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이 복음은, 종전(일찍)부터 그 예언자들에 의해 성서에 약속(서약)된 것으로

거듭난 삶 2024. 6. 1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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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그리스도관 2

 

로마서 1

 

2-3: 이 복음은, 종전(일찍)부터 그 예언자들에 의해 성서에 약속(서약)된 것으로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신 것이다.

 

 

'예언자’ -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이다.

 

반드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것을 예언하는 자를 말함이 아니다.

이것을 예언자(선지자)라고 역하여, 그 진의를 그르치기 쉽다.

해의자, 시현자라는 역자가 진의에 가깝다.

이것을 대언인이라고 함은, 충분히 원의에 맞춘 것이라 해도, 그러나 너무 통속에 지나쳐 <프로페테스>의 위권을 손상 시킬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오인은 예언자라는 자를 두고서, 이에 대언자의 의의를 덧붙여 쓰려고 한다.

 

예언자, 보통 예언자로 일컬어지는 자, 즉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아모스, 호세아 등에 한정하지 않고, 사무엘, 나단, 엘리아, 엘리사 등도 정통의 예언자였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등도 또한 예언자의 직을 한자들이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그리스도 이전의 하나님의 충실한 하복이 한 가지로 소망하고 또 예언한 바였다.

 

의해’ - 하나님에게 입 없으시다.

 

그는 사람에 의해 말씀하신다. 그에게 손() 없다. 사람에 의해 약속(서약)하신다.

하나님의 위탁하시는 바로 된 인류의 영예 이에 지날 것 없다.

 

성서’ - 오인이 오늘 일컫는 구약성서를 가리켜 말한다.

 

그 역사, 시가, 극곡, 예언은 모두 그리스도를 이상으로 한다.

신약은 구약의 해답이다. 예언자뿐 아니다, 구약 전체는 그리스도에게 향하여 주집한다.

 

'종전부터 그 예언자들에 의해 성서에 약속한 것' - 그리스도의 강림의 서약은 시조 타락 시에 시작되었다.

 

여호와 하나님, 뱀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와 여인 사이 및 네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원한을 둘 것이다.

(여자의 후손)는 네 머리를 부수고,

너는 그(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케 할 것이다’(창세기 3:15)라고.

 

하나님은 인류로 하여금 마침내 그 죄로 죽는데 이르게 하지 않을 것은, 여러 부문에 걸쳐, 여러 방법으로서, 예언자에 의해, 유대인의 열조에게 말씀하신 바이다.

 

(히브리서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 아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왕이시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단지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서 뿐이 아니다.

그는 세상의 창시부터 아버지와 영광을 함께 하신 이, 그의 존재하지 않으셨던 때란 없고, 또 존재치 않는 때는 없는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신학자의 주조로 된 것이라 해도, 그 사실은 잘 도리에 맞아, 하나님의 진성을 구명하는데 있어서 불가결의 결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뒤에 상론할 것이다.

 

가리켜 보이신 것’ - 그리스어의 전치사 peri의 해역이다.

대하여또는 관하여로 역하는 편, 도리어 명료하리라.

하지만 그것이 예언자에 관련하여 해석할 것인지, 혹은 제1절에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의 복음에 관계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역문이 조금 애매(모호)함은 원문이 명료치 않음으로이다.

하지만 이자 어느 것에 관련시켜 읽는대도, 그 의미에 있어서 대차 없음은 분명하다.

 

원문에 있어서는, 1절에서 제7절의 끝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결점을 찾아볼 길 없다.

 

이러한 장문장은, 일본어같이 관계 대명사의 사용을 허용치 않는 국어(한국어도 동일)로 역함의 곤란은, 독자가 미리 유의해 두어야 할 것이다.

영역 따라서 제1절 이하를 다음과 같이 역하면 얼마쯤 명료해질 것이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부르심을 입어 사도로 되었다, 하나님의 복음 위해 선택 되었다(이 복음은 종전부터 그가 그 예언자들에 의해 성서로 약속한 것이다). 그 복음이란, 그 아들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서, 그는 육체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고……

 

그는 육체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고, 성선(聖善)의 영성으로는, 다시 살아나심(부활)에 의해, 밝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나타내셨도다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시다. 그는 사람이지만도, 우리들 처럼 죄로 더러워진(부정한) 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홀로 높은데 계시면서 우리들의 약함을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무정무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사람이 되신 까닭에, 약한 우리들의 형제요 붕우일 수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까닭에 우리들의 구주이시다.

우리들은 추찰을 요한다. 하지만 추찰 뿐으로는 우리들은 구원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우리들은 구주를 구한다. 그런데 그는 그 몸에 있어서 우리들의 비통을 느끼는 분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로 우리들 인류의 이 대 요구에 응하는 자이다.

그가 천하 유일의 구주이심은, 그의 신인 양성에 있다.

 

그리스도를 세상의 성인군자와 동시하는 자는, 아직 인류가 요하는 구제(구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이다.

 

육체’ - 그리스어의 sarx이다.

 

근육, , 뼈 등만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다.

육체의 부수하는 모든 감정, 이것을 일컬어 육의 일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육체를 가지셨다는 것은, 그에게 손으로서 만질 수 있는 형제가 있었다는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 또 희로애락의 정의 환기 압억할 바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친구의 죽음에 대하여 우셨다. 그는 바리새인의 완악하심을 보고 노하셨다.

그는 몇 번이고 악마에게 유혹 받았다. 그는 무분별을 보고 기뻐하고 또 웃으셨다.

이는 그의 육체가 그렇게 하게끔 한 일로서. 그는 일컬어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디모데전서 2:5)라는 것은, 그에게 이 깊은 인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후손’ -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인 것은, 예언자가 종종한 말이다.

 

그리고 그가 한 공장(工匠)의 집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왕 다윗의 후손인 것은, 마태, 누가 양 복음의 상재한 것이다.

 

그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 다윗의 후손인지, 그가 마리아의 아들인 까닭인가,

혹은 호적상 요셉의 사자이기 때문인가, 이는 여기서 내가 상론할 수 없는 바이다.

 

하지만 혈통을 중히 여기는 유대인 중에 있어서 누구라도 그의 다윗적 혈통을 의심하지 않았음을 보고, 이 한 가지가, 명료한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찌하여 인류의 주()여야 할 분은 다윗왕의 후손이어야 할 것인가, 이는 우리가 크게 공구해야 할 문제로 본다.

 

혈통은 중히 여길 것이라 해도, 사람의 가치는 그 혈통에 의해 정해지는 것 아니다.

귀족의 집에 우인(偶人) 많은 것은 사회학자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바로서,

또 루터, 폭스(1252), 백성의 압제의 질곡을 부서뜨린 자는 거의가 천한 오두막집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역사의 항칙이라고도 해야 할 일이다.

 

만약 인류의 구제는 그 최하층의 백성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면, 그리스도가 왕가에 태어나온 것은 도리어 그리스도로서의 효력을 희박하게 하는 것 아니랴!

 

나는 믿는다. 성서 기자가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으로 (밝혀) 기록한 까닭은, 불교자가 석가를 정반왕의 아들이라고 일컬음과 동일한 이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윗 자신이 이새의 아들로서. 이새의 집 또한 유대국에 있어서 특히 명가라고 칭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또 다윗왕의 행적이 어떠했음을 아는 자는, 그 자손인 것으로서 결코 도덕적 명예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이것을 수식 없는 열왕기의 기사로 읽을 때, 다윗 왕통의 역사가 결코 명예의 역사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가 다윗왕의 후손임은, 그가 그의 육체로는 모범적 유대인의 참 사람이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즉 틀림없는 유대인으로서, 그의 육체에 유대인의 모든 강점과 약점을 모은 자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나면서, 그의 유전성에 있어서, 그의 이상에 있어서, 가장 순수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유대적 특성을 양성하고 또 보존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특별히 다윗의 집을 지도하셨던 것이다.

 

사람은 사회를 구하고, 나라는 인류를 구한다.

자유를 인류에게 제공한 것은 링컨(7244)이 아니라 미국이다. 하지만 미국은 링컨에 의하지 않고서 자유를 세계에 널리 파급케 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권화라고 칭할 링컨은 잘 미국으로 하여금 그 천직을 이룩하게 하는 성직을 띠었다.

 

그리고 유대국으로 하여금 이 직분을 다하게 할 수 있었던 이는, 모범적 유대인인 나사렛의 예수였다.

 

그가 만약 인도인으로서 태어 나왔더라면, 그는 동양을 구하는데 그치고 전 세계를 구원하기에 이르지 못했으리라.

그가 만약 일본인으로서 태어나왔더라면, 니찌렝(2208), 신량(5414역주)과 그 세력의 구역을 같이 했으리라.

 

그가 인류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는, 그는 갈릴리의 땅 나사렛의 마을에 태어남의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또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솔로몬을 부조(父祖)로서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임은 인류의 역사상 필요 있어서이다.

 

성선(聖善)의 영성’ - 역자(譯者)는 아주 약하다.

신성한 영혹은 성성(聖性)의 영이라고 역할 것이다.

이것을 거룩한 영으로 해석하거나, 또 거룩하게 하는 영으로 해석한대도, 원어의 의미를 해치는 일 없다.

 

밝히’ - 역자 부족하다. 지나(支那) ()대능으로서 밝히라고 있다.

잘 원어의 뜻을 옮겼다고 할 것이다.

 

다시 살아나셨다’ - 죽음에서 일어나셨다는 뜻이다.

부활의 논리 및 현상에 대해서는, 나는 달리 논한 바가 있었다.

 

썩을 육체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모범적 유대인이다.

하지만 신성한 영에 의하면, 그는 하늘에서 강림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하나님의 성자였음은, 그가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에 의해 대능(권능)으로서 밝히 나타나셨다.

 

그가 만약 영에 있어서도 육에 있어서와 같이 사람이었을 것인가?

그는 죽음에서 일어날 수 없었으리라. 그는 생명의 왕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에게 이길 수가 없었다. 그의 부활은 그의 신성의 실증이다.

 

다만 이라 하지 않고서, ‘신성또는 정결 영이신이가 하고, ‘대능으로서 밝히라고 한 것 등, 모두 바울 독특한 문체로서, 그 길다란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감정의 격렬 및 그의 신념의 심후함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후편 이 비슷한 장구는 아주 많다.

독자 그 문법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으로 인하여 그 중에 있는 언외의 진의를 잃지 않도록 할 것이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석에서 참조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