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거듭난 삶 2024. 4. 17.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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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로의 딸

 

마가복음 521-43: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참조 : (마태복음 918-31, 누가복음 840-56)

 

예수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는 성서의 이 기사는

많은 어버이들을 위로함과 동시에 또 많은 어버이들을 괴롭힌 기사이다.

 

병든 아이를 가진 많은 부모들은 이에 의해 힘을 얻고, 야이로와 한가지로 예수의 발아래 부복하여 전심으로 그 치유를 기구하여 그 기원의 응답을 받아 기뻐했다.

 

그것과 동시에 또 이 기적에 격려되어 병든 자기 자식이 치유되기를 구하고, 힘 다해, 뜻을 기우려 기도한 보람 없이, 그 아들의 죽음에 직면하여 큰 실망에 빠지고, 하나님을 의심하며, 기도를 업신여기고, 마침내 신앙을 버리기에 이른 어버이들도 적지 않다.

 

이는 은혜의 기사이며, 동시에 또 저주의 기사이다.

야이로의 딸의 경우를 잘 연구하지 않고서는 우리들은 신앙상 대()위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로서,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었다(10:38),

 

그 선행의 하나로 보면 그 뿐인 것으로, 우리들은 그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이 기사 안에 찾을 것 없다고 할 수가 있다.

 

예수에게 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한 사람의 딸을 잃으려는 어버이가 고경(苦境)에 있음을 보고, 동정해 마지 않는데서 치유의 능력을 나타내어 그들을 구하셨다고 해석하면, 이 일에 관하여 그것 이상으로 그의 성의를 촌탁할 필요는 없다.

 

예수의 동정 발로의 일례로 보아, 야이로의 딸의 경우는 그의 아름다운 성격의 일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 감사,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아들(자녀)을 가진 어버이의 마음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야이로의 딸을 고칠 수 있었다면, 어찌하여 내 자식을 고칠 수 없는가?

 

그는 지금도 살아계시는 이로서

 

만약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내 이름으로 원하면 내가 이것을 행할 것이다’(요한복음 14;14)라고. 그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 아닌가?

 

사람의 간절한 기구(祈求)로서 그 아들의 목숨의 구조를 바라는 것 보다 더한 기구는 없다.

 

이 기구가 응답되지 않을 것인가?

다른 기구는 응답되지 않아도 가한 것이다.

이것은 실로 전심전력의 기구이다.

 

기도의 테스트는 여기에 있다.

 

주는 과연 신자의 기도를 응답하시는가?

기도는 과연 유효한가?

신앙상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 경우이다.

 

예수는 야이로의 청으로 그와 함께 갔다. 그러나 도중(道中),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을 만나, 그녀를 고쳐 주시기 위해 상당히 시간을 쓰셨다.

 

일각을 다투는 이 경우에 이 유예(猶豫)는 야이로에게 있어서는 절망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회당장의 집에서 사자(使者)는 와서 말했다.

 

당신의 따님이 이미 죽었습니다. 뭐 선생님을 괴롭히실 것 있습니까?.

 

다른 여인을 고쳐 주기 위해 내 딸은 때늦어져 죽은 것이다. 아깝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나 한 사람 위한 선생은 아니다.

 

나는 단념할 수밖에 길이 없다고, 야이로는 마음속으로 말했으리라.

그런데 예수는 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라, 다만 믿으라.

 

신앙을 지속하라는 말씀이다.

생명의 주께서, 그와 함께 있으매, 죽음은 조금도 겁낼 것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주의 이 말씀에 격려되어, 야이로는 다만 겁내면서 그의 뒤를 따라갔으리라.

 

예수는 베드로와 야고보 및 그 형제 요한 외에는 누구도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있다.

 

어찌해서 일까?

다른 제자들은 바야흐로 행해지려는 기적을 목격하기에 부족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기적은 누가 보더라도 유익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보아 유익되는 사람이 있다.

또 실족하는 사람이 있다.

 

가롯의 유다 같은 사람,

그로 하여금 만약 이 곳에 있게 했더라면 그의 반역을 일층 빠르게 했으리라.

 

기적은 다만 기이한 일은 아니다.

예수는 여기서 다만 야이로의 딸을 도우려하신 것만은 아니다.

 

그의 딸로서 커다란 오의(奧義)를 세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후세, 모두 그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후에 변모(變貌)의 산에서 그가 이상의 3인에 한하여, 그가 장차 취하시려는 영광의 얼굴(모습)을 경배할 수 있게 한 것도 이 이유에 의한 것이다.

 

3인은 이때, 다만 기인한 일을 보고, 사람들과 한가지로 매우 놀랐으리라.

하지만 후에 이르러 이 기적의 의미가 이해되어 이것은 단지 하나의 자선사업이 아닌 것을 깨달았으리라.

 

그리고 그 의미란 이것이다.

즉 예수는 생명의 주로서, 그는 그 성지(聖旨)대로 이것을 누구에게도 주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나는 부활이다. 생명이다’(요한복음 11:25)라고. 하신 이 그것이다.

 

무릇 아들을 보고 이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내가 또 이것을 끝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6:40)라고 하신 그분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이기 위한 이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 오의(奧義)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경우에 있어서 명시된 것이다.

 

즉 첫째로 제자를 가르치기 위한 기적이고,

딸을 구하는 것은 둘째의 목적이었다.

 

모두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희망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 이 기적의 주안이었다.

 

야이로를 목적으로 하는 기적으로 생각하는 까닭에, 우리들은 이에 의해 혹은 자기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생각하여 만족(자만)해 하며, 응답받지 못했다 생각하여 실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이 한 번은 야이로의 입장에 섰던 자이다.

그리고 성서의 이 기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야이로의 실험이 반드시 나의 경우에도 되풀이 거듭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나의 딸의 불치의 병이 반드시 낫는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의사가 단념해도 나는 단념하지 않았다.

위독해져도 위독은 도리어 영광을 드러내는 때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나의 귀에 들리는 것은 다만 예수의 말씀이었다.

 

두려워 말라. 다만 믿기만 하라.

 

하지만 나의 신앙은 마침내 무효로 돌아갔다. 나의 딸은 의사의 진찰대로 죽었다.

야이로의 실험은 나의 실험으로 되지 않았다. 나는 매우 실망했다.

 

내게는 그 때에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없는 고통이 있었다.

그것은 회의의 고통이었다. 나의 신앙은 그 근저에서 흔들렸다. 나는 암흑의 심연에로 던져졌다. 그리고 교회의 비평가는 일층 나의 이 고통을 더했다.

그들의 어떤 이는 말했다.

 

그에게 아직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 죄가있기 까닭에 이 고통이 임한 것이다라고.

 

어떤 다른 이는 말했다.

 

그의 신앙에 커다란 흠점이 있기 때문에 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기타 여러 가지 잡다한 비평이 가해져 나는 충혈되어 피 뿜는 상처위에 머리를 지지는 열 인두(curling irons)를 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실로 일생 잊을 수 없는, 쓰라린 경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후에 홀로 고요히 생각했다.

나보다 훨씬 신앙이 높은 사람으로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진 많은 사람의 실험을 읽고, 또 들었다.

 

특히 또 다시 깊이 성서를 연구했다.

그리고 야이로의 딸의 이 경우는 결코 누구에게나 거듭 되풀이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신자의 부활의 교의를 보여 주기 위한 커다란 기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가복음 7장에 있는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이 다른 예이다.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죽은 나사로의 부활의 경우는 그 가장 현저한 것이다.

 

모두 예수에게 기도하는 자에게 죽음의 쓴 경험은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끝 날에 내가 이것을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교훈이 실물 교훈인 것을 알았다.

 

즉 내 딸의 경우에 있어서도, 나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 아니다.

응답되고 있는 것이다.

 

끝 날(마지막 날)에 있어서, 예수께서 모두 그를 믿는 자를 다시 살리시는 때에,

 

그는 내 딸에게 향해서도 달리다 굼, 딸아 일어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딸은 이 음성에 따라서 다시 살아나, 그녀는 다시 우리들 부부의 손에 넘겨 주신바 되신 것이다.

 

그 때까지는 비평가가 무엇이라 하든,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믿어야 할 것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세인은 물론 일, 교회의 사람까지가 조소하리라.

 

그러나 나는 예수를 믿는다.

 

내게 온 사람은 끝 날에 이것을 다시 살릴 것이다라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믿는다.

그리고 이렇게 믿어 날로 날로 그 기쁨의 날이 이르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해석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기적은 모두 기적 이상의 높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빵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서 5천인을 먹이신 기적은, 육의 식물로서 사람을 먹이기 위한 기적이 아니라,

 

나는 생명의 빵(양식)이다라는, 그 자신에 관한 커다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요한복음 6장 참조).

 

야이로의 딸의 부활에 있어서, 모든 신자는 그 기도에 의해 그 사랑하는 자의 병을 치유 받고 사자를 부활케 하실 것이라 믿는 것은, 모든 신자는 기적적으로 그 육체를 키울 것으로 믿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죽음은 끝 날까지 제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육체에 있어서 다시 살리신바 되어도, 다시 죽음을 맛보지 않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야이로의 딸로 베다니의 나사로도, 예수께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바 되어 영구히 죽음을 면제받은 것은 아니다.

 

썩어야 할 육체의 부활은 가장 소망스러운 부활은 아니다.

가장 소망스러운 부활은, 다시 죽는 일 없는 부활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기에게 이 능력 있음을 보이시기 위해, 이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 기적은 끝 날의 부활을 가르치기 위한 조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참으로 있었던 일이다. 그것은 기사 그것이 증명한다.

 

예수는 이때에 아람어(8239역주)를 사용하여 달리다굼(9201역주)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 등,

 

특히 최후의 일 절에 또 딸(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명하셨다고 있는 것 등,

 

이것은 목격자에 의해 전해진 사실 그대로 보는 길 외에는 방도가 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시에 또 인자였다.

그에게 인간미가 담뿍하셨다. 그는 허다한 종교가가 하듯 주술을 소녀에게 베풀지 않았다.

그녀가 해득할 수 있는 말로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셨다.

하나님다운, 사람다운 그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들 약한 자를 구원하시어 이것을 자신에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또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예수는 지금도 야이로에게 베푸신 치료와 동양(同樣)의 치료를 실시하신다.

우리들은 그 능력을 끝 날에 국한(localization)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끝 날은 대()이고 지금은 소()이다. 우리에게 야이로 이상의 신앙이 없어서는 안 된다.

즉 내 딸은 치유 되거나 치유 못되거나, 최후의 치유, 즉 구원을 믿고, 감사하여 그날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 사랑하는 자의 죽음에 직면하여, 이 신앙을 가지기는 아주 어려운 바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보신다.

 

주여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24)하는 기도에 응답하신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