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거듭난 삶 2024. 4. 18.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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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맹인과 벙어리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심

 

마태복음 927-34: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참조 : (마가복음 822-26, 마가복음 1046절 이하, 914절 이하)

 

나사렛의 예수는 어떠한 사람이었던가?

 

그가 위대 고결하신 인격자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의로운, 거룩하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있어서 도덕적 결점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그는 덕의 사람이심과 동시에 또 능력의 사람이었다.

그의 몸 안에 우리가 추량할 수 없는 능력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손을 대시면, 병자는 치유되고, 사자(死者)는 다시 살아나고, 바람과 파도까지도 그 명에 복종했다.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고 우리들은 의심한다.

있을 수 있다고 하나님은 예수로써 대답하셨다.

 

예수는 그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다.

 

여우는 굴이 있다. 공중의 새는 깃이 있다. 하지만 인자는 베개할 곳 없다.’.

 

그것은 인자,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 있음을 알게 하시렴에서 라고.

 

인자란 단지 사람이라는 말이다.

모범적인 사람이다. 완전한 사람이다. 죄로 더럽혀지지 않는 사람이다.

둘째의 아담이다.

 

사람은 모두 본래 예수와 같은 자였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닮아, 자기 속에 만물을 지배하는 능력을 가진 자이다.

 

그런데 죄의 결과로서, 즉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떠난 결과로서, 또는 우리가 보는 것 같이, 약한 도움 없는 자로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 이런 약한 자로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아담이 만약 아담이었다면, 즉 사탄의 소리에 청종치 않고서 하나님의 명에 따랐다면,

그와 그의 자손은 예수와 같은 자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죄의 세상에 있어서, 인자 중의 유일한 예외이시지만,

하나님의 창시의 계획은 모든 사람이 예수 같은 자여야 할 것이었다.

 

즉 죄를 모르는 자 일뿐 아니라, 능력으로 차고 넘치는 자였다.

천연의 아들로서 지상에 나타나도, 천연의 위에 서서, 천연을 지배하는 권능을 갖춘 자였다.

 

실로 예수는 인자로서, 사람의 모범이시다.

사람이 얼마나 존귀 한가는 예수를 알고서 알 수가 있다.

즉 사람은 병이나 죽음의 노예가 아니라, 이에 이겨 낼 수 있는 자이다.

 

시인 테니슨(1441역주)의 이른바 ‘The Strong Son of God, Thou Immortal Love’.

 

(당신), 불사의 사랑의 소유자이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라고 있는 그 분,

 

예수가 그것이심 같이, 사람은 원래 그렇게 될 자이다. 그리고

 

그를 받아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능력을 주어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다고 있는 대로,

 

사람은 예수를 믿어 그분 같은 자로 된다는 것은, 성서가 명시하는 바이다.

우리들은 예수의 행하신 기적의 기사를 읽음에 있어서, 이 마음으로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주는 능력 있는 분, 그리고 우리가 그를 믿어, 그와 한가지로 능력 있는 자로 되는 것이다.

 

인류는 지식을 연마하고, 과학의 힘에 의해 천연을 지배할 수가 있다.

그 의미에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언제나 듣는 바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은 다만 그 지식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신에 있어서이다.

 

방법에 의하지 않고 기계를 쓰지 않고서, 예수처럼 자신에 능력을 갖추고,

자유로 이것을 사용할 수 있기에 이르러,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답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말하여, 나는 꿈을 말하는 것처럼 생각되리라. 그렇지만 꿈은 아니다.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또 얼마나 강하게 될 수 있는지는 아직 연구되지 못한 문제이다.

 

그러나 신앙의 결과가, 단지 도덕의 개선에 그치지 않고서, 능력의 증가를 가져오는 것은, 몇 번이고 실험된 사실이다.

그리고 얼마라도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최근의 심리학이 아닌가?

 

마인드(mind)의 능력, 이것은 실로 특이한 것이다.

이화학자는 이미 물질의 위대한 힘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으나, 심리학자는 이제야 정신의 능력에 눈뜬 것이다.

 

사람의 지금 이미 가진 정신의 능력에 놀라운 것이 있다.

죄를 제거 받은 사람의 정신에 기적적 능력이 들어 있음은 알기에 어렵지가 않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리고 영은 거룩할 뿐 아니다. 또 능력이시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크리스천으로 되어, 단지 거룩한 자로 된 것은 아니다. 능력 있는 자로 된 것이다.

옳다.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옳다, 되어야 할 것이다.

 

능력을 주어 하나님의 아들로 되게 하셨다고 있다.

 

성령, 너희에게 임하심에 의해 너희는 능력을 받을 것이다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 능력에 있다고 있다.

 

능력!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가지고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려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 이기는 능력, 환난에 견디는 능력, 모든 선한 일을 하는 능력,

우리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이것을 받을 수가 있다.

 

예수의 기적의 기사를 읽고서 단지 이것을 영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인자의 능력의 표현으로서, 우리도 또 이에 참여하려는 기구로서, 그 연구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후에, 예수는 두 사람의 맹인을 고치셨다.

 

예수,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니 그 눈이 밝아졌다고 있다.

 

눈은 외계의 인상을 받기 위한 기관이다.

 

몸의 빛은 눈이다.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온 몸도 또한 밝을 것이다라고 있어서,

 

사람이 보는 외계 여하는 그 눈 여하에 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눈을 뜨게 하여 주심 받는 일, 또 밝게 볼 수 있는 눈을 받는 일, 이것보다 나은 필요, 또는 행복은 없다.

 

그리고 예수는 맹자(맹인)의 눈을 밝혀 주신 그 능력으로서 허다한 청맹과니(amaurotic person)의 눈을 밝게 하신다.

 

만물을 보는 눈은, 단지 그 형과 색을 보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를 보는 눈이 없어서는 안 된다.

 

성서의 문자를 읽는 눈은 얼마든지 있으나, 이것을 이해적으로 읽는 눈은 극히 드물다.

 

이것을 생각하여 우리들 누구나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이 기원을 응답받아 그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실로 이상하다.

선배의 설명을 들은 것 아니고, () 주해서(註解))를 읽은 것 아니라, 다만 열심히 기도하여, 오늘까지 불가해의 문자의 깊은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서 나타나고, 감사의 눈물로 흐느끼게 되는 것이다.

 

천연 역시 그러하다. 꽃은 단지 꽃이 아니다. 시이다. 또 복음이다. 참으로 꽃을 보는 눈을 가진 자는 극히 드물다.

 

성서 있고 천연 있어도, 대개의 사람은 이에 대하여 맹인이다.

다윗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에게 눈을 밝혀 주시기를 원할 필요가 있다.

 

브라우닝(12249역주)이라 하고, 워즈워드(1440역주)라 하여, 특별한 사람은 아니다.

 

누구나 사람이 눈을 뜨게 되면, 시인 아닌 시인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을 타인의 일로 생각하지 말라. 예수를 믿고 구해보라.

개안(開眼)의 기적은 우리들 누구에게도 베풀어지리라.

 

맹자(盲者)를 고치신 후에 예수는 귀신들린 벙어리를 고쳐주셨다.

벙어리는 외치려 해도 할 수 없고, 사람에 이끌려 왔다.

 

귀신, 쫓겨나서 벙어리, 말을 했다고 있다.

 

눈은 외계의 인상을 받는 기관, 인후(목구멍)와 혀는 속의 사상을 겉으로 나타내는 기관이다.

눈에 의해 밖의 것은 안으로 들어가고, 혀에 의해 속의 것은 밖으로 나간다.

 

오늘의 말로서 한다면, 눈은 impression의 기관, 혀는 expression의 기관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눈을 감고 고침 받음과 함께 혀를 고침 받음의 필요가 있다.

 

단지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또 토해 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받는데 날카롭고 나타내는데 둔하다.

그들은 침묵의 미덕과 이익을 알고, 때로는 침묵이 죄악이며 손실인 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 축복(은혜) 받고서도 그 은혜를 나타내는 마음도 말도 없이, 침묵의 귀신(악귀)에게 그 혀를 결박당하여, 하나님을 찬미 않고, 그 은혜를 남에게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일에 있어서는 훌륭한 크리스천이면서, 사람 앞에 말하는 것만은 절대로 않고,

목사 전도사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여, 자기는 이른바 황금의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말한다. 신앙은 마음속의 일로서 밖에 나타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침묵은 참된 신앙의 특징이라고.

 

그렇다면 복음의 전파자는 무어랄까?

그들은 기분으로 지껄이는 것인가?

인망을 얻기 위한 연설, 설교인가?

지껄이도록 고용된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지껄이는 것인가?

그런 사람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진정한 전도사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그는 구원 받은 까닭에 그 구원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는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침묵 또는 눌변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 둔한 혀를 날카롭게 해주심 받아, 대전도사 또는 대설교사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그 한사람이었다.

그는 전도를 사양하여 말했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거운 자입니다’(출애굽기 4:10)라고.

 

예언자 예레미야도 또 예언을 사양하여 말했다.

 

아아 주 여호와여, 나는 말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예레미야서 1:6).

 

기타, 근대에 있어서 비-, 브룩스 등, 모두 생래의 눌변가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그 눌변을 고침 받아, 대교사, 대설교사로 된 것이다.

 

신자 중에 말 못하는 귀신(악귀)들린 벙어리 어찌 많은지!

 

그들은 환희에 넘쳐 큰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미할 수 없고, 또 사람 앞에 서서 자기가 받은 은혜의 갖가지를 말할 수 없고, 다만 침묵, 표현치 않는 것으로서 자기의 직분이라 믿고, 청해도 권함 받아도, 속의 은혜를 밖으로 나타내려고 않는다.

 

그리고 일 여기에 이르러 침묵은 미덕이 아니라 불구이다.

언어는 인간의 명예이다. 수류에 언어 없다.

인류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상호격려하며 위로하기 위해 언어의 재능을 부여 받았다.

이것을 적의(適意)로 써야할 것이다.

 

우리들은 눈과 귀를 통하여 밖에서 받을 뿐이고,

입을 통하여 안에서 줄 수 없는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항상 여호와를 송축하리라. 그 송가는 내 입에 끊이지 않으리라’(시편 34:1)

시인은 말했다.

 

또 말했다.

 

여호와는 새 노래를 내입에 두셨도다. 이는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미이다’(40:3).

 

내 입을 열 때 말씀을 주시어 담대히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있게 하옵소서’(에베소서 6:19)라는 것은 바울의 기도였다.

 

원하옵기는 우리들 보는 눈을 주심과 동시에 말하는 혀를 주옵시기를.

 

예수 두루 도시와 마을을 다니시며, 그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 모든 질환을 고쳐주셨다’(9:35)고 있다.

 

그리고 그 능력 있는 이가 지금도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치심이다.

우리들은 안으로 살펴 자기의 악함을 탄식할 것 못된다.

곧 그에게로 가서, 눈을 뜨고 혀를 풀게 되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가르쳐 주시는 주는 병을 고쳐주신 예수시다.

우리들은 의자로서의 예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다만 우리들의 교사는 아니다. 구주로서 능력의 공급자이시다.

 

그는 우리들의 지극히 가까운 원조자이시다.

우리들은 예수의 기적을 부인하여 그를 약한 구주로서 해서는 안 된다.

하늘 안, 땅위이 모든 권세를 잡으신 이로서 그에게 의지하여 거룩한 가르치심에 더하여 강한 힘(능력)을 그에게서 받도록 할 것이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