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거듭난 삶 2024. 6. 2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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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성 경: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제는 - 한글 개역성경에는 없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나'를 의미하는 접속사 ''가 첨가되어 있다.

 

그래서 본절 전체가 지금까지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M. Lloyd-Jones)'그러나 이제는'(뉘니 데)이란 용어를 '대전환점'(The great turning point)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그는 본절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논리의 시작이라는 점과 아울러 본 서신 전체의 주된 주제 중 하나의 시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혹자는 '이제는'이란 단어가 시간상의 대조, '율법 아래 있을 때''율법에서 자유로울 때'를 대조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Sanday, Headlam).

 

그러나 이 단어는 로이드 존스(Lloyd-Jones)의 견해와 같이 인간 상태의 전환(轉換)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율법에 의존된 관계''율법에서 벗어난 관계'간의 대조를 나타낸다.

 

 

율법 외에 - 이 표현 속에는 율법에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으나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그 의를 옷 입을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리고 율법의 의() 이외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한 의() -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의가 '중생의 은혜이며,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자 값없이 주신 은혜이고, 율법의 행위를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칼빈(Calvin)은 어거스틴의 말에 동의하면서 좀 더 부가적으로 시 32:1'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타고난 도덕적 본능에 의해서 행하는 선행이나 심지어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선행으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의'는 이미 구약성경의 율법에 나타났던 '절대적(絶對的)이고 객관적인 의'로서 이제는 율법과 관계없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칼빈(Calvin)은 본 구절을 '복음이 값없이 의를 주는 점에 있어서 율법과 배치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가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혹자는 전반부에 언급된 '율법'과 본 구절의 '율법'과의 의미상 차이를 설명하면서 전자는 '칭의와 정반대되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며, 후자는 '칭의를 전하는 것'이라고 진술한다(Murray).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전반부에 언급된 '율법'의 의미와는 달리 '선지자들'이라는 단어와 함께 단순히 구약성경 전체를 나타내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대하여 어떤 때에는 단순히 '성경'이라고만 말씀하시기도 했으며,

 

(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또 다른 곳에서는 '율법과 선지자',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1: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혹은 '모세와 선지자들' 등으로 언급하셨다.

 

(16: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본 구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구약성경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다.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 바울은 1:17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암시적으로 말한 바 있다. 그는 이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정시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편에서 시작한 믿음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영접하는 주관적인 고백에 의하여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삶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라고 선언하는 법정적 판결은 '믿음을 통하여'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며, 또한 신앙은 하나님의 사역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는 능동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새로운 삶의 운동력이 되며 또한 새로운 삶을 주관하는 원리(原理)가 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소유격이 사용되고 있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가졌던 자로 해석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여기 기록된 믿음은 예수 자신의 믿음으로써 주께서 사역을 완수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가졌던 믿음을 바울이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G. Howard).

 

그러나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성격이 예수께서 지상 사역에서 보여주신 믿음을 흉내내는 것이라고 이해하거나 또는 의롭게 되는 것이 예수 자신이 소유한 믿음에 의하여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J. Murray).

 

왜냐하면 본 구절에서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신앙의 대상이시다.

 

바울이 1:3, 4에서 설명한 예수를 본 구절에 와서 구체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명백하게 설명한 것은 그분이 가졌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구속자로서 화목 제물이 되시고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1:3-4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친다'라고 진술하지 않고 '믿는 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이 갈 2:16에도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다.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본서에서는 이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표현하였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한 인류는 스스로 믿음을 가질 만한 능력도 가지지 못했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비로소 믿음을 얻게 된다.

 

인간은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조차도 인간의 공로나 업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본 구절에서 시사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며 그 주시는 것 외에 그 어떠한 것도 더할 수 없다.

 

특히 '믿는 자'를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한 것은 현재적인 믿음의 구체적인 것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믿음은 과거의 것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며 미래의 예정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계속 믿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차별이 없느니라 - 율법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고 죄 있다고 기소(起訴)하는데 차별을 두지 않듯이, 새로 나타난 한 의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듯이,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마음의 손'이다(Harrison, Godet).

따라서 그 손을 내미는 모든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한 것이며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