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거듭난 삶 2024. 6. 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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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1:4-7]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성결의 영 - 이것은 헬라 원어 프뉴마 하기오쉬네스, “성령이란 말 프뉴마 하기온과 구별된다.

 

성결의 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학계(學界)의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수님의 영혼을 가리킨다는 학설,

 

이 학설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이 의미를 취한다면, 이 구절에 말한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의 영혼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은 롬 8:11과 맞지 않는다.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가리킨다는 학설,

 

이 학설도 합당치 않으니, 그 이유는, 다음에 말한 아래의 제 (5) 학설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그저 성령, , “프뉴마 하기온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학설,

 

그러나 프뉴마 하기오쉬네스란 말은 여기에 한 번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그 많은 다른 명칭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창조 또는 개조의 능력 있는 신성(神性)을 가진 성령에 대한 칭호라고 하는 학설(H. N . Ridderbos).

 

 

프뉴마 하기 오쉬네스, 예수님이 받으시고 그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이 견해가 정당하다(Greijdanus).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 밖에서 새로 들어오시는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 아니요

이미 그에게 내재(內在)하시는 성령님의 활동 결과였다.

 

 

죽은 가운데 부활하여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죽은 자들의 부활로서란 의미를 가진다.

이 말씀에 죽은 자들이라고 복수(複數)를 사용한 이유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여기 이 말이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부활도 포함시킨 것이라고 하나,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여기 복수가 쓰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신자들의 부활을 성립시키신 부활의 새 시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Nygren, H.N. Ridderbos).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 “하나님의 아들이란 성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은 삼중 의미(三重意味)의 성호니,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적 하나님의 아들.

화육(化肉) 관계의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나뉠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영원하신 아들이 아니고는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가 되실 수 없으며,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메시야는 화육(化肉)을 필요로 한다. 화육이 없이 어떻게 계시와 구속(救贖)의 메시야 사역을 행하실 수 있을까?

 

인정되셨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호리스텐토스인데, 그 의미에 대하여

 

바르트(Barth)는 말하기를 인정함, 역사적 행동이 이니고 원역사적(原歷史的)행동이라고 하였다. 이 견해는 계시(啓示)의 역사적 의미를 거의 무시한데 가까운 위기 신학(危機神學)의 사상이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역사 그것은 계시를 유효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에게 복속된 그 역사는 그리할 수 있다고 한다.

 

(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인정되셨으니란 뜻은,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부활 이후에야 인간의 인식에 완전히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인식에서 인정되신 사실을 말함이 아니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 앞에서 영광(人性)을 취하신 후 없었던 영광을 얻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 한다.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우리가 - 여기 사용된 인칭(人稱)이 복수(複數)로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학설들이 있다.

 

리츠만(Lietzmann)과 바이스(B. Weiss), 이것이 저작 권위(著作權威)의 복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나 옳은 것 같지 않고,

 

산데이(Sanday), 이것이 바울의 동역자들, 예컨대 바나바, 혹은 디모데와 같은 이들을

포함시켜 말한 복수라고 한다.

그러나 디모데나 바나바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가 아니었으니, 이 학설도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데오도레 즈안(Zajn)의 말한 것과 같이, 이 복수가 모든 다른 사도들까지 의미하였다는 의견이 정당해 보인다(Greijdanus).

 

 

은혜와 사도의 직분 - “은혜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리스인데 받을 만한 공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는데 쓰이는 말이다.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 영생을 받은 것은 큰 은혜이다. 은혜는 사도직(使徒職)의 기초이다.

은혜 받은 일 없이 사도가 되지 못할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10:20).

 

, 사도들이, 그 사도직 실행에 나타난 권능을 보고 기뻐함보다 차라리 그들의 구원 받은 일에 대하여 기뻐할 만하다는 뜻이다.

 

사도직도 귀하지만,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한 것이 더욱 귀하다.

혹설에, 여기 은혜는 멸망에서 영생으로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기본 은총을 말함이 아니고, 사도의 직능적(職能的) 은혜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 이름을 위하여 - “그 이름”(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에게 대한 계시(啓示)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도의 일을 한다고 함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믿어 순종케 하나니 - “믿어 순종이란 말은, 신앙과 순종을 별립시켜서 말함이 아니고, 믿음이 곧 순종이라는 의미이다.

 

불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대한 반역이다.

믿음은 곧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요 수고처럼 되나, 신앙 순종은 모든 무거운 짐을 그리스도에게로 옮겨 놓는 행동이니, 이는 고역이 아니라 도리어 안식(安息)이다.

 

 

 

 

[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여기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은, 택하심을 받은 성도를 가리킨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속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관계이다.

 

(고전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자기의 보물, 곧 피 흘려 사신 보물로 사랑하신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야 된다.

 

자기를 그리스도의 큰 사랑의 대상인 줄 알아 절망하지 말고 언제나 자기 존재의 가치를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느껴야 됨. 모든 절망자와 자살자들은, 자기들의 중요성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자들이다.

 

자기는 그리스도의 것인 만큼 겸손해야 됨. 고전 4:6-7에 말하기를,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하였다.

 

자기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고로 우리를 불렀고 우리를 부르신 고로 성도(聖徒)가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부르심,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어 그 백성을 세상에서 불러내심이다.

 

우리가 성도된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에만 있다.

인간은, 구원 소망을 자기 자신의 의()에 근거하여 생각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의가 전연 없다.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만일 누가 자기의 의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기대하며 지낸다면, 그것은 불붙는 집에 앉아서 잘 살기를 꿈꾸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인간의 구원은, 그 자신 밖에서 오는 것이니, 곧 하나님에게서 이다.

 

 

우리 아버지 - 구약에도 하나님의 부격(父格)에 대한 말이 없지 않으나, 그것은 신약의 그것과 다르다. 구약의 것은 이스라엘의 국부(國父)라는 뜻으로 씌어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를 양자(養子)로 받아들인 고로 하나님을 우리 신자들의 아버지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에게 대하여 아바 아버지가 되셨다.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은혜와 평강 - 이것은, 사도가 교회를 축도하는 특별한 복이니,

 

헬라식 축도와

 

(23:26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문안하나이다)

 

히브리식 축도를 겸한 것이다.

 

(6: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삼상 25: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10: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사도의 축복은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의 그것과 같이 권세 있는 것이다.

 

*참조 : (27:1-42)

 

(10:12-13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호의(好意)를 가지시고 사랑을 베푸심이다.

하나님의 호의를 얻음은, 온 인류에게 호의를 얻음보다 귀하고 요긴하다.

 

온 인류가 다 반대해도 하나님만이 를 지지하신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