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거듭난 삶 2024. 6. 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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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16-18]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 “부끄러움이란 것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곧 사람이 자기의 소유가 무가치하여 부끄러워함과 자기의 성질이 겁약하여 부끄러워함이다.

 

(딤후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12-18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고후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요일 2: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소유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무한한 영광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런 귀중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복음 운동과 및 자기를 위하여 염려할(염려는 겁에 이르고 겁은 부끄러움에 이름)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그가 본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울이었으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불림을 받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의 안에 사시는 이가 그리스도였다. 그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 될 만큼 충실한 사명자가 되었다.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 로다.- 이 순서는 민족 차별(民族差別)의 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를 가리킬 뿐이다.

 

* 참조 : (3:1-2.9; 1-13, 11:1-6, 15:9; 15:24; 4:22; 1:8, 13:46 ).

 

구원의 복음이 왜 이스라엘 사람을 먼저 찾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복음이 이스라엘을 먼저 찾은 것은, 이스라엘 자신을 위하는 동시에 꼭 같이 이방인들도 위한 것이다. , 그것이 이스라엘 자신에게 구원을 베푸는 행동인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을 전하는 제사장(이스라엘은 이방인에게 제사장이 됨)으로 세우는 행사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사역을 통하여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 하셨다.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게 하시고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게 할 수 있는 전능자시요 또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이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로 제공되셨음을 말함이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를 얻는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 의견을 대표적으로 든다면,

세 가지를 말할 수 있다.

 

펠라기안 학파의 의견,

이 학파에서는 말하기를, 사람은 유대인의 의식적 율법을 순종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덕적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로마교의 의견,

여기서는 율법적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견은 성경적이 아니라.

 

푸로테스탄트 교회의 의견.

여기서는 성경이 말하는데로 바로 주장하였다. , 우리는 우리로 말미암아 행하여진 무엇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행하여진 다른 이(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 의()는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여 주는 것 뿐이다. 이 의는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 의로 말미암아 신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 의는 완전한 것이다.

 

 

나타나서란 뜻은 무엇인가?

 

이 말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의 때가 이르렀다는 뜻.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신자들에게는 바로 종말을 현재화(現在化)시켰다는 의미도 되어진다.

 

이 의를 받는 자는, 세상 끝 날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벌써 심판을 받았다. 인자(人子)가 땅 위에서 사죄(赦罪)하는 권세가 있다고 한 대로,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신자들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칭의(稱義)를 받는다.

이 세상에서 사죄와 칭의를 못 받은 자는 내세(세상 끝날 심판 때)에도 그것을 받지 못한다.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은 그것이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에 감취었던 것이라는 뜻을 내포함.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이 감취었던 것이 나타난 것을 보는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감사히 그것을 받아야 된다.

 

* 참조 : (3: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나타나서란 말이 현재사로 되었으니,

그것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 그 현재에 하나님의 의와 접촉되고 또 받아지는 상칙(常則)을 말함이다.

 

이와 달리 3:21에는 나타났으니라는 현재 완료 동사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적 실현(歷史的實現)의 완료를 보여 준다.

 

믿음으로 믿음에 - 하찌(Hodge), 이것이 역설체(力說體)로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받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 - 7:11-12,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심문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육안으로써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깨달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진노의 나타날 때가 인간의 범죄한 즉석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 진노의 방식이 초자연적(超自然的) 간섭보다 자연 법칙을 통하는 간접적인 것이 많기 때문이며,

 

(3:18-19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4: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리우심이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그 진노 아래서 그들의 심령이 늘 불안한 중에 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 이것은,

 

불의 곧 부도덕한 일들을 행하노라고 진리(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눌러 둔다는 의미라고 함.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소유한다는 의미라고 함.

(이런 경우에는, “막는다는 말 카테콘톤을 소유한다는 뜻으로 해석 함).

이것은 종교적 의식을 말함이다.

 

불의하게 진리를 막는다는 의미라고 함.

,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진리를 믿지 아니함이 부당하다는 뜻이다.

이 아래 문맥으로 보아서 이 해석이 적합해 보인다.

 

위의 세 가지 해석이, 모두 다 하나님을 알고도 신종(信從)치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경건치 않음과 불의 - “경건치 않음은 하나님에게 대하여 바르지 못한 태도이고,

 

(21-25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불의는 인간에게 대해 바르지 못한 태도이다.

 

(26-32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후자(後者)는 전자(前者)의 결과이다.

먼저 하나님을 바로 공경한 뒤에 사람에게도 덕을 세울 수 있다.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이 어귀에 대한 해석으로,

 

하늘이란 말은 자연의 하늘로 간취되고 거기서 나타난 진노는 천연계(天然界)의 재앙(예컨대, 지진, 흉년)이라는 것으로 해석이 있고,

 

하늘을 하나님의 성결성(聖潔性)을 표상(表象)하는 것으로 보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진노는 인간의 죄에 대한 그 성결성의 반항을 의미한다고 한다.

 

칼빈은, 여기, “하늘이란 것에서 그것의 광대무비성(廣大無比性)을 취하여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편만성(遍滿性), 곧 인류 중 한 사람도 이 진노 아래 있지않는 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