주하는 것으로서 고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아직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의 마음을, 모르는 자이다.

 

귀한 것은 예수의 가르치심과 하시는 일이다. 그 모두가 의외이다.

이것을 듣고서 기뻐하는 자는 모두 세상에 눌리는 자(박해받는 자) 또는 업신여김 받는 자이다.

 

그리고 (이것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자는 모두 세상에 칭송되는 자 또는 존귀히 여김 받는 자이다.

 

이 기적 하나가 세상의 모든 하녀, 하남 기타, 도메스틱스(domestics)라 하여,

가정의 소사에 연 백년 중, 그 일생을 맡긴 사람의 아내 또는 어머니들에게 있어서 위안으로 된 대 복음이다.

 

가정의 개량은 물론의 일, 사회의 개량도 국가의 개량도, 이 복음 없이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부엌에 일하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존경하라, 또 자기도 그것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베드로의 아내의 어머니(장모)를 기억하라.

주는 그녀를 사랑하시어(불쌍히 여겨), 모두 그녀와 지위를 같이 하는 자를 축복하셨다는 것은 세 복음서가 특히 이 기사를 실어 후세를 가르치시려 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스도전()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다수의 사람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그를 세상의 이른바 위인으로 보고, 그가 마치 대혁명을 일으킨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는 결코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다.

보다도 혁명은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다.

 

그는 당연한 것을 가르치고 당연한 일을 행하신데 지나지 않는다.

그 의미에 있어서 그는 범인(凡人)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모두 부당한 일을 행하는 까닭에 예수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고, 그에 실망하고, 그에게 자극되어, 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는 결코 세상에 싸움을 걸지 않으셨다.

세상이 만약 세상이라면, 즉 죄의 세상이 아니라 의의 세상이었다면,

그는 갈릴리의 공장(工匠)으로서, 그 평화로운 일생을 끝 마치었음에 틀림없다.

 

사람이신 예수의 입장에 서서, 세상이 그에 대하여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셨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가정의 사람, 노동의 사람, 신앙의 사람, 평화의 사람, 만족의 사람이었다.

 

세상에 소동을 일으키는 일 같은 것은 그의 가장 싫어하시는 바였다.

 

그런데 세상이 그와 정반대였기 때문에 그는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검을 가져오는 원인으로 된 것을 보고, 그는 매우 마음을 아프게 하셨음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가 그러했다. 그리스도 신자도 또한 그러하다.

그는 무엇보다도 평화를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소동을 싫어한다.

 

그런데 세상이 그에게 부딪쳐(만나)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자국인과 동양(同樣)으로 외국인을 사랑한다고 듣고서 애국자가 노발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부엌에 임하지, 심창(sequestered room)이나 화장실(dressing room)에 임하지 않는다고 듣고서, 주부나 영양이 떠들고 나서는 것이다.

 

예수는 귀족도 아니고, 부호도 아니며, 또 학자도 아니고, 보통 사람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사람다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상은 그를 우러러 받들던가,

그렇지 않으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어떠하다 해도,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크리스천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즉 철저한 사람일 수 있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