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거듭난 삶 2019. 7. 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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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위자(慰藉)

 

요한복음 6 39-40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54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울며 슬퍼하고, 크게 근심하는 소리가 라마에서 들려왔다. 라헬이 자식을 위해 울고, 자식들이 없으므로 위로를 얻을 없었다.'(마태복음 2:18)

 

'무릇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내가 하나라도 잃지 않고, 내가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다. 이같이 행함은 이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다'(요한복음 6:39)

 

'무릇 아들을 보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내가 마지막 날에 이르러 다시 살릴 것이다'(6:40)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능히 내게로 없다. 내게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다(6:44)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이 있다. 내가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다'(6:54)

 

 

죽음이 무엇인지는 이것을

타인의 죽음,

또는 인류의 죽음,

또는 생물의 죽음으로서 보아서는 알지 못한다.

 

죽음은 생명의 종식이다.

신진대사의 법칙이라고 해도,

죽음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학자로서 죽음은 흥미 많은 문제이다.

시인으로서 죽음에는 미적인 데가 있다.

 

죽음은 보통의 일이므로, 사람은 죽음에 접하여 놀라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 식산, 예술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일에 생각을 집중시키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개는 죽음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나날의 생애를 보낸다.

 

하지만, 타인의 일로서의 죽음,

인생의 당연한 일로서의 죽음에 대해서는 평연할 있지만,

죽음이 자기의 것으로서 오는 때에는 누구도 놀라지 않을 없다.

 

죽음은 먼데서 이것을 바라보는 것과,

목전 가까이 이에 접하는 것에,

따라서 사이에 커다란 차이(상위) 있다.

 

먼데서 바라보는 죽음은 그렇게 겁낼 것은 없다.

하지만 죽음이 몸을 내습해 오는 ,

그는 확실히 '공포의 '이다.

 

죽음이 최대의 것을 빼앗아 가는 ,

우리들은 그것이 실로 어떠한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우리들은 철학자의 죽음의 설명을 듣는 대도 위로 받을 없는 것이다.

시가(詩歌) 미술도 죽음의 슬픔을 덜게 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다.

'라헬이 자식을 슬퍼하고,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를 얻지 못하더라'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탄식),

아내를 잃은 남편의 슬픔,

이는 위로를 얻을 없는 슬픔이다.

 

우주 넓다고 해도 경우에 있어서의 죽음을

위로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낼 없는 것이다.

 

'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를 얻지 못하더라' 한다.

 

그러나 다만 가지 위로 얻는 길이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방법에 의해 사랑하는 자가 다시 있다면,

만약 지금은 눈을 감고, 입술을 다문 자가,

어떤 능력에 의해 살아나 다시 앞에 서서 나와 함께 말하며,

사랑을 받고, 내게 사랑을 준다면,

마디로써 이것을 말하면, 그가 만약 부활한다면,

그때는 나는 실로 위로를 얻어, 슬픔은 완전히 치유되는 것이다.

 

사람은 부활이라면 웃지만,

그러나 부활은 사별의 고통으로 고뇌하는 자에게 누구에게도 생겨나는 소원이다.

 

영구한 이별은 우리들이 참을 없는 일이다.

부활의 희망 없이, 재회의 기대 없이,

죽음은 '위로 얻을 없는' 고통이다.

부활의 욕망은 있다 하고,

부활은 확실히 있는 것일까?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죽음의 가시는 제거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사자(死者) 부활케 하는 술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죽어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울어도 아우성쳐도, 어떻게 없는 것이다.

 

부활은 겨우 인류의 꿈으로서만 있을 ,

실제로 없는 것이므로,

사람은 죽음에 조우하여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을 위로하는 술로서 다만 단념(체념) 가지 있는 것이다.

 

'어쩔 없다',

'하는 없다',

'누구에게나 오는 일이다'라고.

 

가련한 인류는,

문명진보를 자랑하고 과학과 예술을 자랑하며,

천연의 정복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이유 없는, 절망적인 체념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부활은 과연 없는 것일까?

 

사랑하는 자의 죽음에 조우하여 누구의 마음에도 자연(절로) 생기는 욕망에 응함의 사실은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류자연의 요구에 응하여 문제의 해결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르기를 ()

 

'부활은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이것은 행해졌다. 그리고 그로서 모든 그를 믿는 위에 이것은 행해지는 것이다. 부활의 희망은 결코 치자(a fool) 뇌리에 떠오르는 일시의 꿈은 아니다. 확실한 사실이다'라고.

 

성서의 말씀으로서 한다면,

 

'그리스도, 죽음을 멸하시고, 복음으로서, 생명과, 썩지 않을 (부활) 밝히 하셨도다'(디모데후서1:10)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을 슬퍼하는 인류자연의 요구는 완전하게 채워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시 물어 말하리라.

부활은 어떻게 하여 행해지는가,

어떠한 , 어떠한 방법에 의해 행해지는 가고.

 

그리고 물음에 답하여 예수는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마지막 날에 이것을 다시 살릴 것이다' 라고.

 

그는 일시에 거듭하여 말씀을 발하신 것이다.

 

내가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이라고.

 

모두 무계 있는 말씀이다.

부활의 사실은 예수의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능력이 충실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늘 가운데, 위의 모든 권력을 받으셨다고 하신 ,

세상에 있는 동안에 사자를 다시 살리신 실험을 가지신 ,

기타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을 행하신 ,

, 인류를 향상케 하시는데 있어서 역사상 최대의 능력이신 ,

우리들 그를 믿는 자의 마음에 있어서 누구도 아무도 없는 도덕적 변화를 성취하신 ,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 우리들의 구원자이신 ,

예수 그리스도가 사자를 다시 살리신다는 것이다.

 

사자를 다시 살림의 약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술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라든가, 바울이라든가, 요한이라든가 하는 사람이 기적을 행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것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무어 이상한 없는 것이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시신 등에게 물어 말했다.

 

'하나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고 해도, 너희가 어찌 믿기 어렵다고 하는가'(사도행전26:8) .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아들로서 사자를 다시 살리신다는 것이다.

이는 믿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이라든가, 누가복음이라든가, 4복음의 어느 것을 읽고서

예수가 어떤 분이 신지를 안다면,

그가 사자를 다시 살리신다고 들어도 사람은 별로 괴이해 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의 능력과 유화와 겸손과 무사로서 사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불가능은 아니다.

예수를 모르고 부활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를 , 부활의 대기적도,

있을 일로서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살릴 것이다

 

다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산다' 것은 황천에서 돌아오는 일이다.

 

사자가 본래의 육체를 가지고서 부활하는 일이다.

 

하지만, 성서에서 말하는 '다시 살아나는 ',

그저 육체의 부활을 말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아나스타시스 anastasis' '일어난다' 뜻이다.

 

한번 죽은 자의 갱생에 그치지 않는다.

본래부터 죽은 자가 새로 태어남도 말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부활은 갱생에 신생을 더한 것이다.

 

우리들은 죽었다가 다시 본래의 몸으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위에 다시 생명이 더해지는 일이다.

 

부활은 생명의 진화이다.

신발전이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하는 바로 되어 비로소 참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몸은 이는 바울이 말하는바

 

'죽음의 '(로마서7:24)이다.

 

영광 있는 부활체에 비교하여 사체동양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써 마지막 날에 신자에게 주시는 몸은 썩을 육의 몸은 아니다.

 

'썩을 것으로 심어지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 난바 되며, 존귀하지 않은 것으로 심겨지고, 영광 있는 것으로 다시 살아난바 된다'(고린도전서15:42-43) 있음은 이것이다.

 

'다시 살아난다' 것은 새로이 지음 받는다는 것이다.

 

문자는 이로써 사실을 나타내기에 족하지 못하다.

우리들은 '다시 살아난바 된다' 듣고서,

썩을 육체로서 다시 지상에 보내질 것으로 생각해서는 된다.

'마지막 날에

 

어찌하여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 되고,

지금 다시 살리신 되지 않는가?

 

예수께 만약 사자를 다시 살릴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찌하여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는 일없이, 지금 여기서 살릴 수가 없는가?

 

그는 그의 친구 나사로를 자매 우인의 면전에서 다시 살리셨다고 있는 아닌가고(요한복음 11).

 

이는 당연히 일어나야 의문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의 죽음에 조우하여,

우리는 의문이 우리들의 흉중에 솟아나옴을 금할 없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다만 ' 미래에 있어서'라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이란 세상이 완전한 역에 달한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나타남 있어서,

 

' 죽음 없고, 슬픔, 탄식, 아픔 있는 없다'(요한 계시록21:4) 하는 즐거움,

아름다운 상태에 달한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써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천지의 준비가 이룩된 새벽(그때) 이것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죽음 있고, 슬픔, 탄식, 아픔 있는 세상에 지금 다시 살아났다 해도,

사자는 다시 인생의 모든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미 1 이것을 자가 어찌 다시 이것을 되풀이 필요 있으랴이다.

 

죽음은 이것을 맛보면 충분하다.

무엇을 택하여 다시 세상에 돌아와,

다시 눈물의 골짜기를 더듬고,

다시 죽음의 강을 건널 것이랴!

 

지금 여기서 사자를 다시 살리는 것은 무자비 이것보다 것은 없다.

사자로 하여금 고요히 잠들게 하라.

그가 다시 때는 세상에 죽음과 눈물이 자취를 끊을 때가 되게 하시라.

 

부활은 마지막 날에 있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면 은혜는 아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사자를 다시 살리시어 그로 하여금 다시 죽음의 잔을 마시게끔 하시는 같은 무자비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는 사자 이를 마지막 날에 부활케 하시어,

그의 크신 자비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내심에 알맞은 외계 있을 때야말로 생명은 최대의 행복인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입고,

거룩해져, 속함 받은 영이 거룩하고 썩지 않는 몸으로서,

개조된 천지에 다시 태어남으로서만이 참된 행복은 누려지는 것이다.

 

내가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이,

정비되어 하나님의 곳을 나와서 하늘에서 내려와,

다시 죽음 없고, 슬픔, 탄식, 아픔 없기에 이른 ,

 

그를 믿고 그에게 의뢰하는 자에게 새롭게 생명을 부어주시어,

그로 하여금 죽음에서 일어나게 하시고,

영광 있는 썩지 않는 몸으로서 신천지에 영생하게 하신다고.

확실한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진 있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사랑하는 자의 죽음에 접하여 울지 않는 것이다.

 

라헬은 자식을 잃었다가 위로를 얻어 감사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