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거듭난 삶 2024. 7. 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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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3

 

성 경: [3:27-31]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자랑할 데가 어디뇨 - 인간이 의롭게 되는 모든 과정에서 인간 자신은 조금도 개입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활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이다.

특히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받은 것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 바울은 '믿음의 법'을 행위와 대조시킴으로써, 믿음이 결코 인간 편에서 취한 행위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 믿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선물에 불과하다.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러므로 - '믿음의 법'에 대한 변호를 위해서 본 구절은 독립적으로 해석되기보다 종속적으로 해석되는 편이 타당하다.

 

 

율법의 행위 -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가 인정하노라 -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자'를 의미하며,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인정하노라'에는 '생각하다', '추론하다' 또는 '결론을 맺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로기조마이'의 현재 중간태로서 '그러므로'가 지시하는 두 가지의 요소를 확고부동하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성도들과 더불어 확실하게 결론을 맺은 두 가지는

 

(1)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며

(2)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누구든지'라는 사상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3: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유대인에게만 국한시킨 종족 수호신의 개념을 공격하면서 범우주적 창조주, 섭리주,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근동 지방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자기들만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장 나라로서, 열국의 구속(救贖)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를 무시했다.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더 나아가 그들은 율법의 준행과 할례 제도의 시행이 그러한 자신들의 신앙이 옳은 것임을 나타낸다고 확신했다.

 

바울은 이처럼 유대인의 잘못된 신앙관을 비판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믿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4:1-25에서 유대인의 자랑거리인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다는 자신의 주장을 미리 정당화 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4:1-25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무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바울이 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매우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감히 부르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이방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성 모독과 같이 무거운 범죄에 해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히려 유대인의 교만을 책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 되심을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소신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된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이방인들을 '고임'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노동자들과 같은 '집단' 또는 '무리'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혈연관계의 결속(結束)보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여졌다.

 

족장 시대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없으나,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18: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시내산 계약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선별의식과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이라는 민족의식에 의하여 배타의식은 강화 되었다.

 

특히 헬라 시대에 들어와서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더욱 배타적이어서 '이방인' (에드노스)이라는 말 자체가 경멸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예언서에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찾으며,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참 이스라엘의 영광을 높이는 자로서 묘사되었으며,

 

(60:5-6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6)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그들의 구원은 메시야가 오셔서 참된 빛이 되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고,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49:6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그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예수께서도 그의 사역 가운데서 이방인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셨으며,

 

(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또한 제자들을 이방 가운데 파송하시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에 동참한 이방인은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참된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또한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된 것이다.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9절에 '유대인''이방인'이 대조된 것처럼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같은 방식, 같은 의미로 언급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이신 칭의를 얻는 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유대인이 율법과 할례를 통해서 의롭게 되지 못함을 바울이 그동안 강조해 왔듯이, 이방인도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의롭게 될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란 표현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적절하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이신칭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란 의미로 이해된다.

 

29절의 내용에서도 역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바울이 주장했던 점을 참고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또한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면서,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믿음의 법을 율법과 배치되는 원리로 설명했다.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직접 주신 그 율법이 아무 쓸모없다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현재 바울이 주장하는 하나님간의 단절이 생각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절의 반론을 잠재우기 위해 바울은 신약과 율법이 서로 배치(背馳)되지 않음을 피력하고 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시대에 마르시온(Marcion)뿐 아니라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저급한 신(Ialdaboath)으로 취급하면서 구약성경 자체를 무시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이 말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지킨다'란 의미이다.

 

어떻게 해서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신칭의에서 나온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으나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율법의 원리에 따라 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사람은 그 의를 받게 되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증거된 율법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은 율법의 증거를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며 율법이 지향하는 목적을 남김없이 성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