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너희도 그 사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

거듭난 삶 2024. 6. 13.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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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그리스도관 4

 

 

로마서 1장 제 6

너희도 그 사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

 

너희’ - 로마에 있는 신도를 가리켜 말한다.

 

그 사람들 중에서’ - 일찍이는 이방인이었던 자,

하나님 없고 희망 없고 그리스도 없던 자 였다는 뜻이다.

 

*참조: (에베소서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바울은 도시에 있는 신도라고 해서 그들에게

야유의 말로서 그 이방인이었음을 덮어버리려 하지 않았다.

 

부르심을 받은 자라’ - 그 바울 자신이 부르심을 받아 사도로 된 것 같이,

그들 로마에 있는 신도도,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입어

하나님의 성도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7

나는 모든 로마에 있는 바, 하나님께 사랑 받아, 부르심을 입고,

성도로 된 자에게 까지 글을 보낸다. 너희가 바라기는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및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받을지어다

 

로마’ - 로마 제국의 수부이다.

 

특히 바울이 이 서간을 쓴 무렵(기원 58)에는 제왕 네로가 위에 있었다.

제국의 통치에 하나의 결여된 데 없이, 뭇별이 북신을 가리키듯,

천하의 백성은 모두 눈을 티베르 강변(이탈리아 중부를 흐르는 강)의 이 제도에 쏟았다.

 

이 인구는 400만이라 일컬어지고, 세계의 부와 지식과 권력은 모두 여기에 모였다.

바울은 이제 이 글을 그곳 ()의 신도에게 보내고서 후에,

자신 단독, 마음속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가지고서 그곳에 가고자 한다.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바울의 생애를 연구하려 하면,

널리 로마의 역사에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 사랑 받고’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 받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른 것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당기신 것이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는 발동적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수동적일 수 있을 뿐.

 

*참조 : (요한 1,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부르심을 입어 성도로 된 자’ - 혹은 성도로서 부르심을 입은 자로 역해도 가하다.

즉 성도(신도)된 자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임의적 선택에 의한 자임을 명시하여 한 말이다.

 

우리들 자신 힘써서 부자, 또는 지자, 또는 학자, 또는 군자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신자 될 수 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이다.

 

세상에(흔히) ‘신자를 만든다는 말 있다 해도, 이는 그리스도교의 교의와 전연 배치되는 말이다.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및 주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로서,

은혜는 그에게서 나오고,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주로서, 은혜는 그에 의해 임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신 분이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부르기에 이른 것은 그리스도 신자의 특권이다.

 

은혜’ - 하나님을 믿는 능력(),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 선을 행함의 능력,

간난을 참음의 능력, 박해에 견디는 능력, 적인까지도 사랑함의 능력,

이는 모두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은혜이다.

 

그리고 우리들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사랑받아 부르심을 입어 성도로 된 자이므로,

또 우리들의 신앙적 생애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은혜의 끊임없는 주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은혜로 말미암아 살며,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되는 자이다.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영원한 생명이란, 영원토록 되는 은혜의 계속에 지나지 않는다.

 

평강’ - 은혜의 결과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접하여 우리는 비로소 만족함이 있다.

 

즉 성서에 말하고 있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사람의 모든 지각(생각)에 지나는 평강’(4:7참조)이 있다.

 

이는 반드시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평화라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평강은 때로 혹은 경우의 쟁란을 일으키는 일 있다.

 

이는 우리가 희망하여(좋아서) 일으키는 바의 쟁란이 아니다.

불안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상태이다.

그들은 영원한 반석에 의지하여 무궁한 평강을 얻은 자를 보고 마음 편히 느끼지 못하고,

자기의 불안을 더함과 동시에 우리 주 안에서 안주하는 자의 평강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쟁란은 생겨난다. 그리스도교가 때로는 세상에 요란을 야기하는 것을 보고,

우리들은 그것이 이를 믿는 자에게 주는 평강의 실체적임을 아는 것이다.

 

이상 불과 7, 하지만 바울의 그리스관이라는 것은 역연(歷然)히 그 가운데 나타나 있다.

 

그는 그리스도가, 인간 이상의 실재자이심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 노예라고 표백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은혜는 모두 그리스도에 의해(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임을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유대인이지만 몸소 부활하심으로서 밝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음을 명시했다.

 

그는 또 그리스도 신자라는 것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그가 믿는 바에 의하면, 그들 신자란 세상의 소위 성인군자와 유를 같이하는 자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노력하여 선인으로 된 자가 아니다. 그들은 부르심을 입은 자,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입은 자이다.

 

그는 또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했다.

즉 우리들의 창조주, 재판인이신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무궁한 사랑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을 나은 자이심을 보여 주었다.

 

바울이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교 이외의 시인이나 철학자들이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시라고 한 것과 다르다.

 

이는 후에 그가 본서에 있어서 상론하는 바이다.

이상은 물론 본서의 일소(一所) 부분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부분이 능히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전체의 시종이 일관하는 증거이다.

 

우리들은 점차적으로 바울의 심소를 살펴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위상의 일편에 접하여, 그것이 이미 순연한 바울의 향기를 발함을 느낀다.

 

그의 신학설을 비난하는 자 있으리라.

그의 그리스도관이라는 것은 그 바울의 그리스도관으로서

4 복음서가 오인에게 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자 있으리라.

 

하지만 이 한 가지는 확실하다, 즉 그의 그리스도관이라는 것이 종시 일철하여

그 사이에 사소한 모호한 데가 없다는 것 이것이다.

 

오인은 거의 천문학을 배우는 정밀로서 그의 신학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루터는 말한 바 있다, 신학은 음악의 일종이다라고.

 

그런데 음악은 조화이다. 오인, 바울의 신학을 깊이 연구하여,

그것이 실로 우주를 조화하기에 족한 일대(一大) 미음(美音)임을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