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거듭난 삶 2019. 7. 3.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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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을 기다리라

 

요한복음 6 39-40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한글개역)

 

44-45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한글개역)

 

 

나는 오늘까지에 많은 장식을 주관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번처럼 문제를 제공받은 일은 없었다.

과거 1 동안에 2녀를 잃고, 이제 후계자(an heir) 유일의 남아를 잃었다.

 

이는 세상에 절무한 것이라고는 없으나, 그러나 하나님께 신뢰하는 자에게 있어서 의문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없다.

 

예수는 일찍이 나인성의 문밖에서 과부의 외아들의 장식을 만나, 깊은 동정을 느껴 손수 (a coffin) 손대시고,

 

'소자(youth),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하시니, 사자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예수, 그를 어머니에게 건네 주셨다고 한다.

 

(누가복음 7:11-15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관에 손을 대시니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과연 그렇다면 그는 오늘 어찌하여 같은 과부의 외아들인 남아를 한가지로 일으켜 이를 어머니에게 건네주시지 않는 것일까?

 

여기에 풀지 않으면 의문이 있다.

 

재난은 불신자에게도 임하고 신자에게도 임한다.

하나님께 신뢰하는 까닭에 이것을 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신자의 뜨거운 기도를 듣고 흘러 버리시고, 사랑하는 외아들이라도 죽는 것을 보고야만 있게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사람이 악마의 손에 번론(mockery)되는 , 차가운 눈초리(냉안)로서 이를 간과하시는 것일까?

 

당초 하나님이란 전연 존재하지 않는 아닐까?

실로 그러한 희유의 고난에 조우할 , 사람은 무신론에 기울어지지 않을 없다.

 

하지만 의문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스스로 대답을 주시는 것이다. 말씀하시기를,

'무릇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는 것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다'(요한복음 6:39.일역)

 

'무릇 아들을 보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나는 이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6:40.일역)

 

'내게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릴 것이다'(6:44.일역)

 

'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이 있다. 내가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다'(6:54,일역)

 

그리스도는 말씀하신 것이다.

 

'잠시 악마로 하여금 마음대로 폭위(tyranny) 쓰게끔 하라.

죽음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를 데려 가게끔 하라.

하지만 너희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실패로 돌아가는 아니다.

기다리라.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라.

 

날에는 내가 나를 믿는 자를 모두 부활케 하여,

이를 너희 손에 건네 것이다.

최후의 성공은 내게 있다'.

 

옳다.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을 약속하실 특권이 있다.

 

믿기 어려운 약속도,

그의 입에서 나온 까닭에,

빈말(공연) 아닌 움직일 없는 진리임을 우리들은 믿는 것이다.

 

일찍이 어떤 노국(Russia) 장군이 터키병과 싸운 때의 일이다.

적군을 전멸하게 계략을 마련하여 이에 대했지만도,

소중한 수십 명의 부하병졸은 속속 적탄에 쓰러졌다.

 

상황을 보고 우려한 나머지 장군의 처치를 비난 하는 자가 있었다.

장군 대답하여 말하기를 '기다리'라고.

 

그리고 적군이 어느 곳까지 공격해 오자,

일제히 포열을 터뜨려 마침내 예정대로 이를 전멸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행동도 또한 이에 유사한 것이다.

그가, 강림하신 1900,

그동안 이미 천의 사람이 신앙으로서 쓰러졌다.

 

허다한 사람이 그의 처치를 나무랐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거시다.

 

'기다리라, 최후에 내가 다시 와서 일령 하에 그들을 부활케 것이다.

너희의 소망은 그때 모두 채워지리라'.

 

과부의 기도는 응답된다.

반드시 눈물은 모두 씻겨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훌륭히 승리를 거두시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즉시는 아니다.

때가 이르러서이다.

때가 이르면,

그는 신자에게 썩지 않을 영광의 몸을 주시고,

소망을 모두 채워 주신다.

 

나인의 과부의 실례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특히 목적에서 이를 실현하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가 지금 주어지는 아니다.

하지만 후에 반드시 돌려주신다.

크신 은혜는 미래에 있어서이다.

우리들은 다만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대저 신앙은 바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참으로 하는 것이다'(히브리서11:1.일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모두 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마지막 날에 가장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약속 있음으로써만이,

어떠한 재난에 조우한대도 이에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인생의 의의는 이것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크신 약속을 받고도 이를 바라지 않고,

도리어 하찮은 육체의 건강이라든가 장사의 번창을 구하는 자가 있을 있을 것인가?

 

저것과 이것( 가지) 대소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다.

 

만약 마지막 날에 부활과 영생이 주어진다면

세상에 있어서의 애자의 죽음이나 사업의 실패 같은 것은

이것을 참고도 남을 있는 일이다.

 

아니, 크신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자연의 정에 거슬리는 재난 많음을 마다 않고,

어떠한 불행도 오려면 오라,

 

우리들은 '기다리라'시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고

마지막 날의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여 스스로 위로 받는 것이다.

 

오늘 허다한 불의와 무자비는 세계를 뒤덮고 있다 해도,

신자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간직해) 품고서,

모든 회의에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

과부로서,

1 이내에 2 1남을 잃었다.

실로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다.

 

어떻게 하여 이를 위로할 것인가?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릴 것이라는 복음 이하의 것으로서는

도저히 이를 위로할 수가 없다.

 

다만 그가, 다시 오시는 ,

악마의 모든 세력은 멸해져 신자는 없는 영광에 참여하고,

사랑하는 자는 모두 다시 주어질 것이다.

날을 대망 함으로서 만이,

지금의 슬픔에 이겨 수가 있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