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거듭난 삶 2024. 10. 6.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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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락과 평강과 희망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로 하여금 성령의 힘으로 그 희망을 크게 하시기 위하여, 너희의 신앙에서 생겨나는 모든 희락(기쁨)과 평강(평안)을 충만케 해 주시기를 원한다’(로마서 15:13)

 

이것은 바울의 기원의 하나이다.

 

일독(一讀)하여 의미 명료를 결여하는 관() 있다 해도, 정독의 도를 거듭할 때, 그것이 깊은 신앙의 실험을 말하는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희망, 성령, 신앙, 희락, 평강 등, 그 사용하는 단어만을 본대도, 쉬 용이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원어에 따라 축자적으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희망의 하나남께서 미든 일에 의해 온갖 희락(즐거움)과 평강(평안)으로서

너희를 채워 주시기를. 이는 성령에 힘에 의해 희망으로서

너희를 충만케 하고 넘치게 해 주시기를 위함이다

 

첫째로, 주의를 끄는 것은 하나님의 명칭이다.

 

희망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통상인데, 희망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드물다.

 

희망으로 찬(충만한) 하나님, 또는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어느 것이든, 그리스도교는 특히 희망의 종교인 것으로서, 그 하나님은 특히 희망의 하나님이시다.

 

우주와 인류의 장래 결말에 대하여 실망치 않으시고, 그 완전한 구원을 기대하신다. 그 자신이 희망이신 까닭에 그는 우리들 그를 믿는 자에게 풍성하게 희망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종극에 대하여 실망치 않으시고 희망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알 때, 우리들은 자기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의 하나님실로 고맙고, 위안에 찬 명칭이다.

 

 

믿는 일에 의해이것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은 주시고, 사람은 믿고, 그리고 은혜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다.

 

()은 신앙적 생활의 발단이다.

먼저 믿는 일 없이, 신앙과 이에 따르는 모든 희락 또는 평강은 시작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입고자 함에 있어서, 사람은 다만 전연 수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도 역시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믿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신()은 제1로 신임이다.

 

자기의 무능을 깨달아 전연 이것을 그에게 맡기는 일이다.

자기는 없는 자로 되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내 전부를 해 주시는 일이다.

 

()은 뇌적 동작은 아니다. 심적 행동이다. 먼저 자기를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께 관한 모든 일을 믿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결과는 희락과 평강이다.

화역에 신앙에서 생겨나는 모든 희락과 평강이라고 있는 대로이다.

 

하나님께 자기를 맡길 때, 신자에게 모든 희락과 평강이 생기는 것이다.

다만 평강에 대해서 말한대도, 평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심령 내인 것과 밖의 것이 있다.

마음에 평안이 임할 때 교회에 평화가 임한다.

 

대저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평화의 하나님이시다’(고린도전서 14:33)

라고 있는 대로이다.

 

평화의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에 반드시 평강이 있다.

 

사람의 모든 생각하는 바에 지나는 평안’(빌립보 4:7참조)이 있다.

 

그러나 이는 믿는 것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희망의 하나님은 우리들이 자기를 그에게 맡기는 때, 모든 희락과 평강으로서 우리들을 채워 주시는 것이다.

 

은혜는 다만 약간 정도로 임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임하는 것이다. 채우는 것이다. 가득해지는 것이다.

 

믿는 일의 결과로서, 신자는, 희락이란 희락, 평강이라는 평강으로서 가득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약속의 말씀은 아니다. 허다한 신자에 의해 실험된 사실이다.

 

믿는 일의 결과는 희락과 평강으로서 그치지 않는다.

신 그것은 증대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되고, 평강 위에 희망은 더해지고, 마음을 채우는데 그치지 않고서, 그 중에 차고 넘치게 이른다. 여기에 명백한 진보가 있다.

 

()은 나아가(진보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되고, 평강은 나아가 희망으로 되고, 차는 일은 나아가서 차고 넘치기에 이른다.

 

대저 가진 자는 받게 되어(주어져) 더 있고도 남는다’(마태복음 13:12)

 

신앙에 따라 성령의 힘은 주어지고, 평강 위에 다시 희망은 가해지고, 그리고 채워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서 차고 넘치게 된다.

 

우리가 그(그리스도)에 의해 지금 있는 바의 은혜에 들어갈 수 있었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소망하여) 기뻐한다’(로마서 5:2)고 있음과 한가지이다.

 

여기에 희망이란, 그리스도 신자 특유의 희망(소망)이다. The hope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희망이다. 재림, 부활, 만물 부흥의 희망이다.

 

그저 다만 완전을 미래에 기대하는 희망은 아니다. 성서에 보여주는 바의 확실한 희망이다.

그리고 신자는 신앙의 진보 따라, 이 희망으로서 차고 넘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즉 희망은 신앙의 처음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최종의 미로서 임하는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달을 낳고, 연달은 희망을 낳고’(5:3-4)인 것으로서,

 

희망은 신앙생활 최종의 산물이다. 즉 그리스도 신자의 희망은 신앙을 떠나서 얻어지는 것 아니다.

믿고, 고생하고, 견디고, 희락과 평강을 맛보고, 그런 후에 최대 최후의 은사로서 그의 마음에 임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 때, 먼저 확실한 신앙의 실험을 거치지 않은 자가 그리스도 재림의 희망을 비웃을 자격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희망은 신앙의 보상으로서 하나님에게서 임하는 게시이다. 사색에 의해 얻어지는 사상은 아니다.

 

유대 종교사의 연구는 해박을 다한대도, 이에 의해 이 희망을 가지고서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믿는 일에 의해 모든 희락과 평강에 차고,

성령에 능력에 의해 희망에 차고 넘친다고 한다.

 

신앙에 성령이 가해져 희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신자의 희망 재림 부활의 희망 을 가지는데 성령의 힘이 필요하다.

 

이 힘을 감득할 때, 비로소 부활의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성령의 강림과 그리스도의 재림희망이 동시에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그의 고난에 참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을 얻기를’(3:10)이라는 바울의 말에 의해 이것을 알 수가 있다.

 

이른 바 신앙의 부활이라 하여, 신앙에 획연한 진보가 임하는 때, 성령의 힘을 확인하고, 재림부활을 강하게 감득하는 것은, 신앙상의 이 이유에 의하는 것이다.

 

믿어 기뻐하고, 화하고, 드디어 소망한다.

즉 신자의 보통 생활의 도인 신(), (), ()이다.

 

()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소망(所望)을 낳는다.

그리고 소망은 신을 강하게 하고, 사랑을 증가케 하며, 다시 또 소망을 크게 한다.

삼자매는 서로 돕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의 생장을 돕는다.

 

()은 신으로서 혼자 있지 않고, 반드시 사랑을 동반하여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사랑과 소망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또한 각자 혼자 설 수 없고, 하나는 반드시 이자의 원조를 필요로 한다.

 

특별한 신과 특별한 사랑과 특별한 소망과 삼자 서로 손을 잡고서 서는 것이 아니면,

그리스도 신자는 설 수 없는 것이다.

 

희망의 하나님, 믿는 것에 의해……’,

희락도 평강도 희망도, 기타 모든 은혜도, 모두 믿는 일에 의해 시작하고, 또 임하는 것이다.

 

()이 발단이다. ()이 시작이다. ()이 원천이다.

자기를 전부 하나님께 맡기는 일 이것 있을 때,

모든 은혜는 순을 따라 신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 결핍될 것인가,

신을 돌아보라. 사랑은 신의 결과로서 임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망이 생겨나지 않는가?

신을 돌아보라. 신 없이 소망은 생겨나지 않는다.

 

신이다. 신이다. 모든 선사(善事)의 원천은 신이다.

사랑을 사랑으로서 구하려 하지 말라.

소망은 소망으로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하여 사랑 있고, 사랑하여 소망 있는 것이다.

 

언제나 신의 본원에 돌아가, 사랑과 소망을 회복할 수 있다.

 

바울이 모름지기 특별히 이 말을 엮은 것은 아니리라.

이것은 아마도 그의 마음의 상시적 상태였으리라.

그러한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 나왔으리라.

 

그는 깊은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깊은 말이 절로 그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여, 너희는 이것을(새 하늘과 새 땅) 기다리면, 티도 없고, 흠도 없이, 주 앞에 안연하기를 (주로 말미암아 평강한 중에 발견되기를) 힘쓰라’(베드로후서 3:14)고 있다.

 

그리스도 신자 특유의 희망을 가지고서,

그 결과로서 생겨나는 특수한 평강을 받고 있는 동안에,

생각지 않은 때에 재림의 주께 발견되도록 힘쓰라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석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