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거듭난 삶 2024. 4. 16. 00:09
728x90

가다라의 사건

 

마태복음 828-34: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참조 : (마가복음 5: 1-20, 누가복음 826-39)

 

특히 마가복음 기사에 주의하라.

예수는 단지 대교사는 아니었다. 또 대유능자는 아니었다.

그에게 천연을 지배하는 능력이 있었다. 또 영계를 주장하시는 권위가 있었다.

바람도 바다도 그에게 복종했다. 악귀도 또 그에게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는 단지 그 고결한 교훈으로서 사람을 인도하고 세상을 감화하신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대능으로서 병을 고치시고, 악귀를 정복하셨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서 (손에 의해) 악귀를 쫓아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누가복음 11:20)라고 그는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수를 배우려는데 있어서 그의 이 방면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단지 도덕의 교사라고 생각하여, 그를 실세계에서 장사해 버려서는 안 된다.

 

이러므로 우리는 자비함을 받고, 때를 따라 주시는 도움이 되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4:16)는 것이다.

 

여기에 이 놀라운 기사가 있다. 기사 그것의 의미는 극히 명료하다.

그 지리 역사 등은 당시의 상황 그대로이다.

돼지 떼가 산비탈에서 바다에 떨어져 빠져 죽었다는 곳은 지금은 케르사로 불리며,

호수에 직면한 낭떠러지(단애 precipice)이다.

 

베가볼리 지방에서 전파(퍼뜨림) (5:20)했다는 것은 십시로 불리며,

갈릴리 호수의 동남에 있어, 그리스풍의 소도회 십시가 일단을 이루어 일지방을 형성한 곳이다.

여기서 행해진 기이한 일(기적)을 제외하고는 기사 그것 안에 부자연스런데는 조금도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단지 행해진 일의 사실 여하뿐이다.

그러한 일이 과연 있었던가, 혹은 있을 수 있을까, 단지 그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은 복음서가 기록한 대로 있었다고 믿는다.

악귀에 잡혔다는 것은 지금은 없다는 것은 맞지 않다.

이것을 단지 정신병의 일종으로 본대도,

그러한 정신병이 그때에 한 하여 있었다고 믿는 것은 조금도 미신이 아니다.

많은 병이 지리적이고, 또 시대적이다.

아프리카 내지에 유행하는 수면병 같은 것, 열대지방 이외에 이것을 볼 수 없듯,

천년 전에 유행한 병으로서 지금은 없어진 것이 있다.

 

특히 정신병은 주로 문명병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명병에 의해 다른 정신병이 있다.

오늘의 일본에 유행하는 연애병 같은 것, 이것은 확실히 시대적 질병이다.

이것은 일본인의 정성에 일본 근대의 특수한 문명을 실시한 결과로서 생겨난 것으로서

아마도 타국, 또 다른 시대에 있어서 볼 수 없는 병이라고 생각한다.

 

그 같이 ECHEIN DAIMONION(귀신들린)이란, 그 당시 유대지방에 돌발한 정신병의 일종으로 보아, 의학상 아무 이상한 것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다라의 광인(狂人)은 보통의 광인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정신병 환자라 하여 정신 또는 신경의 이상자는 아니었다.

그는 귀신에 잡힌(들린)자 였다. 어떤 다른 영이 그의 속에 들어와서, 그의 몸을 점령하고

그로 하여금 자기(그 영) 원하는 대로를 행케 하려한 경우였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가 달리도 많이 있었던 일은 성서가 명시하는 바이다.

 

이른바 귀신 들린 자를 모두 정신병자로 해석하여 성서의 이 일에 관한 기사를 해석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귀신에 잡힌 자는 문자대로 귀신에 잡힌 자이다.

귀신이란 약한 영인 것으로 그것이 사람의 영에 깃들여, 이를 제 마음대로 사역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정신병 그것이 근대 의학의 미해의 대문제이다.

 

정신은 신경의 작용으로서 신경만 건전하면 정신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의학상의 도그머(dogma)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정신병학자는 신경의 작용 이외에, 어떤 다른 세력의 활동을 인정한다.

 

그것이 과연 성서가 기록하는 다이모니온인지, 그것은 별도로 하고,

신경만을 가지고 정신을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성서는 명시하여 말한다.

 

사람의 속에는 영(심령)이 있다. 전능자의 기식이 사람에게 총명(깨달음)을 준다(욥기 32:8).

 

이것은 물론 선한 영에 대하여 한 말이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는, 악마의 간계를 막기 위해 하나님의 무구로서 부장하라.

우리는 혈육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정사와, 또는 권위, 또는 세상의 암흑을 주장하는 자,

또 하늘에 있는 악한 영과 싸우는 것이다’(에베소서 6:11-12)라고.

 

이것은 악령과 그 권속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리고 성서의 이 견해는 오랜 견해로서 이제는 심리학의 연구에 의해 학자의 부정하는 바로 되었다 해도 사실은 쉽게 그러한 부정을, 허용치 않는 것이다.

 

악마(마귀 Satan)라는 자는 있다. 악귀라는 자는 있다. 악한 영이라는 자는 있다.

 

그리고 사람을 속이고, 국민을 속이고, 학자를 속이고, 대전쟁을 일으키고, 문명을 부수어 세계의 파멸을 재촉하지 않았는가?

 

트라이치케, 헨덴부르크, 끌레망소, 대통령 윌슨(952역주), 사이온지 공작,

그들은 모두 어떤 자에게 미혹되어 세계 전쟁의 대비극을 연출하는 매개자로 된 것 아닌가?

 

세상에 악마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의 암흑을 주장하는 자,

또 하늘에 있는 악의 영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일(역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인류의 최대 세력을 가지고서도 절멸할 수 없는 이 암흑의 세력,

인류가 오늘 가진 지식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다 해도,

그것이 확실히 악의 최대 세력인 것은 의심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 암흑의 세력이

빛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나신 때에,

특별한 세력으로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나타난 하나가

귀신 들린일이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다라의 사건은 그 하나였다.

그것이 복음서의 여기 기록된 대로 일어난 것이다.

 

이른바 돼지 사건에 대하여 말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유명한 글래드스턴(926역주), <19세기 잡지> 지상에 있어서,

박사 헉슬리(2125역주)와 수회에 걸쳐 논쟁한 문제이다.

 

오늘 사람은 그런 문제는 이것을 일소에 붙일 뿐이다.

하지만도 40년 전의 당시에 있어서는 진지한 문제였다.

대학자가 전세력을 경주하여 성서의 이 기사를 변호한 시대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당시를 회상하여 금석의 감금할 길 없다.

 

그리고 돼지 사건 보다도 중요한 것은 돼지 같은 사람의 마음이다.

가다라 사람들은 예수의 이 사적을 보고 그에게

 

그 지경을 떠나가도록 구하였’(마가복음 5:17)다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돼지는 사람보다도 소중했다.

사람이 고침받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고서, 돼지 잃은 것을 보고 슬퍼했다.

그리고 재산을 손상받은 이유로써 예수가 그들의 토지를 떠나기를 구했다.

 

가련하다! 가다라 사람이여.

그러나 그런 사람은 세계 어느 곳에도 있다. 옳다, 일본에도 있다.

 

예수에 의해 자기의 아들이 구원받은 것을 감사치 않고, 자기의 재산이 다소 손해 입음을 슬퍼하여, 자기 집을 떠날 것을 구한 일본인을 나는 몇 사람이나 알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보다도 돼지, 그것이 이 세상의 사람들의 마음이다.

 

가다라 사람들에게 거절된 예수는 배를 타고 또 가버나움 편으로 돌아가셨다.

그때의 그의 마음은 어떠했으랴!

 

아버지여, 그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23:34)라는 것은

그가 이때에도 또한 발하신 기도이리라.

 

또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우리들도 또한 종종 악귀에게 잡히는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해도, 악한 사상 또는 암시가, 우리의 마음에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쫓아도 가버리지 않고, 누르려 해도 할 수 없고, 우리들은 심히 그 괴롭히는 바로 된다.

 

또 뜻하지 않은 악인이 우리들 사이에 나타나 가정을 어지럽히고, 교회를 헐며, 형제 서로 싸우고, 친구 서로 배반하기에 이른다.

 

우리들 그 설명을 얻고자 하여 얻을 수 없고, 죄를 서로에게 돌려 스스로 책임을 면하려 해도 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무엇에 의해 그런가?

우리들 속 어떤 자가 악귀에 잡힌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당한 견해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 악귀에 주의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이는 우리가 사탄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의 궤계(책략)를 모르는데서가 아니다(고린도후서 2:11)라고 바울이 말한 대로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동시에 악귀(귀신)를 알 필요가 있다. 적을 모르는 것은 패배의 기초이다.

우리들은 사탄과 그 체계를 알지 못하여 언제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사탄은 없다 하고, 사람에게 악의를 돌리는 것은 죄라 하여, 우리는 때로는 명백한 죄를 시인한다.

또 사탄의 죄를 그에게 잡힌 사람에게 돌려, 그 사람을 오해한다.

이는 모두 사탄과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과오이다.

 

그러한 경우에 예수는 단도직입, 그 원인을 보여 말씀하신다.

 

원수가 이것을 했다’(마태복음 13:28).

 

여기서 원수라고 있음은 악귀의 괴수인 사탄이다.

 

그러한 경우에 처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여 적에게 이길 수 있을까?

적은 사람보다도 훨씬 강한바 있다.

 

끌레망소, 윌슨, 오오꾸마시게노부(261역주) 까지도 속일 수 있었던 사탄은

쉽게 우리들을 속일 수 (미혹할 수)가 있다.

 

가다라의 악귀에게 예수 그 이름을 물으니

 

우리가 많기 때문에 나의 이름을 레기온이라 합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레기온(9113역주)은 로마군대에 있어서 6천인으로 된 1군단이다.

마군(魔軍)은 그 수에 있어서, 또 그 강한데 있어서, 레기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누가 이 대군에 이길 수 있으랴!

여기서 루터의 신앙이 필요해 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 힘에 의뢰하면 우리는 곧 패하리라.

하지만 1인의 거룩하신 자 우리 위해 싸우심 있다.

그 누구인가고 묻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사바오스의 하나님으로서 그 외에 신 없다.

그가 우리들과 함께 싸우신다

 

사탄은 강한 바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사탄보다 강하시다.

그가 인류의 구주이신 증거는 주로서 여기에 있다.

 

아무나 용사의 집에 들어가 그 가재를 빼앗으려 하면, 먼저 용사를 결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결박 후, 그 집을 빼앗을 것이다’ (마가복음 3:27)라고 있다.

 

여기서 용사는 사탄이고, 이것을 결박하는 자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에게 사탄을 결박해 주심 받아 우리들은 참된 평안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편에 있어서는 악귀를 쫓아내는 길로서는 다만 기도 있을 뿐이다.

 

이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서는 쫓아 낼 수 없는 것이다’(9:29)라고 있는 대로이다.

 

그리고 이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 가는,

인세가 얼마나 곤란한지를 아는 자가 누구나 절실하게 느끼는 바이다.

 

대저, 이른바 인세의 행로난의 대부분은 사탄과 그 궤계에 의하는 때문이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