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거듭난 삶 2024. 6. 2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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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특권 2

 

성 경: [3:5-7]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3: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본절에서 바울은 앞절(4)에서 인용한

 

(4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참으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 이것은 기록된바, 이로써 주께서 주의 말씀하신 것에서 의롭게 되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시리이다, 함과 같으니라)

 

51:4에 대해

 

(51:4 내가 주께만 오직 주께만 죄를 짓고 주의 눈앞에서 이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로써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시고 판단하실 때에 깨끗하시리이다)

 

유대인들이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혹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바울은 단지 자기 교훈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에 답변하고 있는 것이지, 오해나 잘못된 추론(推論)에 답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Hodge).

 

그러나 바울은 8절에서 단순한 유대인의 반대가 아니라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바울의 진술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약속을 어기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신실하게 언약을 맺어 오셨던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은 공정한 처사가 될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거나 약속을 저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공의의 판단으로 징계(懲戒)하시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 지금 바울은 5;20에서와 같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는 의미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인간의 불의는 결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빛나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불의를 의로우신 판단으로 징계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더욱 더 드러나게 된다.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언약들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은 아니다.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문제는 유대인의 불신앙과 불의이며, 하나님은 그에 대해 공의로운 판단을 내리셨을 따름이다.

 

 

 

[3: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 본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4절과 마찬가지로 '메 게노이토'이다. (4절 주석 참조).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불신앙과 불의에 대해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하나님은 심판 주()로서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이므로 이러한 '절대 의'로 인하여 발생하는 진노는 정당성을 갖는다.

 

구약에서는 심판자의 개념을 사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법률에 적용되는 소송을 심리(審理)함으로써 공정하게 권위를 사용하는 공직자로서 법정 안에서만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족장 시대에는 가장이 가정의 재판관이었으며,

 

*참조 : (21),

 

왕정 시대에는 왕이 최고의 재판관이었다.

 

(삼하 15:2-3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3)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때로 제사장들도 재판관 노릇을 하였으므로 성소가 재판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33: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17:12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그 외에 성읍의 장로들도 재판관의 임무를 감당했으나,

 

(8:6 숙곳 방백들이 가로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4;2 보아스가 성읍 장로 십 인을 청하여 가로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그들이 앉으매)

 

사람에 관한 판결을 선언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심판자 개념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었다.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33: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4: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판단하시는 분',

 

(94:2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는 분'이다.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언제나 공평한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려고 하였다.

 

(7:8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50:4-5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5)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너의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신약에서는 '심판''크리노', '크리마', '크리시스'등의 단어로 나타나는데, '조사한 후 판결하다' 또는 '분별'이나 '결정' 등의 의미로 쓰였다.

 

구약의 심판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규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새로운 권위에 의하여 판단하는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벧전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종말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여졌다.

 

(고전 6:2-3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따라서 본절에 쓰인 '심판'(크리네이)의 개념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룩된 신성한 도덕적 질서, 다시 말해서 율법적인 기준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판단 받는 것을 의미한다.

 

(24-2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후자의 조건을 갖춘 자는 전자의 조건과 관계없이 그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될 것이지만,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전자의 판단 기준 곧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육체의 법을 따라 정죄받으며 육체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종의 자리에서 율법에 의하여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3: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그러나 - 본절은 6절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상으로나 문장 구조상 5절과 연결된다.

5절과 본절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6절은 삽입구로 볼 수 있다.

 

그럴 경우에 본절은 5절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한 진술로 서로의 내용을 보충한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 이 말은 '나의 거짓과 불의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은 죄인 취급되어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의미를 지닌 궤변(詭辯)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8절 후반부에서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한편 본문만을 따로 떼어내어 '심판을 받으리요'라는 반문을 '심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우리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은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상황 윤리가 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3: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 나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결코 죄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결과는 본절과 같이 보다 적극적인 궤변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부모님에 대한 공양(供養)의 책임을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무시해 버린 바 있다.

 

(7: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바울도 예전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종교적인 열심으로 선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해 악을 행한 적이 있다.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비록 바울이 그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태도가 변하여, 오히려 유대인이 바울의 과거에 범했던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바울은 간파하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잘못 이해한 자들의 시각에는 바울의 주장이 도덕 폐기론(Antinomianism)과 같이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들의 소행은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 아래 매여 율법의 종 된 자들은 그들의 울타리 속에서 믿음을 판단하려 하지만, 거짓 판단으로 선을 이루려는 그들의 시도는 오히려 더 큰 악을 만들려는 노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 이 판단의 근거는 7절과 8절의 반문식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와 불법이 공존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도무지 조화될 수 없음에도,

 

(고후 6:14-15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합리화하려는 자들이나, 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바울은 본 구절로써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사실 바울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바울의 교훈을 곡해(曲解)하여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바울의 논술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