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거듭난 삶 2024. 6. 26.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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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류의 죄

 

성 경: [3:9-12]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우리는 나으뇨 - 본 구절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지칭하는 바가 누구인지 규명해야 한다.

 

(1) 유대인을 통칭했다고 볼 수 있는데,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기에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다음 근거를 볼 때 이 견해는 옳지 않다.

 

본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역시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을 가리킬 때 보통 3인칭으로 나타냈으며,

 

(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9: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11: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29에서는 유대인이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었다.(본 주석에서 참조 바람)

 

 

(2)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8절에서 사용된 '우리'는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절부터 18절까지는 죄의 보편성에 대한 설명이므로 그리스도인도 그 죄의 보편성에서 제외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란 바울 자신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또는 더 넓게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욱 타당하다.

 

한편 '나으뇨'에 대한 해석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이 말은 헬라어 '프로에코메다'의 번역인데, 이 동사가 수동태와 중간태의 형태가 같고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수동태를 취할 경우 이 말은 '우리는 나아지는가'로 해석되어 '우리는 나은 자로 판단받을 수 있는가? 라는 의미를 지닌다(Meyer).

 

그리고 중간태를 취할 경우, 이 말은 개역성경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능동의 의미이든 수동의 의미이든 간에 '우리는 나은 것이 없다'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수동태를 취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현 실존이 죄의 보편성 문제에 있어서 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 강조되지만, 중간태를 취하면 유대인과 비교해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물음이 강조된다.

 

 

결코 아니라 - '우 판토스'는 고전 5:10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고전 5:1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그 의미는 단순한 부정 이상의 '결단코 그럴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들은 1, 2절에 기록된 유대인의 유익이 범사에 많다는 진술(陳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1-2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그러나 1, 2절에서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유대인이 갖는 특이한 지위와 역할을 다루었고,

여기서는 유대인의 도덕적, 영적 상태를 언급하여, 그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였는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Harrison).

 

더욱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영적 윤리적 상태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앞 구절의 질문에 대한 본 구절의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판토스'는 보다 강한 부정을 나타낼 수 있도록 부정어 ''의 위치를 바꾸어서 '판토스 우크'(고전 16:12)를 취해야 한다(Murray).

 

(고전 16: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따라서 '어느 모로 봐도 아니다', '터럭만큼도 아니다'라는 강한 부정의 의미이다.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기록한 바 - 바울은 이제까지의 논증을 '기록'에 의존하여 결론짓고 있는데, 이는 기록된 말씀에 대한 신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구전된 전승들(oral traditions)이라고 한정 짓기도 하지만 본절에서 언급하는 '기록한 바'는 선교상의 변증과 논증을 목적으로 확실하게 제시되었던 자료들로 보여진다.

 

시가서를 비롯한 구약성경들이 초대 기독교에 수납되었다는 사실은 쿰란 문서들(DSS)을 통해 입증되었다(Kasemann).

 

바울은 여기서 시편을 주로 인용하였는데, 12절은 70인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고,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53:3 각기 물러나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10절과 11절은 약간씩 변형하여 바울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강조해서 말한 것이다.

 

(10-11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의인은 없나니 - 문자적으로는 시 14:1보다 전 7:20(LXX)에 더 가까운데, '세상에 아주'(엔테게) 없다는 것을 '하나도'(우데 헤이스) 없다고 표현한 점만 다르다.

 

시편과 비교해 보면, '선을 행하는 자'(포이온 크레스토테타, 13:1<LXX> ', 포이온 아가돈, 52:2<LXX>)라는 표현 대신에 '의인'(디카이오스)이라고 변형시켰고, 시편에 언급되지 않은 '하나도' 없다는 표현을 첨가하여 강조하고 있다.

 

어쨌든 바울은 이러한 표현 방식으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관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한편 '의인'에 대해 혹자는 '올바른 도덕관을 갖고 그 원리에 따르는 자'도 포함시키고 있으나(Matthew Henry), 타당하지 않다.

 

인간은 본래 도덕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구약에서의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결국 죄에 오염된 인류는 본질적으로 ''이나 ''라는 개념과 거리가 멀다.

 

 

하나도 없으며 - 헬라어 '우데 헤이스'는 예외는 아무도 없다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바울이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하여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시대의 몇몇 경건한 자들을 의로운 자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의 개념 조차도 하나님의 본성에서 떠난 도덕적 규범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 묵시 문학 속에서도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판단에 의하면 의로운 자가 없다'라는 표현이나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라는 구절은 신약에 기록된 바울의 견해와 일치한다(Kasemann).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주장이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버렸고,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초대 교회 속에서 사용된 보다 권위 있는 구약의 문서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 53:2에 대한 70인역(LXX)의 번역에 의하면 '깨닫는'(쉬니온)의 목적어로 '하나님'(톤 데온)을 취할 수 있다.

 

(53: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을 깨닫는 자도 없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바는 피상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여 체득한 직접적인 지식과 체험이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간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직접적인 지시이며 깨달음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바울은 지적인 면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진술한 후 곧이어 인간의 의지적 무능력에 대하여 진술한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없는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본절은 70인역(LXX)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14:3<LXX 13:3>;53:3<LXX 52:4>).

 

다 치우쳐 - 히브리어 본문(MT)에서는 본 구절이 시 14:3에서는 '사르',

 

(14: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53:4에서는 '사그'로 약간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나,

 

(53:4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가버리다', '떠나다'라는 의미를 비슷하게 갖는다.

 

70인역(LXX)은 본 구절과 동일하게 '여세클리난'으로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 '여세클리난''돌아서다', '피하다', '멀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상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은 올바르게 걸어가야 할 길을 돌이켜서 그 길을 떠났으며, 그 결과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 이 말은 무익한 것을 추구하여 마음의 생각조차 부패해진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 추구하는 바 그 자체도 악하고 무익하며 무의미할 뿐이다.

 

한편 '무익하게'의 헬라어 '에크레오데산''유용한'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크레이오스'와 부정 접두어 ''의 합성어 '아크레이오스'('쓸모없는')에서 온 동사 '아크레이오오'(쓸모없게 하다)의 단순 과거형이다.

이는 쓸모없게 되어버린 인간의 무가치한 상태를 지적하는 표현이다.

 

특히 함께 쓰여진 부사 '하마''모든', ''(판타)의 의미와 더불어 '동시에', '즉시로' 등의 의미도 갖는다.

 

(24: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모든' 인간들이 '동시에' 무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적용되지 않고 인류 전체가 전적인 타락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 혹자는 본 구절을 '인간이 애정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Calvin).

 

''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타'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대한 ''을 의미하는 '아가도스'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선행에 더 가깝기 때문에, '애정'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 또는 '애정'을 버린 자를 가리켜 바울은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이미 선포한 적이 있다.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