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바울의 그리스도관 3

거듭난 삶 2024. 6. 1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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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그리스도관 3

 

로마서 1, 5

"우리가 그에게서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

이는 그 이름 위해 만국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도에 복종하게 하렴에서이다"

 

우리가’ - ‘내가라고 하지 않고서 우리라고 한다.

 

사도 전체를 대표하여 말한 것이다.

저 바울은 은혜의 일을 말하는 때에 그 한 사람 이것을 전유하려 하지 않고서,

그의 붕배와 함께 이것을 분유하려 했다.

그의 애심과 겸손은 이러한 사소한 말 위에 나타난다.

 

그에게서’ -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에서의 역자(譯者) 약하다 그에 의하여로 읽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강탄이 예언자들에 의해 미리 인류에게 전해진 것 같이,

모든 은혜와 특권은 그리스도에 의해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하나님께서 나오는 모든 선한 은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의 기도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달하는 것도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하고,

하나님 역시 그에 의해 그 은혜를 우리에게 내려 주신다.

 

혹은 말하리라.

 

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격하는 일이라고.

옳다, 사람은 그 스스로가 택한 죄의 생애로 말미암아

그 자신 하나님과 이절된 자이다.

 

그가 하나님께 이르려 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 주시고자 하면,

반드시 이자 사이에 개립하는 중보자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교의 중보설을 조소하는 자는,

아직 양심의 가책 받고 분노의 하나님 앞에 선 일 없는 자이다.

 

은혜와 사도의 직분’ - 사도의 직분에 따르는 은혜.

즉 이에 견디는 모든 능력과 지식과 신앙. 사도되는 일은 대임이다.

 

누가 이에 감당해 내랴’(고린도후서 2:16)고 바울은 말했다.

 

하지만 묘수(4124, 342역주) 및 삼수(4124역주)를 만드시고,

죽음의 그늘을 바꾸어 아침이 되게 하시며,

낮을 캄캄하게 하여 밤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약한 사람에게도 사도되기에 족한 은혜를 주시는 이시다.

 

네 능력은, 네가 날마다 구하는 바에 따르리라’(신명기33:25)

(여호와)는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은혜가 동반하지 않는 책임을 오인에게 내리지 않으신다.

그가 사도들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 악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주신 것같이,

 

20세기의 오늘,

오인이 이 사회에 처하여 그의 복음을 선전(전파)하기에 족한 권능을

오인에게 주시는 것이다.

 

은혜와 사도의 직분’, - ‘은혜와 잡지기자의 직분’, ‘은혜와 정치가의 직분’, 우리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에 의해 오는 은혜로 말미암지 않으면 무슨 일도 할 수 없다.

 

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우리들이 할 수 없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바울은 말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시는 자의 능력에 의해 무슨 일도 할 수 있다.

 

사도의 직분이 무엇인지는 전절의 주행에서 자세히 했다.

 

그 이름 위해’ - ‘그를 위해라고 하는 말과 같다.

 

하나님 위해 그리스도 위해서라 하지 않고, 그 이름 위해서란다.

히브리인의 어법 따른 것으로서, 달리 깊은 뜻이 있는 것 아니다.

 

침례는 이것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실시 할 것이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여호와는 그 크신 이름을 가리켜 맹서하였다고 하셨다.

 

(예레미야서 44:26 그러므로 애굽 땅에서 사는 모든 유다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나의 큰 이름으로 맹세하였은즉 애굽 온 땅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의 입에서 다시는 내 이름을 일컬어서 주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라 하는 자가 없게 되리라)

 

물론 이름 그것에 특별한 권능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름은 이것을 쓰는(가진) 사람의 전부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하면, 그의 교훈, 그의 행적, 그의 심정의 전부를 가리켜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해득하여, 그리스도 신자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데 그 이름에 의하는 것이 가장 적당함을 아는 것이다.

 

만국의 사람들로 하여금’ - 만국이란 유대국 이외의 나라 나라를 가리켜 말한다.

 

그리스도교가 세계적임을 보여주는 말이다.

유대는 고립된 나라이지만, 그 나은 그리스도교는 천하를 교화 통일함의 천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그 천품 따라 태어난 것이다.

 

이것을 그 천품 따라 널리 만국 백성에게 전하려는 것은 사도 바울의 성망이었다. 그는 골로새인에게 써 보내어 말했다.

 

이 복음은 즉 너희들이 들은 바요 또 이미 천하의 만인에게 전해진 것이라’(1:6참조)..

 

종교에, 인류적인 것과, 인종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이 있다.

 

일본의 신도 같은 것은 국가적 종교로서, 누구도 이를 널리 천하의 만인에게 전하려하는 자 없다.

 

회교 같은 것은 인종적 종교이다. 아라비아인에 의해 세워져, 주로 아라비아인과 동인종의 백성 사이에 신봉된다.

 

불교 같은 것은 얼마쯤 인류적인데 가깝다고 해도, 그러나 그것이 아시아적 기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 건설 당시부터 만국민의 교화 구제를 목적으로 정하고, 인류 전체를 그 교도 중에 산입한 종교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달리 없다.

 

그리고 사실은 선언과 함치하여, 오늘 그리스도의 이름(성호)은 물이 대양을 덮음같이 전 세계를 덮고 있다.

 

언어는 다르고, 정체는 다르며, 인종은 달라도, 주는 하나, 신앙은 하나, 침례는 하나이다.

 

그리스도교 개발의 당시에 있어서의 바울의 이 확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신앙의 도에 복종하게 하려하심이다’ - 원문을 직역하면, ‘신앙의 복종 위해서이다.

 

이것을 의역하여 도리어 원의를 해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전절을 다음과 같이 개역할 필요 있음을 본다.

 

우리가 그에 의해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 이는 그 이름 위해 만국 사람들 중에 신앙의 복종을 설파(설교)하기 위해서다

 

신앙의 복종이란, 하나님을 신앙하여 그에게 복종하는 일이다.

즉 그의 은혜를 믿고 자애를 믿어, 효자가 그 아버지에게 쓰임같이 하나님께 준종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서의 복종이 아니다. 또 그 위력에 눌려서의 복종이 아니다. 하나님은 폭군이 아니시므로, 그는 오인에게서 이런 종류의 복종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복종은 신앙의 복종이다. 즉 그의 사랑에 격려되어, 스스로 마음에 정하여 기꺼이 그에게 따르는 복종이다.

 

복종은 복종임에 틀림없지만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복종과, 세상 군주제와의 요구하는 복종과의 사이에 천지의 차가 있다.

 

그리스도교가 복종을 역설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유의 벗으로서 압제의 적임은,

그 요구하는 복종이 전적으로 자유적인데 있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해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