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에 따른 심판 3
성 경: [롬 2:14-16]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롬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 이방인이 본성으로 -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본성(nature)을 따라 부분적으로 행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행할 수는 없으므로 이방인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이방인도 율법의 행위를 수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바울이 전개하는 논리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다.
비록 본절이나 앞절(13절)에서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계속되는 바울의 논리는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대로 완전히 순종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무엇보다도 본절은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받은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방인들도 양심의 법칙을 따라 율법이 요구하는바 행위를 할 때가 있음을 가르침으로써 유대인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 인간은 그 본성에 심어진 양심과 생각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에 직면하게 된다(J. Murray).
즉 인간들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도덕적 성향은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서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양심의 소리를 수반한다(Murray).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본래적인 양심의 법을 따라 일반 계시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유비적(類比的)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은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방인이 갖는 양심의 법은 간혹 모세 율법과 비슷한 법과 규례를 가질 수 있으나, 율법의 궁극적인 의미에는 전혀 도달할 수 없다.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 '양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는 문자적으로 '함께 안다'라는 의미로서 본절에서는 '함께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쉼마르튀루세스'와 함께 쓰여 사람의 마음속에서 연대적으로 증거하므로 율법처럼 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양심은 인간이 마음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면서 때로는 자신을 정죄하기도 하며, 율법과 일치한 행동에 대하여는 스스로 선한 증거로 인정하기도 하는 인간의 '바른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
(고전 8:7-12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악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칼빈(Calvin)은 양심을 정의하면서 '합리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변호하며 악한 행실에 대하여서는 고발하고 유죄 선고를 내리기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양심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도덕적 성품을 보여준다.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그러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자신을 방치하여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거짓 속에서 멸망으로 나아간다.
(갈 6: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딛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갈등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한쪽에서는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갈등이 반복되는 상태가 모든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 이것이 곧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율법적인 요소인 것이다.
▶ 율법의 행위 -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해석되기 보다는 율법적인 요소가 인간의 양심 가운데 활동하며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 양심의 갈등을 느낀 후에 이전보다 나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롬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 본 구절은 문자적으로 '내 복음을 따라'(카타 토 유앙겔리온 무)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이 전파한 복음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취했는데, 이것은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어 '이신 칭의'의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파한 모든 내용을 가리킨다.
초대 교육교부들은 이것을 '누가복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Origen, Jerome), 여기서는 바울의 전파 내용 중 종말론적인 설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복음'의 출처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깊이 연관되는 표현으로 바울 자신이 예수께로부터 사도로 세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인식을 드러내 주며 자기가 그 복음을 위해 택정 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부르심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반응한다는 뜻에서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이 용어가 원문에서는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구절 뒤에 따라 나오지만,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과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Calvin).
오히려 본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이 성취되어 인간들에게 주어졌듯이 그 복음으로 인한 심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정당한 절차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심판 날 왕권을 가지고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마 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 심판 날에는 감추인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도 어떤 면에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는 선하게 행동하고 선한 말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에 외식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심판날에 남김없이 드러내실 것이다.
(마 12:36-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 그 날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헤메라'는 문장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적으로 사용되었다.
바티칸 사본(B;codex Vaticanus)에서는 정관사 '헤'가 표기되어 있는데 문법상으로는 맞는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정관사를 생략하는 것은 바울의 서술 방법 중 하나이다.
(12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더욱이 5절에서 '그날'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관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굳이 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고 본절에서는 내용 자체가 마지막 심판 날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생략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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