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거듭난 삶 2019. 5. 3.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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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말씀

 

요한복음 1 1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세계 최대의 말씀은 신약성서 요한복음 1장의 1절에 있다.

 

말씀보다 것은 논어(8 9역주)에도, 맹자(1 4역주)에도, 고지끼에도, 법화경(8 46역주)에도, 플라톤에도, 아리스토텔레스에도, 단테에도 세익스피어에도, 괴테에도 없다.

 

이것은 실로 세계, 아니 우주 최대의 말씀인 것으로서, 말씀이야말로 실로 세상에 실을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아노라).

'처음에 있었다. 도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도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 원어로는 17문자인데, 일본역에서는 일본글자 모두 21문자이다.

그러나 의미를 음미 검토하면, 일자천금은 말할 것도 없고, 한자에 심원무량한 일대 진리가 담겨져 있다.

 

21문자를 완전하게 주해할 있는 성서학자는 세계에 없다. 오인은 여기서 오인이 해득(Comprehensicn) 다만 근소한 지리(知理) 독자 앞에 진술할 뿐이다.

'처음에'(태초에-한글역) 이것은 창세기 1 1절에 '태초에' 라고 있는 말이다.

 

'처음'에란, 우주만물이 아직 있기 전에 라는 뜻이다.

 

사람 아직 없고,

짐승 아직 없고,

아직 없고,

물고기 아직 없고,

바다 아직 없고,

아직 없고,

아직 없고,

성운(a nebula) 아직 미광(a faint light) 발하지 않고,

빛조차 아직 암흑 중에 빛나지 않는 ,

 

말씀(),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오랜 이야기인가!

역사 이전은 물론,

조화이전,

아직 공간도 시간도 없었던 때에……라는 뜻이다.

 

지나(支那) 오래고, 일본이 오래고, 이집트(Egypt) 오래고, 바벨론이 오래다 해도, 결코 이것만큼 오래지는 않다.

 

성서의 기사는 특히 요한복음의 기사는, 발단을 태고에서,

 

'처음'(태초)으로써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성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지를 잊어버려서는 된다.

 

성서는 '' 제한 없는 ()이다.

이것은 영원에서 시작하여 영원으로 끝나는 것이다.

'(말씀)가있었다

 

(말씀) 무엇인가?

도는 글자 그대로의 도리는 아니다.

도리는 이로서 죽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니, 살아계시는, 성격을 갖추신 분이신 것이다.

 

그러면 '말씀'이란 무엇인가?

 

'말씀' 영어의 익스프레션(expression)이다.

사상의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영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언어() 음향으로서 하는 사상의 표현이다.

그렇지만 음향만이 사상표현의 수단은 아니다.

 

우리들은 손짓으로서, 혹은 회화로서, 혹은 조각으로서, 우리들의 사상을 밖으로 나타낼 수가 있다.

 

그리고 마음 가운데 간직되어 있는 사상을 밖으로 나타내는 모든 수단을 이것을 칭하여 ''이라고 하는 것이다.

 

밀튼(Milton 1 120역주) 사상을 나타낸 것은 그가 새긴 조각물이다.

라피엘로(5 284) 사상을 나타낸 것은 그가 그린 회화이다.

그리하여 시문(詩文) 밀튼의 ''이고, 조각물은 미켈란젤로의 '', 회화는 라파엘로의 ''이다.

 

'' 언어에 한정되지 않는다.

 

마음을 밖으로 나타낸 , 이것이 ''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도 '(말씀)' 있다.

그에게도 또한 사상이 있고,

사랑이 있고, 지혜가 있고,

권능이 있으므로,

그도 역시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 말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는 어떠한 ''이어야 하는가?

언어인가? 언어도 물론 필요하다.

 

성서는 실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나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다.

언어에 더하여 무언가 실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천연이 그러한 실물인 것이고,

실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나내는 그의 ''이다.

 

바위도 나무도, 동물도, 인류도,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이다.

 

우리는 삼가 이것을 알아(읽고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원하기 한없는 사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성서와 천연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것은, 언어 이상, 천연 이상의 것이 아니어서는 된다.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시기 위해, 자기와 닮은, 그러면서도 자기를 떠난, 어떤 실재자를 필요로 하신다.

 

이것이 성서에 말하는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본체의 형사'(히브리서 1:3) 아니어서는 된다.

 

'나를 자는 아버지를 것이다'(요한복음 14:9)라고 있는 이가 아니어서는 된다.

 

하나님의 '말씀' 이렇지 않으면 된다.

이것 이하의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나타내기에 족하지 못하다.

 

'말씀' 언어이상, 언어를 발하시는 , 천연을 창조하시는 자가 아니어서는 된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도란, 도리도 아니려니와, 언어도 아니고, 언어를 설명하기 위한 실물도 아니다.

 

'' 적어도 성격(personality) 갖춘 자로서 사람과 같고, 하나님과 같은 자가 아니어서는 된다.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라

 

페르소나 성을 가진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성서는 결코 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만큼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가장 알기 쉬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창세기 1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있어,

하나님은 이미 있는 분으로서 기록되어 있다.

 

우주 있고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하나님 계시고서의 우주이므로,

만유 무엇을 가지고서도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실로 실재의 원리(The First Principle of Existince)이시다.

하나님은 실재하는 중에서 가장 확실한 이시다.

그리고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한다.

 

'함께 계셨다' 것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원어의 성서에는 가지의 다른 말씀이 '함께'라는 의미에 있어서 사용되어 있다.

 

1 sun(-)이라는 말인데,

마태복음 26 35절에 있는 베드로의 말에 '나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이라고 있는 것은 말이다.

 

경우에 있어서는, '함께' 행동을 함께 함의 뜻이다.

생애의 방침을 함께 한다는 때에는 반드시 말이 사용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의 이곳에 사용되어 있는 '함께',

행동을 함께 하는 의미의 '함께'라는 말은 아니다.

 

2 이것을 meta(메타)라고 한다.

마태복음 1 23절에, '임마누엘 이름을 풀이하면,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라고 있음은 말이다.

 

경우에 있어서는, '함께' 장소를 같이 한다는 뜻으로서,

거주의 지를 함께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라' '함께', '함께' 아니다.

 

3 para(파라)이다.

요한복음 14 17절에 '그가(성령) 너희와 함께 계시다……' 있음은 말이다.

 

경우에 있어서는, '함께', 곁에 있고 곁에 따라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라' '함께', '함께' 아니다.

 

4 여기서 쓰고 있는 말인데,

이것을 pros(프로스)라고 한다.

 

말은 극히 드물게 '함께' 번역되고 있다.

 

마태복음 13 56절에 '(예수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있는 아닌가' 있음은 말이다.

 

그러나 같은 말이 누가복음 1 19절에 있어서는 다만 '에게(대하여)' 되고 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가브리엘인데, 하나님 앞에 서는 자라. 네게 말하여 가쁜 소식……'이라고.

 

경우에 있어서는, 사람에 대하여 말한다는 뜻인데,

그와 함께 말한다고도 수가 있다.

 

고린도전서 13 12절에 말하는

 

' 때에는 얼굴을 맞대고 서로 보리라' 있는 것도 말이다.

 

이에 의해 이것을 보면,

 

',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 것은 어떠한 것일까?

 

단지 하나님과 행동을 함께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의미에 있어서는, 우리들 보통 신자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바의' (고린도후서6:1) 사람이다.

 

하나님과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의미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아니 계시는 곳이 없으므로, 그는 누구와도 함께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 곁에 있다는 것도 아니다.

의미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계신다고 약속하셨다.

 

'도가 하나님과 함께(pros)계시니라' 것은, 가장 깊고. 위권 있는 의미에 있어서 함께 계셨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와 상대하여 말한 것처럼,

 

(말씀) 하나님과 동등한 태도로서 교제하셨다는 뜻이 아니어서는 된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본다는 것이 말의 의미인 것으로서,

 

'(말씀) 하나님과 함께 (pros)계시니라' 것은

 

그는 하나님과 말하고, 사귀며 상의하셨다는 뜻이 아니어서는 된다.

 

 

'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라'.

 

예수, 아버지께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터를 놓기 전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나이다'(요한복음 17:24).

 

우주창조 이전부터의 하나님과의 교제,

이것을 하신 이가 ''(말씀)이시다.

나사렛의 예수이다.

 

어떠하다 이시랴!

어떠하다 신이시랴!

심원하고도 심원,

(occult)하고도 현묘,

헤아릴 없어라.

 

하지만 놀라운 사실 경한 . 찬미할 !

 

'도는 하나님이시라

 

이러한 실재자는 하나님이 아닐 없다.

그를 사람이라 없음은 물론,

그는 천사라 없고,

 

'지배'라거나 '권위'라거나 '권력'이라거나 '권세'라고도 칭할 없다

 

(에베소서 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아브라함이 없던 때에 이미 계셨던 이는 이를 하나님이라 칭하여 받드는 외에 적당한 호칭 있을 없다.

 

하나님의 '말씀' 신성을 갖춘 것으로서,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독자이시다.

 

하나님께 낳으신 이지,

그가 창조한 이는 아니시다.

 

하나님 있음과 동시에 있음으로서,

하나님의 무한하시듯 무한한 이시다.

 

하나님은 여하간 하나님과 (말씀)이다.

성부와 성자이시다.

 

그리고 아버지 있고 아들 있는 이상은, 이자 안에 성령이 있음은 필연이다.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오인이 일찍이 논술한 대로이다.

그리고 삼위의 하나님만이 자신으로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에 의해서만 만물은 창조되고, 속량된다.

 

원하옵기는 영광이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께 있으옵기를, -.

내촌감삼의 (190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