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거듭난 삶 2024. 6. 2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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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구증관(救拯觀)

 

 

구원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하여 구원되는 가의 문제에 대하여, 바울이 답하는 바는 명백하다.

 

바울의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구원에 세 단계가 있다. 즉 다음과 같다.

 

첫째, 의롭다함을 얻는 일

둘째, 거룩해짐을 얻는 일

셋째, 영화롭게 됨을 입는 일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해 말한 것이 고린도전서 130절이다.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세워져, 너희의 지혜 또는 의 또는 성 또는 속이 되셨도다고 있다.

 

지혜에 대해서는 후일에 이것을 말하기를 하고, , , , 이상의 3계단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예수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들의 의 또는 성 또는 속이라는 것이다.

 

구원의 첫째는 의로 여겨지는 일이다.

그리고 의로 여겨진다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바의 의인으로 된다는 것은 아니다.

 

즉 부앙 천지하여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으로 된다는 것 아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과 의로운(바른)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부자(父子)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반역의 자식이었던 자가 종순의 아들로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서 하면, 지금까지는 반역의 결과, 자식으로서의 권리를 잃은 자가, 예수로 말미암아 다시 이것이 부여되어, 아들로서 취급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를 받고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어, 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다’(요한복음 1:12)고 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대해서는 반역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언자로써 말씀하셨다,

 

배역한 자식들아, 내게 돌아오라. 내가 너희 반역을 고치리라’(예레미야서 3:22).

 

그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하리라’(호세아서 14:4).

 

사람은 모두 먼저 하나님께 대한 그 반역을 고침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구원은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먼저 일어나 그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당신 앞에 죄를 범했으니, 당신의 아들이라 일컫기에 족하지 못 하나이다’(누가복음 15:18)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제1보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회개로서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은 기꺼이 이를 영접하여 이를 사랑하심으로서, 여기에 그의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구원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구원, 단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회개는 구원의 제1보이다. 하지만 필요한 제1보이다.

회개에 의해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의롭다 함을 입은 후에 거룩(성결) 해짐을 입는 것이다.

 

구원의 제2는 거룩해짐을 입는 일이다.

 

하나님과 의로운(바른) 관계에 들어간 것만으로는, 사람은 거의 본래의 그와 다를 바 없다.

그는 죄 사함 받았으나, 그러나 죄의 결과는 지금도 의연히 그에게 남아 있다.

 

마치 티푸스 환자의 열이 간 뒤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병은 면했으나 그러나 병의 결과는 떠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전과 같이 약한바 있다. 그는 굳은 음식물에 적당치 않다. 그는 걸을 수가 없다. 일할 수 없다. 그는 병을 고침 받았으나 아직도 여전히 병인이다. 그러나 그는 회복기에 들어간 것이다. 병세는 이미 꺾기고 병근은 이미 끊긴 것이다.

 

그 같이,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은 죄의 기반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서 이제 성결의 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순간에 기적적으로 거룩해지는 것 아니다. 그의 영혼의 건강은 서서히 그에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언자가 말한 대로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배움’(이사야서 28:10)을 입는 것이다.

 

영혼의 건강은 육체의 건강과 마찬가지로, 일시에 회복되지 않는다. 티프스 환자는 열이 떠나간 후 곧 원래의 건강한 사람으로 될 수가 없듯, 크리스천도 역시 죄의 뿌리를 끊기고서 곧 성인으로 될 수는 없다.

 

먼저 의롭다 함을 입고, 반역을 고침 받아,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들어가고 그런 후에 그의 영혼의 회복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을 칭하여 거룩해짐을 입는다고 하는 것이다.

 

의롭다함을 입음은 죄의 삼제(베어 없이 함)이고, 거룩해짐을 입는 것은 덕의 주입이다.

 

먼저 죄의 구제가 있고 그런 후에 덕의 부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먼저 가시가 제거되고, 그런 후에 좋은 나무가 심겨지는 것이다. 가시가 제거되는 일, 그것이 의롭다함을 얻는 일이다.

 

좋은 나무가 심겨져 서서히 좋은 열매를 맺기에 이르는 일, 그것이 거룩해짐을 입는 일이다.

 

그렇지만, 거룩해짐을 입어 구원은 아직 성취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써 예비하신 구원은 영혼의 완성으로서 그치지 않는다.

완성된 영혼이 자기에게 적합한 몸을 입게 되어, 여기서 비로소 구원은 성취(완성)되는 것이다. 구원이 몸에까지 미쳐, 그 종극에 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일컬어 영광을 옷 입음(또는 받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몸이 구원되는 일,

 

(로마서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며 동시에 그 종극이다.

 

우리들의 영혼이 구원될 뿐으로는, 우리는 아직 완전히 구원되고, 영혼의 신부가(얼룩) 점도 없고, 흠도 없이,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자로 되고,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체로서 장식되어, 그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에 이르러, 여기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의 위에 베푸신 구원이 성취(완성)되는 것이다.

 

이상을 다시 말하면, 사람의 구원은 삼단의 순정을 거쳐 행해지는 것이다.

 

그 첫째가 의롭다함을 입는 일이다.

영어의 justification(하나님에 의해 의로 규정됨)이다.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에게 아들로서 취급되기에 이르는 일이다.

이것이 구원의 제1보이다.

 

이에 이어서 거룩히 되는 일이 온다. 영어의 sanctification이다.

하나님께로 부터 성령을 받아 성선의 제덕(帝德)이 내 영에 심겨지는 일이다.

이것이 구원의 제2보이다.

 

그러나 구원은 영혼의 성화로써 그치지 않는다.

이에 더하는데 몸의 구원으로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성화된 영혼이 죽지 않을 썩지 않을 몸으로 옷 입혀지고, 여기서 다시 몸을 갖춘 완전한 사람으로 되기에 미쳐, 구원은 완전히 수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광을 옷 입는다는 일이다. 영어의 redemption 또는 glorification이다.

 

의롭다함을 입고, 성화되고, 영광을 옷 입혀진다. 사죄되고, 덕이 심겨지고, 영체가 부여되어 영생에 들어간다.

 

바울의 구증관에 이 삼 계단이 있다.

이것을 마음에 둘 때, 그의 문서를 해득하기는 아주 쉽게 된다. 말하자면

 

너희 심중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자, 이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의 이루실 것으로, 나는 깊이 믿는다’(빌립보서 1:6)고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이라고 있음은 물론 하나님이신 것으로서, 그가 구원의 제1보로서 신자를 부르시고, 이것을 의롭다 하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에 이루실 것이다라고 있음은,

 

의롭다 하신 자 위에 그 역사를 계속하여 이것을 성화케 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 미치고, 마침내 그에게 약속의 몸을 주사 구원을 이루시리라는 것이다.

 

바울의 이 일언 중에 그의 구증관이 분명히 보여 있다.

또 로마서 830절에 의해 보건데

 

또 미리 정하신 바의 사람을 이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는 이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에게는 이에게 영광을 주시는도다라고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의로 되는 것이 3단으로 나뉘어 보여 있고, 거룩히 되는 일이 약해져 있고, 영광을 주시는 것으로서 결말 되어 있다.

 

예정과 성소(聖召)는 의롭다 함을 입는 일의 전제이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는 일의 결과는 영화를 받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있어서도 역시 바울의 삼단적 구증관은 혼동되는 일 없이 보여 있다.

 

그리하여 바울의 이 구증관(구원관)을 마음에 두고서 볼 때, 언제나 난해 불명으로서 보이던 로마서가 해득하기에 어렵지 않은 글로 되는 것이다.

 

로마서를 해득함의 주요한 곤난은 바울의 구증관을 발기 하지 못함에 의해서이다.

이것을 분명히 할 때 이것을 해득하는 것은 결코 곤란하지 않다고 믿는다.

 

로마서 제118절에서 제8장의 끝까지가, 바울의 구증관을 기록한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하여 구원되는가 함이, 바울이 여기서 논구하려 한 문제이다.

 

그리고 그는 먼저 사람은 어떻게 하여 의롭다함을 얻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그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고, 이방인에게 있어서나 또 유대인에게 있어서나, 사람의 의롭다함을 입는 것은 그 신앙에 의한다고 결론했던 것이다.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바울의 결론이 가한지 부한지는 별문제이다. 그가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논하는데 있어서,

먼저 그가 의롭다함을 얻는 그 길(도리)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1장의 중간부터 제7장의 끝까지에 걸쳐서, 바울은 사람은 어떻게 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가에 대하여 논했다.

 

그는 아브라함의 예를 인용하고, 또 자기의 실험(체험)에 호소하여, 그의 논거를 분명히 했다. 그는 자기에게 무슨 선한 것 없음을 표백했다. 그는 외쳐 말했다.

 

아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실 이는 누구시랴’(로마서 7:24).

 

그리고

이분이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인 까닭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여,

그의 구증론의 제1단에 완결을 고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신앙에 의해서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될 수 있을까?

이것 제8장 상반부의 논하는 바이다. 바울은 이 문제에 답하여 말했다.

 

성령에 의해서이다라고.

 

8장의 1절에서 17절까지에 이라는 말이 17회나 사용되어 있다.

 

살리는 영’(생명을 주는 성령)(2)

그리스도의 영’(9)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이의 영’(11)

하나님의 영’(14)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의 영’(15)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입은 자, 즉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들어간 자는, 그 보상으로서 그러한 영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 은혜에서 은혜에로 성서에서 성선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영) 너희 안에 있으면, 몸은 죄 때문에 죽는다 해도, 영혼은 의로 인하여 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약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의 영, 너희 안에 거하면 그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까지도 살기 이를 것이다’(8:10-11)라고 바울은 논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영혼의 성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구원의 제2, 즉 거룩하게 되는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먼저 의롭다함을 얻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런 후에 아들의 영을 받고, 그 영성을 성결함 입어,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되는자격에 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만약 영으로 육적의 행위를 죽이면 살 것이다’(13)라고.

 

노력 분투로서 유욕에 이기면 살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는 이 세상의 도덕이 가르치는 바이다.

 

성령에 의해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위를 죽이면 살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이로 하여금 내 영을 점령케 하고, 내 영을 살려, 마침내 내 육도 정복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자는 거룩히 되는 것이다.

성령을 받고, 이로 말미암아 거룩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히 된 후에는 어떠한 것인가?

 

바울은 제818절 이하에 있어서 구원의 궁극, 즉 영광을 받는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는, 지금의 이때의 고난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할 바가 아니라.

 

거룩히 되는 일(성화)의 궁극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인 자유에 들어가는 일(주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서 하면, ‘우리의 몸이 속량되는 일’(23)이다.

 

거룩해진 영혼이

하늘에 있는, 손으로 지은 것 아닌, 한 없이 존속되는 집(영원의 집)’(고린도후서 5:1이하 참조),

 

영구히 무너지지 않는 몸을 입게 되는 때에, 우리들의 구원은 성취(완전)되는 것이다.

바울이 보는 바에 의하면, 구원이란 그렇듯 원대한 것이다.

 

단지 품성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구원에 그치지 않는다. 몸이 속량(구속)되는 것이다.

 

죽음에 의해 잃은 몸은, 다시 죽지 않을 상태에 있어서 회복(원상대로)되는 일이다.

 

품성의 구원, 영혼의 구원, 몸의 구원, 이것을 합하여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써 우리에게 주시려하는 구원은, 그러한 광대무변, 사람의 모든 생각에 지나서, 세상에 비할 것 없는 구원인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생각하고, 감사, 찬미, 송양, 절규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게 할 자는 누구랴.

환난이랴, 고뇌랴, 박해랴, 기근이랴, 헐벗음이랴, 위험이랴, 칼이랴

그것, 혹은 죽음, 혹은 생(), 혹은 천사, 혹은 집정, 천지만물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게 할 수 없는 것이다’(35이하)

 

따라서 안다.

로마서의 대반을 차지하는 바울의 구증론도 역시, , , 속의 삼단적 구증관의 부연 상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바울은 결코 망막하게 구름을 잡는 것 같은 논자는 아니었다.

하나님께 관하여, 우주에 관하여, 인생에 관하여, 미래에 관하여, 아주 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의롭다 함을 얻는 일 - 사람은 회개의 침례(교회의 세례식이 아니다)에 의해,

축복된 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거룩히 되는 일 - 신자는 성령의 강림을 입어 이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광을 받는 일 -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기다려 신자위에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셋 모두 한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 또는 수양 또는 선행에 의하는 것 아니다. 자비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에 의해, 이러한 일을 우리 위에 행하시는 것이다.

 

사랑, 사랑, 사랑, 바울의 구증관도 또한 필경은 애()의 일자(一字)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구증론을 결론지어 말한다.

 

우주 만물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로마서 8:39).

 

사랑은 좀 논리적으로 말한 것, 그것이 로마서이다. 해득하기에 곤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만 그 표면이다. 그 중심은 성서의 다른 부분과 다름없다.

 

그리스도로써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의 서언이다.

이렇게 알면, 로마서도 역시 꿀같이 달콤한 글()로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