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거듭난 삶 2024. 6. 1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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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성 경: [2:1-3]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러므로 -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이 접속사가 어떤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혹자는 이 접속사가 앞에서 설명된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Hendriksen).

 

또한 어떤 학자는 본절 전체를 1:20과 같이 삼단 논법식으로 재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사상적 전개로 이해하고자 했다(J. Murray).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1) 다른 사람의 행동을 너는 판단한다.

(2) 너도 똑같이 그 행동을 한다.

(3) '그러므로' 너는 너의 행동을 정죄하는 것이고, 너도 핑계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종종 어떤 문장을 다른 주제로 전환하고자 할 때, 별 의미 없이 접속사를 사용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문법 구조를 사용한다.

 

(삼하 8:1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10:1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13: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바울도 이와 같이 이방인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주제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별 의미 없이 이 접속사를 사용하였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 '판단하는'의 헬라어 '크리논'은 하나님의 '판단'(크리마)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의심한다'- (24: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헤아린다'-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구별하다'-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본절에서는 인간이 그 이웃에 대하여 편견을 가졌다는 의미로 쓰여졌다.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4: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한편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시하는지의 문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혹자는 이 부류의 사람을 스스로 남을 규탄하고 지도하며 판단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3:1)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아노라)

 

 

(2) 또 혹자는 '판단하는 사람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 크리논' 가운데 '파스' ('모든')를 강조하여 '남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며 판단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자들이라고 한다(J. Barmby).

 

그러나 본장 전체의 흐름으로 보아 본절의 이 말은 율법을 받고 자랑하면서 율법에 따라 살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칭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물론 유대인이라는 구체적 표현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 이웃을 판단하는 교만한 삶이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는 견해를 마치 이방인은 이 부류에서 제외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발생하게 할 것이다.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 바르트(Barth)는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부류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더라도 유한한 인간이며 시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제한되고 연약한 존재로 항상 죄악 가운데 그 영향권 아래 살아가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주장대로라면 핑계치 못할 자의 범주에 바울 자신도 포함되므로 바울 역시

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본 절은 신앙에서 떠난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책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Luther, Calving, Hendriksen).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방인보다 더욱 밝은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판단력이 무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를 이룰 능력도 무력해졌다.

 

그렇기에 남을 판단하는 자는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정죄함이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크리네이스''카타'('에 반대하여')'크리노'('구별하다, 판단하다')가 합쳐진 '카타크리노'의 현재 직설법 2인칭 단수 동사로서 '세아우톤'('너 자신을')과 함께 쓰여 스스로를 죄 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에 의하면 이 '정죄'는 남을 저주했을 때 분만 아니라 용서했을 때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Lenski).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범하는 잘못이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Calvin).

 

즉 그들은 이방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신랄하게 정죄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좀 더 간략하게 나타내자면 '어두움과 위선'(Murray)이 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2: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의 판단 - 여기서의 '판단'(크리마)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 또는 정죄를 의미한다.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사람이 스스로 하는 판단은 항상 한계가 있고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적인 표준이므로 모든 범죄자에 대해 심판과 정죄를 내리심이 당연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심판)은 종말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느 누구도 그의 심판에서 제외되거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그의 절대적인 공의 성취하시기 때문이다(Murray).

 

 

진리대로 - 이 말에는 심판의 순결성과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내면을 감찰하시어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Calvin, Harrison, Barmby)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가 아노라 - 본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1인칭 복수 '우리'1:5에서의 '우리'는 그 지시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즉 본절에서는 수신자와 바울 자신을 같은 공동체로 여기고 '우리'라고 하고 있고, 1:5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 일행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송신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바르트(Barth)는 본절을 매우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는 판단하는 일이 어떤 체계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체계나 사상에서 나오는 선행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체계적인 사상은 복음의 생동력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성을 통해 체계적인 사상을 통합하고자 했던 헤겔(Hegel)에 정면 도전한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실존주의적 신앙 노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체계적인 사상을 고집하면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교회사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논리와 사상의 체계에만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사상의 체계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전자의 경우는 기독교를 논리의 체계 속에 질식(窒息)시키게 하며, 후자는 신비주의에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체계를 지님과 동시에 복음의 생명력을 지녀야 참 종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재물 바치는 것을 빙자하여 자기 부모를 부양하고 공궤(供饋)할 책임을 회피했다.

 

(7: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종교라는 허울 아래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행위인 것이다.

 

이 같은 이들은 겉모습과 말을 그럴 듯하지만 속마음은 이미 부패해서 회칠한 무덤과도 같이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공의로운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설령 그 사람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죄적 선언을 피할 수 없다.

 

'피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프세''사라지다' 또는 '도망가 안전한 곳을 찾다'라는 뜻이 있고, 죄인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벧전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