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구원에 삼단이 있다

거듭난 삶 2024. 7. 4.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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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구원에 대해서

 

구원에 삼단이 있다.

그 제1은 의롭다함을 입는 일, 제이는 거룩하게 되는 일, 제삼은 영광을 받는 일,

 

그리고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와, 그로 말미암아 신자 위에 주어지는 일임은,

로마서 제117절에서 제8장의 끝에 이르기까지의 바울의 논지이다.

 

사람의 구원은 금세로서 끝나지 않는다, 내세에 계속된다.

구원은 영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사업이라는 것은 내가 전회(前回)의 강연에서 말한 바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개인의 구원에 대해 말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의 반분(半分)을 개인의 구증론(救拯論)에 썼던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물론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것 아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개인을 구원하여 그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진리를 깨닫는데 이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다’(디모데전서 2:4)라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이므로, 이것은 영원에 미치는 동시에 또 전 인류를 회포(懷抱; comprehension)하는 구원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개인의 구원에 대하여 논한 것으로서 그의 구증론을 맺지 않았다.

그는 전 인류의 구원에 대하여 일언(一言)치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로마서의 제9장 이하 계속되는 장에 걸쳐 그가 하고 있는 바이다.

 

하나님은 놀라운 수단과 방법으로서 개인을 구원하신다. 바울 자신도 역시 그렇게 하여 구원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그 바울은 이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 한 사람 구원되기만 하면 되는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영혼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 영혼이 영원한 구원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자,

 

우주 만물 무엇으로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게 할 수 없다’(8:39)고 절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바울에게는 자기 영혼보다도 더욱 귀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동포였다. 그의 나라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전 인류였다.

 

그는 이들의 구원을 소망하여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또 그의 마음 속 깊이의 절원을 들어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므로, 내 말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도다. 또 내 양심은 성령 안에서, 내게 커다란 슬픔이 있는 것,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음을 증거 한다. 만약 내 형제, 내 골육 위해서라면,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멸망에 이르는 것도 역시 소원이다’(9:1-3)라고.

 

우주 만물 무엇으로도 나를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할 수 없다고 한 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것도 내 소원이다라고 한다.

 

바울은 여기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인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그의 실험(체험)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구원에 대하여 생각할 것인가? 그는 감사, 환희, 찬미하여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의 국인(國人)의 상태에 대하여 생각할 것인가? 그는 우수, 비탄, 고통에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기에 대해서는 하늘에라도 오르고 싶을 만큼 기쁘게 느꼈다. 동포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그들을 대신하여 죽고 싶을 만큼 슬프게 느껴졌다. 바울은 크리스천인 동시에, 또 애국자였다. 옳다, 참된 크리스천으로서, 열렬한 애국자이기를 바라나 여의치가 않다.

 

이스라엘은 구원될 만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아들 되는 일, 또 영광, 또 계약, 또 율법, 또 제의, 또 약속, 이는 모두 그들의 것이다. 열조는 그들의 것이다. 또 육체에 있어서 말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서 났도다’ (9:4-5)

 

이스라엘은 그러한 자격을 가진 자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가 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예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종을 박해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생각하여 괴이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는 때로 자기의 마음에 물어 말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버리셨는가?’(11:1).

 

그러나 그는 그렇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단호히 이 물음에 답하여 말했다.

 

결코 그렇지 않다’(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같이 보이는 그 중에 깊은 이유 없이 잠시라도 그 백성을 버리실 리 없다.

 

그리고 담사(潭思) 침구(沈玖)의 결과, 그는 그 이유를 알아냈던 것이다.

그것은 구원이 이방인에게 임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깨달았다.

 

이는 그들의 추락에 의해 구원이 이방인에게 임하고,

그들에게 선투를 일으키도록 하렴에서라’(11:11).

 

이스라엘이 복음을 배척한 그 이유는, 복음이 이방인에게 임하기 위해서였다.

 

‘(스데반 죽은 후) 예루살렘의 교회는 커다란 박해 일어나, 사도들 이외는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이에, 그 흩어진 자들이 두루 복음을 전했다’(사도행전 8:1-4)고 있다.

 

예루살렘이 복음을 배척한 것은 실은 이것을 이방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노()는 때로는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복음 배척은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섭리하에 인류 구증의 일 수단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의 신앙의 형제에게 고하여 말했던 것이다.

 

형제여, 나는 너희가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하는 일이 없도록 하렴에서, 이 오의를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 즉 일부분의 이스라엘이 완고해 진 것은, 이방인 전체가 들어올 때까지이다. 그리고 후에, 이스라엘의 전체는 구원받게 되리라’(로마서 11:25-26).

 

즉 바울은 말했던 것이다.

 

이방인 중에서 택하심을 입어 크리스천이 될 수 있게 된 로마에 있는 내 사랑하는 신앙의 형제는, 너희가 앞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해서, 스스로 자기를 귀히 여기고,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없기 위해 나는 이 오의(비밀)를 너희에게 알려준다. 즉 일부분의 이스라엘이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배척하며 그 사자를 추방한 것은, 그 중에 깊은 섭리가 있는 것이다. 이는 구원이 먼저 이방인에게 임하여, 그들 전체가 이에 들어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일이 성취된 새벽에는 이스라엘 전체도 역시 구원되는 것이다.

즉 역사의 이 순서야말로, 이방인을 구원하시고 또 이스라엘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대지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바울은 또 같은 것을 다른 말로서 했다.

 

지금, 그들(이스라엘)이 배반(불순종)하는 것은, 너희(이방인 신자)가 긍휼을 받음으로서 (그들도) 또 긍휼을 받게 하렴에서라’(11:31).

 

하나님은 한편으로 치우쳐 보시는 이가 아니다. 그는 특히 이방인을 사랑하시고 이스라엘을 미워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가지로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그는 세계 만민을 사랑하신다.

한 사람이 멸망되는 것도 바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바라신다.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을 전반적으로만 해득할 수가 있다. 부분적으로 알 수는 없다.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이 그의 최후의 목적이다. 그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

 

(로마서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려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려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는도다’(9:18)를 문자대로 읽을 때,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해도, 하지만 이는

 

내 힘을 드러내고, 또 내 이름(그 이름은 사랑이다)을 두루 세계에 전하기 위해서라’(9:17)는 것을 알 때,

 

하나님께 만약 임의 행동이 있대도, 이는 지애에서 나온 임의 행동임을 아는 것이다.

사람을 완악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있어서는 다만 일시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 최후의 목적은 자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9장 이하 세장에 걸치는 그의 인류 구증론을 결말지어 말했다.

 

대저 하나님은 만인을 긍휼히 여기시기 위해 만인을 불신에 가두셨도다’(11:32)라고.

 

대답한 은유(1046참조)란 바울의 이 말이다. 불쌍히(긍휼히) 여기시렴에서의 가둠(감금)이다. 은혜 위한 매(회초리)이다. 영구히 용납하기 위한 잠시적인 폐적이다.

 

만인을 긍휼히 여기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으로서 조환의 목적, 역사의 추세, 우주만물의 귀착점이다. 이스라엘인도 이방인도, 유럽인도 아시아인도, 일본인도 지나인도, 사람이라는 사람, 국민이라는 국민, 그들 모두에게 사랑이신 그의 이름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동일한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아 서로가 형제자매가 되게 하시려는 일, 그것이 인류 전체의 역사를 일관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이것을 생각하여, 바울은 그의 가슴속에 용솟음 쳐, 누르려 하여 누를 수 없는 찬미, 감사 격탄의 마음을 여기 토로했던 것이다.

 

아아 하나님의 지와 식은 깊도다. 그 판단은 측량하기 어렵고, 그 길은 알아내기 어렵도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으랴! 누가 그와 함께 의논했으랴! 누가 먼저 그에게 드려 그의 갚아주심을 받으랴! 대저 만물은 그에게서 나와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 돌아가는도다. 원하옵기는 영광세세 하나님께 있을찌어다. 아멘’(11:33이하) 이라고.

 

바울은 인류를 이종으로 분류했다. 그 제1이 이스라엘인이고 제2가 이방인이다.

 

이스라엘인은 일명 유대인으로서, 오늘의 유대인이다.

이방인이란 유대인 이외에 당시의 문명 인종인 것으로서, 주로 그리스인(희랍인) 및 로마인이었다. 인류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매우 불완전한 인류의 분류법이다. 하지만 바울은 종교가이지 인류학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적으로 인류를 분류했던 것이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묵시를 받고, 율법을 받고, 특종의 지도를 받은 백성이다.

이방인은 양심과 지식의 지시에 의해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한 백성이다.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한 백성, 하나님께 접근하려한 백성, 종교적으로 인류를 분류하면 이것 이외에 없는 것이다.

 

묵시를 받은 백성, 철학을 가진 백성,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걷는(사는) 백성, 사람의 지식에 의존하는 백성, 유대인은 전자이고 이방인은 후자였다.

 

종교적으로 생각할 때, 바울은 인류의 분류법을 그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관찰하여 유대인은 확실히 인류의 반분이다.

그 총수 지금 전 세계를 통하여 1,300만에 불과하다 해도, 그러나 유대인은 오늘이라 해도 역시 세계의 대 세력이다.

 

세계의 금력은 유대인의 손에 파악되고 있다. 구라파의 신문지는 거의는 유대인의 경영으로 되는 것이다. 인구에 비례하여 유대인만큼 세계적 대인물을 산출한 백성은 없다.

 

악보가로서는 멘델스존(2171역주참조), 신학자로서는 네안더(10396역주), 정치가로서는 디즈레일리(2217역주), 신문 통신원으로서, 대국의 재상 못하지 않는 대세력을 스는 브로-윗츠, 기타 활동의 제방면에 있어서 유대인이 산출한 위인 대가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근간 완성된 유대백과사전라는 것이, 유명한 대영백과사전를 능가하는 대책임을 알 때, 유대인이 인류 진보에 공헌한 바가 얼마나 많은가를 예상할 수가 있다.

 

그리고 유대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백성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를 떠난 때에 시작하여, 연면 5천년 후의 오늘에 이른 백성이다.

 

구약성서를 만들고, 신약성서를 만들고, 세계 최대의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성서를 만든 백성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일대 민족으로서 세계에 활보할 자격을 가진 백성이다.

 

유대인은 실로 강력한 백성이다. 악에도 강하려니와 또 선에도 강하다.

 

만약 이 백성이 마침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기에 이를 것인가?

이는 확실히 복음의 부흥, 만민의 각성, 지상의 있어서의 황금시대의 도래를 고하는 사건이다. 실로 바울이 말한 대로이다.

 

만약 그들의 추락, 세계의 부가 되고, 그 쇠퇴가 이방인의 부로 되었다면, 하물며 그들의 영광스럽게 되는 때에 있어서야!’(11:12)라고.

 

만약 그들의 버림받은 것이 세상의 화해가 되었다면(하나님과의), 그 용납됨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랴’(11:15).

 

유대인의 번영하는 일은 세계가 번영하는 일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인류의 부활하는 일이다.

 

인류가 대망하는 것으로서 유대인의 각성 같은 것은 없다.

유대인이, 그들이 일찍 십자가에 못 박은 나사렛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주로서 아는 때는, 세계에 도덕적 대혁명이 일어나는 때이다.

 

그리고 그런 때는 드디어 이르는 것이다. 성서는 분명히 이것을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 그리고 5천 년간에 걸쳐 그 선민을 지켜 오늘에 이르셨다.

 

이방인이 모두 복음에 들어온 후에 유대인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구원자는 시온에서 나오시리라 그가, 야곱의 불경건을 제거하시리라 내가 그들에게 세운 바의 맹세는 이것이라 내가 그 때 그들의 죄를 제거하리라‘(11:26)고 있다.

 

유대인이 그 죄를 제거함을 입고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때는 반드시 온다.

이렇게 하여 전 인류는 그 최후의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같이 하여 인류를 구원하시고 있다.

 

일단 이스라엘을 버리고서 이방인을 구원하시고, 그리고 이방인을 구원하고서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인류의 역사는 그 구원의 과정으로서 볼 수가 있다.

 

나라의 흥망, 백성의 성쇠, 이는 모두 인류의 구원의 진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축복하시고 저를 저주하시는 것은 아니다. 이도 저도 만민을 구원하시려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로 된 자는, 그의 이 마음으로서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 만민 구증위해 우리의 몸을 맡겨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물론 국가구제, 사회개량이라고 하여 자기 영혼의 구원을 돌아보지 않는 자가 있다.

 

신앙은 원래 개인적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이다. 개인적이 아닌 신앙은 근거 없는 신앙이다.

 

아아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원할 자는 누구랴!’(7:24)고 하여

바울과 함께 외친 일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그 가장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자이다.

 

자기 영혼의 깊은 곳에 근거를 고정시키지 않은 신앙은, 그것으로서 사회도 국가도 구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구원은 나 한 사람의 구원으로서 되는 것은 아니다. 내 구원 중에 인류 전체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완전히 구원되는 때는 나와 함께 인류 전체가 구원되는 때이다.

 

인류는 일체이다. 나는 그 한 지체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는데 있다. 그가 나를 구원하심은 그의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종교를 공적으로만 봄의 위험이 있음과 동시에, 또 이것을 사적으로만 해득함의 위험이 있다.

하지만 종교는 사적으로 시작하여 공적으로 끝마쳐야 할 것이다.

 

완전한 신앙은 원형은 아니다. 타원형이다. 자와 타와의 이 점을 중심으로 하여 그려진 것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지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자기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다. 남도 역시 중심으로 하지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자기가 동정적으로 세계적으로 확대하여, 나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전도의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전도는 의무는 아니다. 내 영혼의 구제상(구원상)의 필요이다. 인류의 구원은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게 된 내게 또한 아버지의 이 목적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들이 아닌 것이다.

 

내 아버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하시는도다. 나도 또한 일하는 것이라’(요한 5:17)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 같이 우리들도 또한 일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구원은 아버지의 사업이시다. 우리들도 이 사업으로서 우리들의 사업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구원, 일본인의 구원, 지나인의 구원, 샴인(태국인)의 구원, 터키인의 구원, 아아 우리들의 일생도 또한 다사한 지고이다.

 

우리들의 사업은, 물이 대양을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전 세계를 덮기까지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천으로서의 특권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국을 다스린다는 것은 이것이다.

만국 위에 권위를 쓴다는 것은 아니다. 만국에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과 함께 한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다.

 

바울의 권고의 말로서 전해져 있는 디모데전서 21절은, 크리스천 각자에게 있어서 아주 적절한 말이다.

 

내가 특히 권한다. 너희는 만인위해 원하고, 기도하며, 간구하고, 감사하라.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해에서 참조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