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거듭난 삶 2024. 6. 2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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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역할

 

성 경: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이 말하는 바 - 10절에서 18절까지 인용 구절들의 출처는 시편과 이사야서였다.

 

(10-18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책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율법서'에 포함되지 않으나 통상적으로 바울은 구약성경 전체를 '율법'이라고 표현하였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 - 헨드릭슨(Hendriksen)은 이 용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1) 유대인. 랑게(Lange)와 리델보스(Ridderbos)가 이 견해를 따른다.

 

(2) 로마에 있는 신자들. 렌스키(Lenski)가 주장하는 견해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나 본서 어디에서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로마에 거주하는 신자들에게 국한되었다는 암시가 없다.

 

(3) 모든 사람이 해당되나 특별히 유대인들.

어드만(C.R. Erdmann)에 따르면, 본 구절은 자기들의 순수함을 선언하려고 애쓰는 유대인들과, 그밖에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징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만 하는 입장에 처해진 전체 인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4) 모든 사람, 세상 전체.

머레이(Murray)6:14'법 아래'(은혜에서 제외된 것을 의미함)와 본 구절을 구분하여 본 구절은 율법이 적용되는 영역, 즉 온 세상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리고 블랙(M. Black) 역시, 정죄되어 하나님의 몽둥이 앞에 서 있는 '모든 사람'(온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레이다너스(Greijdanus)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이 주장은 본절 하반절에서 모든 입, 온 세상,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용어들과 관련지어 볼 때 가장 타당하다 하겠다.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통치 영역하에 있는 모든 사람, 곧 온 세상을 지칭한다.

 

 

모든 입을 막고 - 본 구절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결과와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한다.

 

이 구절 속에서 반복된 '모든'()이라는 단어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특히 20절에 기록된

'모든 육체'(개역성경은 '모든'이라는 말을 번역하지 않았음)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강조한다.

 

'막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게''잠잠케 하다', '멈추게 하다' 등의 뜻을 가진 '프랏소'의 제 2단순 과거 가정법 수동태형으로서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 앞에서 최소한의 변호마저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의 상태를 묘사한다.

 

여기서

(1) 단수형을 사용하여 ''(스토마)'프라게'를 연결시킨 것은 '온 세상'을 하나의 집단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심판대 앞에 선 피고인들 각자의 침묵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2) 또한 단순 과거 가정법을 사용한 것은 현재 가정법이 반복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동작의 단회적 성격, 즉 심판대 앞에서는 심판의 단회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 - 율법의 기능은 심판대 앞에 있는 피고들을 변호하거나 또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죄를 죄 되게 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심판대 앞에 기소하는 일을 감당한다. 그 대상에는 예외가 없으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를 동일한 심판대 앞에 서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하면서 심판을 논했을 때 이방인들조차도 이 심판에 대하여 알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사실 복음이나 율법을 접하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창조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이방인들이 일반 계시를 통하여 알 수 있었듯이 심판에 대한 계시를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따라서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면서도 스스로 심판의 형벌을 해결할 수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무능력이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므로 - 모든 사람이 율법의 세력권 아래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그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또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전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자 이 단어를 사용했다.

 

혹자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적절하지 못한 번역이기에 '그러한 이유로'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한다(Murray).

그 이유로는 본절이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정죄 아래 있게 된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실을 알리는데 바울의 의도(意圖)가 있다는 것을 든다.

 

내용의 흐름으로 비추어 볼 때 본 절은 지금까지 전개해 온 논리에 대한 결론이 되면서, 21절 이하의 내용을 준비하는 단계라는 점에서 '그러한 이유로'라고 번역해도 되지만, 내용상으로는 '그러므로'와 별 차이가 없다.

 

 

율법의 행위로 -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이를 할례와 같은 의식에 관한 율법을 수행하며 복종하는 것으로 한정 짓는다(Jerome, Pelagius).

 

이외에 혹자는 순전한 양심에 의한 율법의 행위, 고도로 개선된 자연적인 율법 행위, 의식 율법의 행위, 도덕 율법의 행위 이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Matthew Henry).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이 용어는 의식 율법 특히 할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3: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리고 본서에서도 바울은 이 용어를 '할례'에 대한 진술 후에 언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18-2:22와 본장 10-18절의 내용은 모두 도덕 율법과 관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4:2에서 '율법의 행위'란 용어 대신에 단순히 '행위'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또한 바울 서신 중, 본서와 갈라디아서의 공통 주제인 '이신 칭의'의 원리는 인간의 마음과 행위 그 자체에서 나오는 어떠한 것으로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펠라기우스(Pelagius), 알미니우스(Arminius),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듯이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면 바울은 굳이 행위와 믿음을 대조하면서까지 강변할 필요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음도 헛된 것이 된다.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는 구약성경의 율법, 나아가서는 양심의 법, 이 모든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하여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포했던 사실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특히 그는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시 143:2'인생'을 의도적으로 '육체'(사르크스)란 용어로 바꾸어 인용했다.

 

(143: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사르크스'는 단순히 인간의 몸을 의미하는 헬라어 '소마'와는 달리 죄와 대항하기에는 무능력하고 연약한 인간의 실존을 의미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바울은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율법은 행하여 의롭게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결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6: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면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가?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은 인간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두려워 탄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며, 그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의를 옷 입어야 한다.

 

본 구절을 통해서 바울은 율법이 죄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이 없음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딤전 1:9-10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