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 1장 16절

거듭난 삶 2024. 6. 15.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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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로마서 116

 

나는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이 복음은, 유대인을 비롯하여 그리스인,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대능이기 때문이다’(로마서 1:16 일본어역))

 

이것이 우리들이 언제나 읽고 있는 일본역의 성서의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16 한글 개정개역)

 

이 말씀은, 잘 그 전후의 관계, 이것을 말한 바울의 생장, 그의 교육 등을 알 때, 비로소 요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바울 자신의 경우에서 분리시켜 보는 때문에, 우리 자신의 마음에 호소하는 바가 약한 것입니다.

 

애당초 바울같이 그리스도에게 전신을 드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2:20참조) 라고 한 사람이,

 

새삼스럽게 나는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명언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 이겠습니까?

 

만약 이것이 박신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면,

, 말입니까, 그러한 것을 말하다니요하고 문책(비난)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또 베드로나 야고보가 이것을 들었다면,

바울은 이상한 것을 말한다고 괴이해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바울의 경우, 학식, 생장 등을 알지 못함에서인 것으로, 바울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로마라고 하면, 오늘의 런던이나 베를린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아나크사고라스(12권 역주 색인), 플라톤, 피타고라스(12권 역주 색인)등의

철학, 기타 모든 종교가, 거기서 모두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듯 모든 학문 종교가 각기 그 의견을 주장하고 있는 한 가운데 나아가 자기의 주장을 하여 가는 데는 비상한 용기를 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동단, 소아시아의 길리기아 주의 다소라는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그 다소라는 성읍은 매우 학문이 성했던 곳으로, 유명한 대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선생이었던 아데노도로스 같은 이도 이 다소 대학의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서간에서 보면, 유대인의 학문 뿐 아니라, 더 넓게 학문을 한 사람이었던 듯 하고, 그는 다소 대학의 출신이었나 생각됩니다.

 

그러면 바울은 아데노도라스와 그 청년 시대에 아마도 학우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처럼, 바울은 지식이 깊은, 취미 넓은, 교육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나 베드로같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사람과는, 그 학식에 있어서 아주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에 가는데 있어서 그의 깊이 배운 철학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만 하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아나크사고라스, 아데노드라스, 플라톤, 피타고라스 등은 철학을 가지고 갔습니다마는,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서 가슴을 펴고 활보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 사이에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이 이해되면, 바울의 이 말에 대하여 실로 동정해 마지않게 됩니다.

 

다음으로 어찌하여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하면,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하여,

 

그것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대능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비롯하여, 그리고 또 그리스인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것을 해득하기 쉬운 일본문으로 바꾸어 본다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모든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유대인 그것에서 부터 그리스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라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원래 편지이기 때문에, 편지의 문체로 고쳐 읽으면 더욱 힘이 있습니다.

 

먼저 내가 삿뽀로 독립교회에 보낸 같은 주의로 편지에 써 보냈다고 하면,

 

소생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힘이옵고, 하나님의 힘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오며,

모든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것입니다.

유대인 제1, 다음에 그리스인(헬라 사람)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힘이 이것입니다. 가 됩니다.

 

하나님의 대능(능력)이라는 구(), 끝에 붙이지 않고서 먼저 할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힘입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현인에게도 우인에게도 가르침을 전했는데

(이 현자란 철학자를, 우자란 전문적 학문을 닦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특히 그 현자에 대하여 그는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의 조직이 아닙니다, 사상의 계통이 아닙니다, 해석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힘(능력)입니다, 다이나믹 파워입니다.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고 한 것입니다.

 

학설은 사상을 제공하나 복음은 힘(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치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상이 아닙니다, 파워입니다, 다이너마이트입니다. God dynamite입니다.

힘 이상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격의 힘(능력)이라든가 품성의 힘이라든가 학문의 힘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성질을 가지는 힘인가 하면, 그것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려는이라고 한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으로 역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처음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하는 힘(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구원하는 힘이라는 것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이라는 것과 다릅니다.

 

구원하는 힘이라고 하면, 음주라든가 교만 기타의 악벽을 제거하여 주는 힘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바울의 복음은 그러한 좁은 의미의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사람의 전 생애에 걸쳐 그 악벽을 제거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로마서 8장의 끝에 기록하고 있는 대로, 단지 우리들 신자 뿐 아니라 우주 전체가 구원된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은, 전 인류가 하는 힘(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말한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조건으로 전 인류 누구나도 구원한다는 것이 되지 않는가. 그래서 거기에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로 로마서는 죄다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수치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이것으로 분명해졌습니다.

 

즉 이것은 철학의 시스템이어서라는 것 아니고, 학문이어서라는 것 아니고,

학문에서 떠난 하나님의 능력이시고, 믿는 자를 최후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이야기 하면, 바울의 진술하려는 복음의 대략은 다 말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 바울은 자기의 신조를 말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마는,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말하기까지에 그는 여러 가지 실험을 거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빌립보에서, 아데네에서, 고린도에서 전도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인 것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그 귀한 실험을 말한 것이 이 로마서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실험이고 또 우리들 크리스천의 2천 년에 걸친 실험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실력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달리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역사를 연구한 후에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서, 우리들의 오늘까지에 된 일(불완전 합니다마는)을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조금 학문이라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샷뽀로에 와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나를 구원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지식을 넓혀 난제를 풀 수는 없었습니다.

천연에 대해 보는 일이나, 워즈워드(1105역주), 칼라일(983역주),

이러한 것은 복음 없이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구원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두고서 달리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다이너마이트의 힘, 폭발하는 힘, 죽이는 힘, 저항할 수 없는 힘, 이 힘(능력)이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서 얻어졌다고 하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나의 친구는 나의 여러 가지 나쁜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 여러 가지 죄로 갇혀있던 나를 해방시켜 주고, 숨겨져 있던 것을 나타내 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없습니다.

 

그 설명을 하라고 해도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의해 대변동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실험하는 일은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철학을 본 때문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본 때문입니다.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에 접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다이너마이트입니다.

우리들의 바위(완고)를 분쇄하는 것은 이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힘 없이 다른 힘을 써서 이것을 기도해 보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대학생 등이 이것을 학문에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흔히 있는 일입니다마는, 조금 학문상에서

그리스도에 의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여 참된 구원에 들어갈 수 있을까고 하면,

 

하나님은 논리에서 생각해도 없을 수 없다고 하여 곧 감복하여, 바로 학교에 있는 동안은 그리스도 신자입니다,

 

그런데 학사가 되고, 지위가 생기고, 다른 데서 유혹이 오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불편이 생겨 나오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수치스럽게 되어오고, 권주에 구실 붙여 술 한 모금 마시고, 그중에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에겐가 주어버리고, ‘나도 본래는 교회에 다녔습니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이너마이트로 마음의 바위(완악)를 분쇄 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의 감화를 받았을 뿐이고, 페인트칠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일찍이 내게 학문이 있다는 것을 시종 염두에 두고서 전도한 일도 있습니다.

지금은 어리석은 짓 했다고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든 당신은 죄인입니다, 생래의 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사함 받는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하여 교대를 믿은 사람은, 잠시 한 때 구름이 끼는 일이 있대도,

드디어 또 빛을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데는,

다윈이나 헤켈(1843. 2. 16-1919. 8. 9 독일의 생물학자, 철학자 haeckel, Ernst Heinrich)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충분합니다.

 

조금 일본의 사회문제로 들어가 이야기합니다.

메이지 11(11-1878)과 지금과는 상당히 변해져 있습니다.

옛날의 삿뽀로는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실로 유감입니다.

 

일본 전국이 바로 마찬가지로서, 지금 세계 제7위인 해군국, 육군에 있어서는 독일보다 승하고, 교육에 있어서도 구미인 못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우선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가 알고 있는 것은, 일본에 목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후의 사활문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되면, 모두 난처해집니다.

내 친구도 교육계에 몸을 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부성에서 여러 가지 의견을 물어 올 때, 다른 것은 무엇이나 말할 수 있어도,

최후의 덕육 문제가 되면 종래 정리되지 않아, 의논도 유산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라면 일본 국민을 구하기에 족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서양의 교이기 때문에 안 된다, 불교는 염세적이어서 안 된다, 신도는 좁기 때문에 안 된다고 비난은 해도,

 

이제 그러면, 당신은 어떠합니까고 질문 받는 때, 누구도 난처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이너마이트를 받아 마음의 바위를 분쇄함 입어, 불완전하나마 오늘까지 계속해 왔습니다.

 

내게는 이 문제는 해결되어 있습니다.

가정에 있어서도 친구에 있어서도,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습니다.

 

일본을 구하는 데는 역시 같은 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은 이 확신에 있어서는 지금의 문부대신 기타에 대하여 일보도 양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학생이라든가 직공이 있어, 그들을 구원에로 들이고, 그들을 기쁨으로 살리며, 실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죽음을 비애의 극으로 함 없이, 도리어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등의 아름답고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외하고 달리 어디에 있을 것인지요!

 

바울의 경우를 내게 비추어 말하면(불손한 이야기입니다만), 내가 오래간만에 삿뽀로에 돌아와서 생각하는 것은, 메이지 10(1877) 이곳에 와서 친구와 함께 농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친구는 그 전문에 있어서 제1류의 사람으로 되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크게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너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고 질문 받으면,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수산학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농학교 4년의 생활이 지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 아무 공헌도 일본 위해 하지 않고서, 고용된 자가 무일문으로 되어 돌아온 것과 같다고 하면, 나는 무슨 면목 있어서 이곳에 돌아왔겠습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나도 무엇인가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다이너마이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하나님의 다이너마이트입니다. 일본, 조선, 지나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다행히 나도 이 하나를 가지고서 감사에 넘쳐 삿뽀로에 돌아왔습니다.

아무쪼록 제군도 이 말을 생각해 주었으면 합니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은, 로마서 강의의 입문으로 들어 주었으면 합니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석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