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거듭난 삶 2024. 6. 10.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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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그리스도관

 

로마서 11-7-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서 언

 

나는 지금부터 로마서에 대하여 나의 주해를 시도하려는데 있어서, 나의 무학, 불신, 부정을 절감한다.

 

나는 그리스도교를 믿고서부터 이에 20유여 년, 몇 번이고 이 글()을 통독했다.

 

어떤 때는 주해서로서, 어떤 때는 주해서 없이, 그리고 나는 어떤 때는 나 자신이 쓴 서간처럼 쉽게 이 글()을 해득할 수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아주 정밀한 주해서에 의해서도 조금도 그 진의를 해득할 수 없었다.

 

나의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후박은, 나의 로마서의 주해력 여하에 따라 판별되었다.

과거 그러하다.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로마서는 난서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을 정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이라는 것은 실로 이 글()에 연원한다.

 

로마서는 신학의 최시의 것으로서 또 최고의 것이다.

 

성 아우쿠스티누스(4248역주참조)의 신학이라는 것은 이 글에서 나왔고, 루터(2277역주), 칼빈(11302역주)의 혁명 또한 이 글()에 의해 일어났다.

 

사람들 거의는 신학이라는 것의 고원함은 도저히 범인의 지능이 미칠 바 못 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고원한 신학이라 해도 로마서의 고원한데 미치지 못한다.

 

만약 우리들이 로마서의 진수에 달할 수 있다면, 대신학자의 신학도 켤코 겁낼 것 못되는 것이다.

 

로마서는 난서이다. 사도 바울의 박식은 모두 거두어져 이 글()에 담겨져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는 본래 철리를 전하기 위해서 집필된 글이 아닌 것이다. 이는 바울의 실험의 서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득함의 곤란은, 바울이 가졌던 학식의 유무에 관계없이 그의 경과해 온 심령적 실험의 유무에 의하는 것이다,

 

바울과 함께 죄를 느끼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힘(능력)을 느낄 때, 이 글()을 해득함은 결코 난사가 아니라고 믿는다.

 

나는 로마서에 관한 많은 주해서를 읽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나의 독립적 견해를 독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이 주해를 초함에 있어서,

이상 더 타인의 작으로 된 주해서의 하나도 손대지 않고, 다만 1870년 영국 켐브리지 대학 간행의, 박사 스크리브너(947)의 편찬으로 된 그리스어 신약성서 본문과, 1898년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인쇄서 간행, 박사 데이비스 저 성서사전에 의할 뿐.

 

하지만 만약 이 글()의 건전한 해석으로 나를 인도해 준 고인의 이름을 든다면, 나는 주로

-, 호지(훗지), 라이트푸스(주로 그의 갈라디아서 주해에 의한다) 및 뮐러(그의 그리스도교 죄악론에 의해-10395역주 참조)4인을 지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 정식의 신학을 한 일이 없는 나는, 여기서 긴 저목을 실어 독자의 신용을 살만한 편의를 갖지 못한다.

 

원하기는 성령께서 내 마음을 인도 하시고, 나의 마음의 고투에서 인류 전체의 고민을 확인하여, 이 위대한 글()에 의해 나 자신을 위로하는 동시에, 또 세상에 허다한 죄로 시달리는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평강을 얻게 해 주옵시기를.

 

 

1장 제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부르심을 입어 사도로 되었다,

하나님의 복음 위해 선택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예수는 여호수아(예수아)의 전와(달라진 소리)이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다. 유대인 중 보통(흔한)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서, 히브리어의 메시아의 역사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수고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명을 띠고 성민의 왕이신 분의 칭호이다.

다윗, 솔로몬의 뒤를 받아, 영원무궁한 영의 왕국에 왕이신 분의 존칭이다.

 

나사렛의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왕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이름)에 그리스도교의 전부가 담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

 

 

가복 또는 하인의 뜻에 그치지 않는다. ‘’ doulos(그리스어)는 노복이다. 노예이다.

즉 의지 없는, 자유 없는, 권리 없는, 기구나 마찬가지의 것이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 있어서의 관계(같은 것),

노예 폐지 이전에 있어서의 미국에 있어서의 아프리카 산()의 흑인의 위치이다.

 

그런데 바울은 말한다. 그는 사람에 대해서는 자주 자유 독립의 사람이지만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노복이라고. 바울의 그리스도관은 잘 이 한 자()에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는 사람일 것인가?

그 노복이라고 칭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인격을 부정한 자이다. 하지만 자유사상의 장본인인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고 무어랴?

그리스도 신성론이라는 것의 근거는 이에 있다.

 

바울’, 처음은 사울이라 했다. 소아시아, 길리기아주 다소 사람이다. 유대인이다.

기원 1년경에 태어났다(그리스도보다 젊기가 3세 남짓). 70년경에 죽었다. 열성스런 애국자였다.

 

처음은 매우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 하지만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서부터, 마침내 그 충실한 종으로 되었다.

 

표범은 그 반점을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참조 : (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도 박해자 사울은 사도(使徒) 바울이 되었다. 바울의 개신은 아주 저명한 기적의 하나이다.

 

부르심을 입어자진하여 사도로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서 된 것이다.

 

나는 사도적 가치 없는 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억지로(힘차게) 나를 부르셨으므로, 나는 거부할 말 없어 사도의 성직에 오른 자라고.

 

거짓된 전도사는 스스로 나아가 그 직에 오르고, 진정한 전도사는 하나님의 소명에 어찌하는 수 없이 되어 전도에 종사한다.

 

사도보내심을 입은 자(파견된 자)의 뜻이다.

그리스도의 특명을 띠고서 만국민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어진 자의 칭호이다.

 

그렇지만 모든 전도사는 사도 아닌 것이다. 아볼로, 마가, 누가, 디모데, 디도, 실라는 모두

충실한 복음의 선전자(전도자)이지만도, 그들을 사도라고는 하지 않았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직제자의 칭호이다. 즉 그리스도가 일찍이 정하신 12제자를 그렇게 불렀다.

 

(10:2-4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후에 그중의 한 사람이었던 가룟의 유다, 주를 팔아 사도의 영직을 잃은 데서부터, 잔여의 사도는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택하여 그 자리를 채웠다.

 

사도란 그 한 사람인 베드로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을 가리켜 말한 대로이다.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하지만 주의 부활을 목격한 자는 사도를 제외하고 달리도 있었으매, 부활 증명의 한 가지 일만이 사도의 자격을 만들었다고는 할 수가 없다.

 

만약 그리스도가 말씀한대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또 모든 병, 모든 질환을 고치는 권세가 주어진 자만이 사도일 수 있다면, 나는 또한 12제자 이외에 사도 없다고는 단언 할 수가 없다.

 

생각하건대 사도의 직은 이것을 신조적으로 판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초대의 신도 사이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로서 인정된 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직접 그리스도의 입에서 복음의 선전을 받지 못한 자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던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후 그의 복음을 믿은 바울이 스스로 일컬어 사도라고 한 것은, 이는 다수의 신자가 주의치 않는 바이리라.

 

그가 베드로, 요한 등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슬하에서 그 교훈을 받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는 또 맛디아 처럼 사도의 선택에 의해 그 중에 자리를 같이 하기에 이른 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바울은 자기 면허의 사도가 아니었던가?

그의 적대에 나선, 당시의 목사, 전도사들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 바울 자신은 단호히 말했다.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또 사람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데서 다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사도 바울’(갈라디아서 1:1)이라고.

 

그는 또 말했다.

 

나는 사도가 아닌가! 나는 자주 아닌가!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 아닌가!’(고린도전서 9:1).

 

그는 고백하여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해’(고전 15:8)난 자라고 했지만도,

 

그러나 그의 사도로서의 권직을 유지하여 일보도 양보치 않았다.

대담한 바울이여 당신은(정신이) 든 것 아니랴. 혹은 당신의 눈으로 실지 그리스도를 보았는지. 당신의 귀 참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말을 들었는지. 당신은 당신의 고백의 진위를 정하는데 당신의 행위로서 했나이다. 당신은 로마제국을 교화(敎化) 했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달리 당신의 사도된 현실적 증거를 발견할 수 없대도, 당신에게 초인간적 권능이 있음을 아는 까닭에, 당신이 참으로, 참으로 사도 됨을 믿어 의심치 않나이다.

 

하나님의 복음복음, 기쁜, 또는 좋은 소식.

즉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하강하시어 인류를 그 죄의 포박(결박)에서 구원하시어, 이에 심령의 자유를 주셨다는 소식. 이는 실로 기쁜(즐거운), 좋은 소식 아니랴!

 

그를 믿어 눈물 있는 일 없고, 죽음 있는 일 없도다라고.

무엇이 이보다 나은 복 있으랴!

 

영어에 복음을 Gospel이라고 한다. 이것을 역하면 God's spell 하나님의 소식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식이란, 금광의 발견 또는 폐병 치료 특효약의 발견 등, 오인에게 잠시적 환희를 전하는 소식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소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소식이란, 우주만물의 창조주의신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으로서 우리들 죄악에 빠진 인류를 사랑하시고, 그가 영구히 멸망치 않기 위해, 그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우리 위해 구원(구제)의 길을 여셨다는 것. 이것이다.

 

이는 실로 너무 좋은데 지나쳐 믿기 어려운 소식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중의 사실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믿을 바, 또 의심 없이 받을 만한 이야기로다’(디모데전서 1:15)라고.

 

박사 뭉겔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임하지 않은 곳으로서 이 세상을 보지 말라.

 

그리스도를 연구치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 이 세상에 대해 실망하는 자는, 명약을 품에 가지고서 고민하는 자 같은 자이다.

 

선택됨특별히 발탁되었다는 뜻이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어머니의 태내에 잉태되기 전에 만국의 예언자로서 정해진 것같이,

 

그 바울도, 어머니의 태를 나온 때부터 하나님은 그를 택해 두시고, 은혜로서 그를 부르셨다고 확신했다.

 

(갈라디아서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를 부르심을 이어 사도로 된 자일 뿐 아니라, 또 세상의 기초를 두기 전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고 믿은 것이다.

 

이는 바울의 망단이라고 웃을 자는 웃으라.

하지만 이 확신 없이. 바울은 로마제국을, 루터는 독일국을, 크롬웰은 영국을 그 근저에서 개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온 자 같이 믿는 당세의 지사 같은 자가, 이 세상에 있어서 무슨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