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거듭난 삶 2024. 9. 9.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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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親愛) 유서(宥恕)의 도()

 

로마서 1214-21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라.

16. 서로에 대하여 동일한 것을 생각하라. 높은 생각을 가지지 말라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

17. 누구에게 대해서도 악으로서 악을 갚지 말라. 모든 사람이 선하게 여기는 것은 힘써 이것을 하도록 하라.

18. 할 수 있는 한은,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서로 화목하라.

19. 사랑하는 자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라. 물러가서 주의 노하심에 맡겨 두라. 그것은, 기록하 여 원수를 갚는 것은 내게 있다. 내가 이것을 갚을 것이라고 주는 말씀하신다고 있기 때문이다.

20. 아니, 네 적이 주리거든 이에 먹을 것을 주라. 목말라 하거든 이에 마시게 하라. 그렇게 하 여, 너는 뜨거운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는 것임으로이다.

21. 너는 악에 지지 말라. 선으로서 악에 이기도록 하라.

 

 

14,

너희’ - 그리스도 신자에 대하여 말한다.

너희 천국의 시민 된 자는 이렇게 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들에게 적을 사랑함의 깊은 동기가 없다.

그들은 복수는 정당한 권리로 믿는다.

하지만 너희는 새로운 율법을 배운 자이다.

너희들 주안에서 무한한 재보를 하늘에 쌓는 자는, 이 세상 일에 관해서는

전연 양퇴의 길로 나갈 것이다.

 

박해하는 자’ - 너희가 신앙하는 까닭에, 너희들의 하는 바가 그들의 하는 바와

전연 그 취의를 달리하는 까닭에, 너희를 싫어하여 피하고,

또 너희가 다루기 쉽게 보아, 너희를 차서 넘어뜨리고,

너희에게 침 뱉는 것으로서 쾌락으로 삼는 자를 축복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 신자 생겨날 때, 비로소 박해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답게 약하고 무욕한 자가 나타나지 않는 동안은, 세상에 박해라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박해는, 신자에게 있어서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태어난 사실의 확증이다.

불신자에 있어서는, 그가 재생의 은혜에 참여할 수 없음을 자각함에서 되는 질투와 원한의 발표이다.

 

은혜 임할 때 박해 생겨난다. 은혜 없는 곳에 박해 없다.

세상에 소망스러운 것으로서 실은 박해만 한 것은 없다.

 

축복하라’ - 그 위에 행복을 기도하라.

다만 그 죄를 사하는 것으로서는 족하지 못하다,

나아가서 그가 행복하기를 기도하라. 그가, 하나님께 수납되기를 기도하라.

그가 회개하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거슬린 자,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는 자, 즉 박해자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너희를 복(은혜)에 참여하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복 받기를 기도하라고.

저주축복하라의 반대이다.

 

악사(惡事)가 그의 위에 떨어져 임하기를 기도하지 말라. 저주도 원수 갚음의 가장 세찬 것이다.

너희 그리스도 신자는 손으로서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할 것뿐 아니라, 또 마음에 있어서도 복수심을 가지지 말 것이다.

우리들은 생각에 있어서도, 행함에 있어서도, 전연 우리의 적을 용서하고, 다시 나아가 그 행복을 기도할 것이라고.

 

15, 동정(同情) 추찰(推察)의 마음을 양성하라. 그리고 먼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신자가 특히 할 일이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함은 불신자라고 해도 능히 이것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비애에 빠진 것을 보고, 자기가 남보다 훨씬 행복 됨을 알고서 기뻐한다.

 

세인의 소위 동정추찰이라는 것은, 깊이 그 근원을 찾아보면, 자존자족의 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연민은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오만이다.

은을 사람에게 파는 것이다. 자기의 번창을 사람에게 과시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은을 베풀지 않는 것보다 낫대 해도, 하지만 최상의 동정이라고 할 것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연민 이상이다. 이는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는데 그치지 않고서,

나아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고 뽐내지(자랑하지) 않는다.

사람의 경우 자기보다 나음을 보고 이것을 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이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사람의 입신을 듣고서 기뻐하는 것이다. 사람의 성공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위에 서게 됨을 알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 적을 천국에 옮긴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이 마음 없어서는 안 된다.

 

16,

서로에 대해’ - 모든 사람에 대하여, 특히 신앙의 형제자매에 대하여.

동일한 것을 생각하라’.

너희는 생각을 같이 하고, 애심을 같이 하며, 마음을 합하여 생각하는 것을 하나로 하라’(빌립보서 2:2)

 

너희는 자기의 일에 대하여 생각하듯, 또 형제의 일에 대하여 생각하라.

즉 너희의 생각에 자타의 차별 있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일은 형제의 일, 형제의 일은 자기의 일이어야 할 것이다.

너희의 행위는 자기에 대해서도 또 형제에 대해서도 다만 천편일률 이어야 할 것이다.

 

즉 사랑의 율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이면, 또 서로가 그 지체인 것이다’(12:5)

 

손의 욕구하는 바는 또 발이 욕구하는 바이고, 발이 구하는 바는 또 손이 구하는 바이다.

손과 발은 동일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너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도 또한 그렇게 할 것이다.

 

높은 생각을 가지지 말 것이다’ - 자기에 대하여 높은 생각을 가지지 말 것이다, 도리어 자기는 낮은데 처하도록 하라.

평화 일치를 결여하는 일로서 교만한 마음 같은 것은 없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고, 남은 모두 자기에게 씌어야 할 자로 생각할 때, 조화는 파괴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방기하고 하복이라는 각오를 하라.

사람에게 섬김 받으려 말고서 사람에게 쓰이도록 하라. 이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봉사를 사회에서 요구하고, 국가에서 요구하고, 가족에게서 요구할 때, 평화 일치는 바랄 수 없다.

 

가장주의에 의해 이룩된 동양의 국가에 온정화락이 잡힐 길 없음은, 그리스도의 이 마음에 있어서 결여 된 데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잠언 37절의 말로서 너희의 마음으로 하라.

 

자기와 자기의 가치를 정하지 말라. 하나님과 사람을 떠나서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라.

 

자기는 교회(그리스도의 몸)의 한 분자임을 잊지 말 것이다.

권리를 가짐과 동시에 또 의무를 지는 자임을 잊지 말 것이다.

권리를 가짐과 동시에 또 의무를 지는 자임을 기억할 것이다.

 

자기를 특별히 총명한 자, 특별히 고귀한 자로 생각하지 말 것이다.

 

사람 서로가 상이함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주시는 바의 은혜 따라 선물을 달리한다’(12:6)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자, 왕자가 아니다, 학자, 학자가 아니다,

각자 그 신앙의 양 따라’(믿음의 정도 따라)(12:6) 하나님과 동포 위해 힘쓰는 자일 뿐.

 

17,

누구에 대해서도’ - 신자에 대해서도 불신자에 대해서도, 내국인에 대해서도 외국인에 대해서도, 사람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너희들 그리스도의 종이며 천국의 시민인 자는 악으로서 악에 보복하지 말라고.

 

복수는 이 세상의 사람이 그것을 정당한 권리라고 보는 바의 것이지만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 신자는 이것을 죄악으로 볼 것이다.

 

세상에 소위, ‘그리스도 신자’, 영국인, 미국인, 노국인, 즉 교회 신자의 다수가 복수를 감행하고, 이것을 정의라 하고 인도라 하여 칭찬하는 일이 있지만도, 우리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임의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를 복종하여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직책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선하게 여기는 일’ - 뭇 사람의 눈으로 보아 선히 여기는 일은 힘써 이것을 할 것이다.

 

사람의 비평은 이것을 돌아 볼(생각할)것 못된다고 하지 말라. 생각할 것 못되는 비평 있고, 생각해 볼만한 비평 있다.

 

세상의 공평은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우리들은 완전에 달하기 위해 힘써 세상의 비평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주 앞에서 뿐 아니라 또 사람 앞에서도 바르기를 위함이다’(고린도후서 8:21)

 

18,

할 수 있는 한은’ - 평화는 만사를 희생해서라도 간직해야 할 것 아니다.

세상에 평화보다 더 귀중한 것 있다.

하지만은 할 수 있는 한은, 될 수 있는 한은, 모든 사람과 서로 화목할 것이다.

 

만약 우리들의 재산을 제공함으로서 평화를 보전할 수 있다면 이것을 보전할 것이다.

만약 주의 신앙 이외의 양퇴에 의해 이것을 유지할 수 있으면 이것을 유지하라.

 

너희로서는평화는 하는 수 없이 이것을 깨뜨리는 일 있대도, 너희로서는 이것을 깨뜨리지 말라.

너희로서는 언제나 평화의 수단으로 나가라. 만약 너희에 의해 화전 어느 것인가가 결정되어야 할 경우에 임하면, 너희는 반드시 화()로 결정하라. 너희는 어디까지나 평화의 사람이어라.

옳다, 가능한 한은,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서로 화목하라.

 

 

19,

사랑하는 자여’ -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소망과 간난을 함께 하는 자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라만약 원수 갚아야 할 것 있으면, 스스로 이것을 복수하지 말라.

이 세상의 법률에 있어서도 사인의 복수는 금지되어 있지 않은가?

 

네게 대적하는 자 위에 너 스스로 손을 대지 말 것이다.

물러가서 주의 노하심에 맡기라네 적은 이것을 네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

(하나님)은 유일의 정당한 재판인이시다.

 

벌하는 권리는 그에게만 속한다. 그의 노에 사분(私憤)이 뒤섞이는 일 없다.

그는 순애로서만 노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노하심에 저촉하여,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 차별되는 것이다.

너는, 스스로 원수 갚으려 하는가, 네 적은 영구히 네 적으로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너를 대신하여 네 원수를 갚을 것이다.

네 적은 그 죄를 뉘우쳐 마침내 너와 화해하기에 이를 것이다.

네 적을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은, 이는, 더욱 엄하게 그를 벌하시게 하렴에서가 아니라, 그를 정의의 재판에 붙여 그로 하여금 너와 화목케 하기 위해서이다.

 

기록하여’ - 구약성서에 이 말 없다. 이와 비슷한 것을 신명기 3235절이랄 수 있다.

바울 및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 말을 구약성서 이외의 어느 글()에서 인용한 것 같다(히브리서 10:30).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서에 한하지 않는다, 진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 기자는 자유로 성서 이외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에만 한정되지 않음을 증명했다.

 

원수를 갚는 것은 내게 있다’ - 복수는 내(하나님) 일이다.

 

사람 스스로가 할 일 아니다. (하나님)는 너희(사람)에 의하지 않으므로 악인을 벌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게 불이 있다, 또 물이 있다. 나는 또한 곧 사람의 양심을 책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검을 뽑아, (하나님)를 대신하여 네 적에 징별을 가한다 하지만, 나는 일찍이 그러한 대리를 너희에게 맡긴 일 없다. 나는 스스로 내 종인 모든 인류를 처치하는 것이다.

 

너희가 누구이기에 타인의 종을 심판하는가?

그가 혹은 서고 혹은 넘어지는 것은 그 주께 있는 것이다’(로마서 14:4)

 

하늘에 대신하여 불의를 친다고 칭하는 너희 자신의 손을 음미해 보라.

여기에 또 책망할 불의는 있지 않는가?

 

러므로 무릇 사람을 심판하는 자여, 너는, 핑계할 수 없다, 네가, 타인을 심판함은 바로 자기 죄를 정하는 일이다. 대저 심판하는 너희도 같은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2:1)

 

20,

아니이에 반하여 원수를 갚는데 반하여 네 적이 주리거든’ - 잠언 제2521, 22절에 의한다.

구약성서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라. 적에 대한 신약의 교훈은 구약의 그것과 다른 바 없다.

 

뜨거운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는 것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악에 보답함에 선으로서 하여, 네 적의 마음에 수치심을 일으키고, 그리하여 그의 회개를 촉구할 것이라고, 이는 이 말씀의 보통 해석이다.

 

혹은, 악에 보답함에 선으로서 하여, 악으로 하여금 일층 악하게 하여, 그리하여 일층 신속하게 네 적의 머리 위에 하나님의 노를 불러오도록 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숯은 불을 끌어당기기 위한 도화선이다. 하나님의 노에 저촉하여 뜨거워져, 정치하기 어려운 악인을 태워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필경 이는 그를 광정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는 불에서 피하여 나오는 것처럼, 드디어 구원받을 것이다’(고린도전서 3:15)

 

이자 어느 것으로 해석해도, 적에게 악의를 표하기 위한 뜻이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의 목적은 적인의 개전에 있다. 그 밖에 없다.

 

21,

악에 지지 말라’ - 악으로서 악을 갚는 것은, 악으로 이김이다. 즉 악의 자격을 받아 이에 대응함이다.

악의 자극은 선으로서 이를 무찌르지 않으면 안 된다. 악은 불같다. 불로서 불에 대하면 불은 더욱 더 맹렬해진다. 악의 불을 끄고자 하면 선한 물로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불을 끄는 길은 누구나 잘 이것을 안다. 하지만 악에 이기는 길은 지자(智者)도 잘 이것을 알지 못한다.

왈 징벌(懲罰), 왈 징계(懲戒)라고. 그리고 이것을 가하여 악은 더욱 더 그 맹위를 떨치게 된다.

 

악이 무서워하는 것은 악이 아니라 실은 선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기를 악의 손에 내어 주사, 악을 그 근본에서 꺾으셨다.

 

우리들 그의 제자 된 자도 또한 그를 본받아, 그의 위업을 협찬하여 악의 전멸을 도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