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거듭난 삶 2024. 6. 9.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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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1:19-23]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란 말은 알려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저희 속에 보인다 함은, 곧 양심에 느껴져야 할 자연계의 놀라움을 가리킨다.

칼빈은 자연계가 하나님을 보게 하는 거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 죄가 많기 때문에, 어두워져서 자연계를 앞에 놓고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는 특수 계시(特殊啓示), 곧 성경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 - 참조 : (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본질을 말함이다. 이 보이지 않는 분이 만물을 창조하셨다.

 

11:3에 말하기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한다.

 

신앙은, 나타나지 않는 참된 신()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육적 시각(視覺)을 만족시키지 않으심이 오히려 정당하다.

 

능력 - 능력은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능(), 그 유지(維持)의 능, 그 심판의 능을 가리킨 것으로서 우리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다.

 

신성 - 이는 하나님 자신 곧 그의 본질인데, 우리는 만물을 보아서 그것을 안다.

, 만물은 법리(法理)의 지배를 받아 성립되어 있다.

 

누가 만물을 무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랴? 무법하고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두고 보면 그런 것이 아니다.

 

객관계의 이법성(理法性)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우연시(偶然視)하며, 기계시(機械視)하는 극단의 회의주의자도 자기 자신의 이법성을 회의(懷疑)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법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인격(人格)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이법의 주재자 곧, 인격적신(人格的神)이 계심을 누가 부인하랴?

 

그 이유는 어떤 법이든지 그것이 실시되려면, 그것의 실시자가 있어야만 되는 까닭이다.

 

인간은, 범죄하여 암매(唵昧)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천연계시(天然啓示) 앞에서도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특수 계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모른다.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인생은, 하나님을 아는 혹종의 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의식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찾는 자는 드물다. 그들은 참 하나님 아닌 자 곧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알고 잘못 섬기니,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요 영화롭게 함이 아니다.

 

이는 마치 귀머거리 소경된 어린 아이가 그의 친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어떤 악한(惡漢)을 가리켜 자기 아버지라고 할 때에 그 아버지에게 무쌍한 욕이 됨과 같다.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 그것은 피조물계를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지식은 피조물의 하나로 피조물 권내(被造物圈內)에 있어서 그 권외에 나가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 지식은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다. 그러므로 그것이 스스로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것이 스스로 종교적 지혜를 낸다면, 거짓 종교, 곧 자율주의(自律主義)의 종교를 제조할 뿐이다.

 

우준하게 - 누가 진실되이 셋을 가리켜 다섯이라고 주장하고, 일곱을 가리켜 아홉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다.

 

이와같이 피조물(被造物)을 가리켜 창조자요, 심판자요, 또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무한히 어리석은 자이다.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이 말씀은 시 106:20의 말씀과 흡사하니,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라고 함이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거짓된 종교를 만들어 하나님을 괴롭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썩을 것으로 하나님의 썩지 않는 것을 대치하고, 피조물의 형상으로 창조자를 대치한다.

 

슐라테르(A. Schlatter)는 말하기를, “저희의 종교 행위는 진리를 거스리는 전쟁 행위요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투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제 위에 소개된 두 가지 정반대의 대조를 자세히 생각해 보자.

 

썩지 아니하는 영광과 썩어질 것.

 

하나님의 영광은 썩지 않으시는 영광이다.

영광이란 말은 구약에 모두 280번이나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啓示)와 구원 능력의 나타남을 가리킨다.

 

* 참고 : (16:9-12, 24:15-18, 29:43, 40:34-35 ; 9:6, 23 ; 14:10, 16:19-20 ; 72:19, 96:3, 102:15-16, 138:4-5).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는 영적 지각으로야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육안(肉眼)으로 보고저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 취급(偶像取扱)하려는 죄악이다.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을 인간 편에서 자기 형상대로 만드는 악해,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 인간이 자기 형상(피조물의 형상)으로 신()을 만드니, 이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을 섬기는 자 되게 하려는 망동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인간의 뜻으로 하나님을 취급하는 망동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성결과 도덕을 지키지 않고 신을 불러서 복리(福利)를 얻으려고 한다. 그것은 진정한 경견이 아니다.

 

진정한 경건은 윤리적 종교 행위이다.

 

1:27에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