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를 공부하기 전에

거듭난 삶 2024. 5. 3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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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대의(大意)

( 로마서를 공부하기 전에 )

 

로마서는 해득하기에 아주 어려운 글 ()이라고 일반에게 신봉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실로 해득(이해)하기에 아주 어려운 글입니다.

 

시인 콜리지(2379역주)는 말했습니다.

로마서는 일찍이 기록(기술)된 글 중에서 최대의 글이라고.

 

실로 로마서를 해득하는 사람은 세계 최대의 글을 해득한 것입니다.

 

밀튼(1120역주)의 실락원, 단떼(961역주)의 신곡,

모두 로마서 만큼 위대한 글은 아닙니다.

 

로마서를 해득한 자는 그리스도교를 해득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순수는 로마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자신의 글로서 읽기에 이르러, 우리들은 복음의 오의(奧義)에 달한 것입니다.

로마서는 그렇듯 위대한, 그렇듯 어려운 글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보통의 신자에게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글인가 하면, 나는 결코 그렇게는 믿지 않습니다.

 

로마서의 해득하기 어려움은 그 문자에 있는 것 아닙니다. 그 철학에 있는 것 아닙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신자에게 써 보낸 서간(書簡)입니다. 그리고 서간은 그 수취인이 해득하기 어려울리 없습니다.

 

그리고 또 바울 자신이 문학자도 아니려니와 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전도사였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로서 그는 보통 사람에게 접촉하고, 그들이 잘 해득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 자신이 이 글() 중에 말했습니다.

 

아직 듣지 못한 것을 어찌 믿을 수 있으랴! 아직 전하는 자 없는데 어찌 들을 수 있으랴’(10:14, 일본어역). 전하는 것이 전도사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해되지 못하고서 전해질 리는 없습니다.

로마서의 목적이 로마에 있는 신자의 신앙을 견고케 하렴에서 였습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하고자 하여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해득하기 쉽게 이 글을 썼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로마서는 어느 방면에서 보아도 해득하기 어려운 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가 해득하기 어려운 이유는, 문자 이외, 신학 이외, 무언가 달리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것을 알기에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로마서를 해득함의 곤난은 바울의 신앙을 해득하기 곤난한 데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을 이해하고, 자기를 그 입장에 두고서 볼 때, 로마서는 알기에 지극히 용이한 글()로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이 어떠한지는 가장 조직적으로 로마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에 한하지 않습니다. 그의 손으로 된 것으로 신약성서에 전해지는 그의 서간 13통 가운데 밝히 보여 있습니다.

 

이른 바 바울주의란 것은 일종 특별한 신앙입니다. 이것을 알고, 이것을 파악하고, 이것을 열쇠로 하여 로마서에 임할 때, 저 난해(難解)라 일컬어지는 오의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는 16장이나 되는 비교적 장편입니다.

이것을 대강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서언 - 1장 제1절에서 17절까지

본론 - 118절에서 제1513절까지

용건 - 및 인사 제1514절에서 제16장 끝까지

 

서언은 이 글()의 성질과 목적을 보여주며, 말은 간단하지만, 바울의 신앙은 그 가운데 넘쳐 있습니다. 처음의 7절 같은 것, 읽기에 따라서는 결코 해득하기 어려운 말은 아닙니다.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종, 성소에 의해 사도된 자, 하나님의 복음위해 선택되었다.

이 복음은, 그가 성서에서 그 예언자들로서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서,

그 아들에 관한 것이다. (아들)는 육체에 의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고,

성선의 영으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서, 권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표명되셨다.

 

곧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그를 통해 은총과 사도의 직을 받았다. 이는 만국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이름 위해 신앙의 복종에 들어서게 하렴에서이다.

너희도 역시 그 가운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부르심을 입은 자이다.

로마에서 모두 하나님께 사랑 받고, 부르심을 입어 성도된 자에게 이 서간을 보낸다. 너희에게 역시 그 가운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부르심을 입은 자이다.

로마에서 모두 하나님께 사랑 받고, 부르심을 입어 성도된 자에게 이 서간을 보낸다.

너희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및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평강 있을지어다‘(1:1-7,일본어역)

 

*(1:1-7)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한글 개역개정)

 

이 발단(시초)의 말을 해득하기 어려운 이유는, 일본어의 조직이 유럽어의 조직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관계 대명사라는 것을 결여하는 바의 일본어로서는, 간결한 원문을 우회 설명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미는 이것을 해득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서 서간을 기술함에 있어서, 당시의 서간문 따라, 그 발단에 있어서

 

나 바울 로마서에 있는 형제에게 글을 보낸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과 애심으로서 차고 넘치는 바울은 그것 만으로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나 바울,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자선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어 사도로 된 자이다. 특히 미리 복음 전파 위해 뽑힌 자이다라고.

 

그리고 그렇듯 자기를 소개함에 있어서, 일언(一言), 복음에 미치자, 그는 그 복음에 대하여 일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은 이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옛 성서(구약)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미리 그 예언자들로서 약속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는(이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한 복음이다라고.

 

그리고 이렇듯 복음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일언(一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미치자, 그는 또 그 성자에 대하여 일언치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아들은 육체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고, 성선한 일의 본원인 성령에 의해서는,

죽음에서 부활함으로서, 권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밝히 세상에 보이셨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복음을 소개하고, 복음의 주인공인 성자를 소개하여, 바울은 전으로 돌아가 성자와 자기와의 관계를 진술하여 말한 것입니다.

 

내가 아들이라고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함이다.

그리고 복음은 그에게 관한 복음이다. 우리들은 그 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혜와 사도의 직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복음의 주인공으로서 내 주인이시다라고.

 

그리고 그렇듯 그리스도와 자기와의 관계를 진술함에 있어서, 일언이, 사도의 직에 미치자,

그는 또 그 직에 대하여 일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의 직(직분)이란 다른 것 아니다. 만국민으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 위해 신앙의 복종에 이르게(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일언이, 만국민 즉 이방인에게 미치자, 바울은 로마에 있는 신자의 그 일부분,

더구나 중요한 일부분인 것에 대하여 일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만국인(이방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너희는 그 중에 포함되는 자이다.

지금은 부르심을 입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된 자이다라고.

 

그리하여 여기서 자기와 복음과 그리스도와 사도직의 소개를 마치고, 서간의 수신인인 로마에 있는 신자에게 미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혈다정한 바울은, 다만 로마에 있는 신자에게 글을 보낸다고 하는 것으로 어딘가 부족하게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에 대해 말한 것같이 그들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로마에서, 모두 하나님께 사랑 받아, 부르심을 입어 성도된 자라고.

 

말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나 존경과 축복으로 차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종, 은총으로 말미암아 사도직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신자를 부름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부르심을 입어 성도로 된 자라고 했습니다.

 

종 바울, 로마의 성도에게 글을 보낸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종 된 것은 스스로 원하여(좋아해서) 종 된 것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어서입니다. 성도된 것도 자기의 수양의 결과 성도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랑받아 그 부르심을 입은 것이라고.

 

바울이 고린도전서 기타의 서간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말미암아, 부르심을 입어 사도로 된 바울이라고 한 하나님의 뜻으로라는 그의 확신은, 자기에 관해서도 타인에 관해서도 부동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로마서 전체를 통하여 부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만약 세상에 바울 신학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이 신앙 위에 구축된 것입니다.

자기가 구원되는 것도, 타인이 구원되는 것도, 국민이 구원되는 것도, 인류가 구원되는 것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입니다.

 

로마서가 말하려는 바의, 신자가 의롭다 함을 입는 일, 거룩하게 되는 일, 영광에 들어가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마음에 두지 않고서 바울은 알지 못합니다.

 

Annihilation of self and exaltation of God.

 

자기를 무()로 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일 이것이 바울 주의입니다.

 

이 주의 위에 서서 볼 때, 로마서는 해득하기에 아주 쉬운 글로 됩니다.

 

서언의 끝에 은혜 있을 지어다. 평안 있을지어다라는 기원을 더 붙이었습니다.

 

은혜가 무엇인지는 로마서가 특히 말하려 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평강을 기도 하는데 있어서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구했습니다. 여기서 이미 바울의 그리스도 관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평강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또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으로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는 동등의 분이십니다.

 

나는 로마서의 대의를 말하려는데 있어서, 그 발단의 말씀에 대하여 주해 비슷한 것을 가했습니다. 이는 뭐 주해로서 약설에 대신하려고 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로마서의 정신과 문제가 이미 분명히 그중에 보여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주의라고 하면 아주 어려운 것 같습니다마는, 그러나 지극히 간단명료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문체는 어떤 때는 아주 지나칠 정도로 지리하게 느껴집니다마는, 그러나 이는 역시 질서 있고 규율 바른 것입니다.

 

바울, 하나님의 복음 위해 택함을 받은 자.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이 아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나는 그에게서 사도의 직을 받은 자다.

사도의 직은, 너희 이방인으로 하여금 신앙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앞의 일언을 받아 이것을 뒤에 설명하고, 혹은 뒤에 누술하려고 하는 것을 미리 앞에 암시 합니다. 마치 봄에 대하여 말하기에 앞서, 매화를 보여 백화를 예상케 하는 유입니다.

 

바울의 입론은 언제나 이 순서에 따릅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서, 그의 문서를 알기는 더욱 쉽게 됩니다.

 

서언 즉 처음의 인사는 117절로서 끝납니다.

바울은 기술하여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 복음에 (복음으로) 나타나, 신앙에서 신앙에 이르게 한다.

(성경에) 기록하여, 의인은 신앙에 의해 살 것이라고 한 대로이다라고.

 

이것이 서언의 끝입니다.

 

그리고 또 이 다음에 오는 의론의 제목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구약성서 하박국서 24절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잘(교묘하게) 서언에 종결을 짓고, 새로운 의론에 착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그것을 명시하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논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를 그저 보아 넘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이미 그의 논법을 찾아 알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여 독자를 사로잡아(달래고), 뒤에 이르러 그들을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노는 불의로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불경건 불의에 향하여 하늘로서 나타난다.

 

이것과 저것과는 아무 관계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크게 있는 것입니다.

 

4장의 끝에 이르러 바울은 자기의 진성을 나타내, 그는, 사람은 신앙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은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문제는 인류의 구제(구원)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여 구원되는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하여 아주 심각하게 논한 것이 이 글()입니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