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거듭난 삶 2024. 6. 22.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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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 율법주의 2

 

성 경: [2:20-25]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2: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 - 영적으로 '어리석은 자''어린아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가 영적인 의미에서 상징하는 바가

'연약한 존재',

 

(고전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또는 '어리석은 존재'로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 구절도 앞 절과 마찬가지로 중복어법에 의한 강조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한편 '훈도'란 용어는 헬라어 '파이듀테스'로 보통 '선생'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디다스칼로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좁은 의미에서 '파이듀테스'는 잘못을 범할 때 채찍질도 가하는 '엄한 선생'을 가리킨다.

 

 

스스로 믿으니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은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이라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6:3-4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본절과 같이 행함 없는 자랑을 위선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갖지 못한 그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더 큰 행악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신념을 신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에 지나친 기대를 가짐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가운데서 자신을 속이는 잘못을 범하였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그 이웃들에게 자신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지우는 반율법적인 잘못을 범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은 자신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삶에 대하여 다음에 계속되는 네 가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한 대표적인 의문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Hendriksen).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

 

(9: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이 점은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바 있다.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기들이 가르치는 바를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의로운 체 하는 그들의 외식이었다.

 

(23:23-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여호와 신앙을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행동으로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심령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하며 단순히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종교 지도자에 불과했다.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 '간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큐오'는 히브리적 표현에서 '영적 간음'이나 '우상 숭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

 

본절에서는 우상 숭배를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적 간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바울은 의도적이며 구체적인 사실을 선명하게 표현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온갖 음행과 간통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장 엄격한 율법을 종교의 원리로 삼고 있었지만, 그들의 도덕적 기준은 여전히 부패한 인간 본성의 심연에 머물러 있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 앞에서 언급된 '도적질''간음'이란 용어를 비추어 볼 때 바울은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은 십계명에 따라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나, 우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탐내어 도적질했다.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 한 것이 악행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죄인지 죄가 아닌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이 질문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가증스러이 여기는 우상 제물을 탐낸, 우상 숭배 이상의 죄악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이 문제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면서 그 행위가 죄가 된다고 교훈하고 있다.

 

즉 신명기는 우상들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어 취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그 금지의 이유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로 인해 올무에 빠질 것이 염려되기 때문인 것을 들고 있다.

 

(7:25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학자들 사이에는 본절을 의문문으로 해석하느냐 평서문으로 해석하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평서문을 주장하는 학자들(Cranfield)24절에서 헬라어 원문상 24절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절은 그 접속사를 유도할 만한 이유를 묻는 의문문이 되든지 아니면 그 이유를 유도해 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그런데 본절은 이유를 묻는 의문문의 성격을 띠지 않았으므로 이유를 유도해 내거나 확정을 나타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본문 가운데서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24절의 접속사 '가르'21절에서 23절까지에 언급된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21-23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그리고 본절은 내용상 앞에서 언급된 네 가지 질문의 형식과 잘 부합될 뿐 아니라 특히 21절에 언급된 첫 번째 질문을 보다 구체화시켜 대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나머지 세 가지 질문을 요약한 질문도 된다.

따라서 본절은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편이 본문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된다.

 

 

율법을 범함으로 - 이 말은 유대인들이 범한 잘못들(22, 23)이 곧 율법을 범한 행위임을 지적하고 있다.

 

(22-23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그리고 21절에서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는 질문의 내용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것임도 본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기록된 바와 같이 - 이 표현은 본절이 사 52:5의 인용구임을 시사해 준다.

 

(52: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권위를 내세우는 동시에 자신의 논리를 더욱 확고히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직접적인 선포를 간접적인 내용으로 변형시켰으나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마치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인 양 취급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삶이 고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지나친 자랑에 이방인들이 속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바울이 고발한 것과 같은 유대인의 범죄 함을 발견한다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임을 바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J. Murray).

 

 

 

[2: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율법과 함께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할례의 문제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이 의도한 복음의 본질에 한 걸음 더 접근하고 있다.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은 율법이지만 표식은 할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들어 논리를 전개해 왔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자랑거리요 표식인 할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더욱 더 유대인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할례가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 할 경우에는 형식적인 할례 의식에 그치며 이는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을 상실케 하고 만다.

 

그래서 침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9)고 경고 했던 것이다.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

 

실제로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게헨나(지옥) 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 준다'는 내용의 교훈이 있다(Harrison).

 

이와 같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할례가 다른 어떤 의식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형식적인 유대인들의 할례는 무할례와 같다고 선포한 것은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선포로 인해 유대인의 자랑은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며 형식적인 신앙에서 실제적인 신앙으로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