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의(義)
성 경: [롬 4:1-3]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 그런즉 - 2:1에서 언급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처럼 별 의미 없이 다른 화제로 전환하고자 사용된 접속사이다.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3:19-31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고 이제 본 구절부터는 이신칭의의 구체적 실례로 아브라함을 예(例)로 들고 있다.
(3:19-31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육신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사르카'는 직역하면 '육신을 따라'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하나는 '우리 조상'과 연결된 수식어로 해석하는 경우이며
(2) 또 하나는 동사 '얻었다'를 수식하는 부사구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두고 있는데 만약 '얻었다'를 뜻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가 '아브라암'('아브라함')앞에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카타 사르카'는 (1)의 의견에 따라 자연적인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면 '휴레케나이'를 '헤몬'('우리') 뒤에 위치시키는 소문자 사본들에 의하여 해석한다면 '카타 사르카'는 (2)번의 의견에 따라 윤리적인 의미, 다시 말해서 '육신의 원리를 따라' 또는 '율법의 행위를 따라'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 바울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육신'의 개념을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때로는 '육신으로'라는 표현을 '썩어질 육체의 소욕과 충동에 의하여'라는 경멸적인 의도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순수한 자연적 출생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증거할 때,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육신적인 형제 관계로 표시할 때 등이다.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전 10: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이와 같은 의미에서 '육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면 바울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 혈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육신'이라는 말을 추가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를 따를 때에는 '우리'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칭하는 말인가? 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서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보통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한편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Lenski, Calvin, Meyer, Godet, Hodge)은 '육신으로'라는 말을 '얻었다'라는 동사에 연결시킴으로써 '육신'을, '행위' 또는 '율법'의 의미로 취급한다.
이 경우 본 구절의 뜻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행위로 무엇을 얻었는가?' 라는 의문문 형태가 된다.
본 구절의 앞 뒤의 문맥으로 보면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행위로 말미암아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사실이므로,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본절의 '육신으로'라는 의미는 유대인의 조상된 아브라함의 혈연적 관계를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자랑할 만한 것' 또는 '율법의 행위'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얻었다 하리요 - '얻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발견했다'(have found), '얻었다', '만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단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단어의 삽입에 의문을 제기하여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urray).
이 견해를 취할 경우 '육신으로'는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과 연결된다.
그리고 '우리'란 대명사는 바울과 유대인 특히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3:9에서 밝힌 바 있다.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또한 2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이란 구절은 '얻었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얻었다'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어야 바울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 아브라함이 - 바울이 아브라함을 설명한 것은 유대주의자들도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선민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3살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으며 할례와 율법을 예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들 역시 창 15:6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의 공로를 증명하려고 했으며 특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로'에 의하여 후사(後嗣)가 되어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Hendriksen).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 당시의 유대교적 가르침보다 성경을 중요시한 바울은 '나는 너를 열방의 조상으로 세웠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을 칭의를 받는 신앙의 본질적인 모범으로 인정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따라야 할 신앙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돌이켜 보는 믿음 속에 있는 반면
아브라함은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에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인 '의'의 개념에 있어서 양자는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 행위로써 -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으나 바울은 율법의 원리 곧 행함의 원리를 아브라함 시대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1) 믿음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2) 행위의 원리가 단순히 모세에 의해서 주어진 율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
▶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 바울은 '에이'('만일')에 부정 과거 직설법 수동태 동사 '에디카이오데'를 연결시킴으로 하나의 조건문을 만들었다.
이 조건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논리적이며 형식적인 가정으로서 현실적이며 실재적인 근거에 있어서는 '없느니라'는 부정(不定)을 유도하는 조건문으로 인정하는 반면,
(2) 혹자는 바울이 부정 과거 가정법을 사용하여 단회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조건문으로 해석한다(Lenski).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행위로'(여스 에르곤)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일차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하였던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렌스키(Lenski)는 바울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3:19-31에서 말한 것과)
증명하기 위해 '여스 에르곤'과 '여스 에르곤 노무'('율법의 행위')를 서로 구별하려 한다.
신앙의 행위로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만 '율법의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행위'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자랑과 구분이 되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행위'인 바, 바울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성격의 행위라고 한다.
(고후 11;21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12: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그러나 만약 이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는 자칫 믿음을 공로로 인정하는 유대 랍비적인 교훈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1절 주석 참조).
칭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에는 신앙이라는 인간의 공로조차 아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편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자랑할 근거가 있다는 형식적인 논리를 인정하나, 그 논리가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자랑할 것이 없다, 라는 구절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바울은 가정적인 추론 속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다 확실하게는 가정문을 반증(反證)하기 위해 다음절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 본문에는 누구에게 자랑하는 것인지 그 자랑의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자랑할 것'이란 말을 '영광 받을만 한 것'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한다(Meyer).
그렇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광을 주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곧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는 구절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전체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수정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일반적으로 문어체에서는 '기록된 바'란 용어를 사용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본절에서 바울이 의문문의 형식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구어체적(口語體的)인 것으로 독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서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해 보기 위함이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 본 구절은 창 15:6을 인용한 것이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혹자는 본절을 약 2;21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uther).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약 2:21은 창 26:5과 관계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야고보 사도는 믿음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삶(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창 15:5에서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을 성취시키실 뿐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것이다.
▶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믿음과 행위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에 기록된 또 하나의 구절을 극복해야 한다.
시편 106:31은 비느하스의 열정적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편 106:31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며, 비스하스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스하스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칭의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비느하스의 행위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믿음의 한 열매로서 주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J. Murray).
경건치 아니한 자, 또는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의 칭의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과 '믿음의 선한 열매로 인한 결과'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는 '로기조마이'의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1)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동적 행위를 의미하며
(2) '의롭게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정도로 인격(person)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신분적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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