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거듭난 삶 2019. 7. 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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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역시 가려고 하느냐

 

요한복음 6 66-71 :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신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자러라.

 

요한복음 6장은 복음서 ,

예수의 갈릴리 전도를 기록한 유일의 장이다.

그러나 중에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세상 사람과의 관계가 명백해진 것이다.

이때까지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동기에서 예수를 믿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힘입어 로마에서 독립하고 그리하여 유대왕국을 건설하려는 애국적 정신에서 그를 믿었다. 12제자의 1인인 가나안의 시몬(9 177역주)같은 이는 일례이다.

가나안이란 지명이 아니라, 가나당 애국당 또는 독립당을 말함이다.

당파에 속한 시몬은 전혀 정치상의 동기에서 그에게 따른 것이었다.

 

어떤 이는 오늘의 사회주의자같이,

예수로 말미암아 사회인생의 모든 질고를 씻어버리려고

그에게 자도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예수 안에서 완전한 도덕을 얻고, 하나님 앞에 오예(부정)없는 자로 되고자 하는 윤리상의 동기에서 자도 있었으리라.

 

심지어는, 본장의 처음 기록된 디베랴 호반의 예수의 기적(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마리로서 5천명을 먹이심) 보고, 단지 예수께 의뢰하여 육의 구제를 받으려 자도 많았을 것을 헤아려 수가 있다.

 

실로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고 하지만 동기는 구구하여 하나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 있어서 그들은 모두 실망했다.

 

예수가 자기의 천직이 무엇인가를 보이신 , 그들은 모두 실망했던 것이다.

 

'만약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이 있다. 내가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라'(6:53) 듣고서,

 

그들은 예수에 의해 하나도 자기의 목적을 이룰 없음을 발견했다.

 

예수께서 것은 국가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애국자의 실망이었다. 세상을 개량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는 사회개량가의 실망이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 없다.

 

이는 도덕가의 실망이었다.

 

하물며 빵과 고기를 구한자의 실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 가고 사람 가고 드디어 거의 가버렸던 것이다.

 

예수는 이것을 보고 실망하셨던가?

 

아니 '너희도 역시 가고자 하느냐'.

 

이는 실망의 소리처럼 들리면서 실은 그렇지가 않다. 번역에 조금 잘못이 있다.

 

'너희도 역시 가려 하느냐' 아니라,

'너희도 역시 가려고 생각하지 않느냐'이다.

 

예수 자신에게서 퇴거를 촉구하신 것이다. 너희도 어찌 가지 않으랴고.

너희도 결국 나의 영적 가르침을 해득하지 못하고, 그래 너희도 역시 그들과 같이 떠나가지 않으랴고.

 

이는 예수의 진의였다.

예수는 인망에 의해 자기의 신앙을 유지하지 않으신다.

예수는 홀로 서서 사업을 이룩하신다.

반드시 12사도의 도움을 요구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다한 사람이 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도 퇴거를 촉구하셨다.

그러나 이때 제자 중에는 참된 신앙의 맹아가 있었다.

 

베드로는 제자를 대표하여 말했다.

 

'주여, 우리가 뉘게 가오리이까?

한없는 생명의 말씀을 가지신 이는 당신이니이다'(6:68) .

 

말은 예수께 적지 않은 만족을 드렸다.

하지만, 말을 듣는 때에도, 12 중에 마저 아직 일인의 악마 있음을 간과하지 않으셨다.

 

'내가 너희 12인을 택한 아니냐. 하지만 중의 일인은 악마이다' 라고.

 

것이다.

예수의 안중 그의 가르치심을 해득한자가 얼마나 소수였는지를.

스스로 해득한 것으로 생각한 중에도, 그를 적에게 넘겨주려는 악마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와 세상과의 격절은 소양(素養) 차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묵은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오늘에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같은 일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져서부터 아직 60년에 불과하지만도, 이미 다수의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었다.

교회에 명부에 기록되어 있는 신자의 수만으로서 해도 결코 적지 않다.

기타, 숨은 신자까지 합쳐 계수한다면, 아마도 2, 30만에 달하리라.

 

하지만, 그들 다수의 신자 , 오늘 참으로 예수를 믿고 세상에 주저하는 없이

 

'나는 예수의 종이라' 표백할 있는 , 과연 얼마일까?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지만 많은 사람이 그를 버린 것이다.

 

그들이 처음 예수를 믿은 동기는 여러 가지였다.

그리스도교에 의해 일본국을 세계 1 되게 하려는 애국적 동기에서 믿는 자도 많았다.

이에 의해 부패된 사회를 구제하고 인사 만반의 개선을 꾀하려 하는 사회적 동기로 나온 자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구래의 도덕으로서는 개인의 이상을 달성할 없음으로 예수의 완전 고결한 가르치심에 따라 자기 몸을 정결히 하려는 도덕적 정신에서 하는 자도 있었다.

기타, 혹은 육의 은혜를 입으려는 수다한 계급도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국인 중에 있었다는 것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은폐할 아니다.

선교사의 천려(imprudence)에서 빨리 신자를 만들기 위해, 자선으로서 사람을 권유한 실례는 적지 않은 것이다.

 

혹은 선교사에 의해 서양의 학문지식을 흡입(nhalation)하려 많은 청년 학생도 있었다.

그처럼, 그들이 예수께로 동기는 여러 가지로 잡다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주시려 것은 얻기 위해 그를 믿은 자란 극히 요구한 바가 있었다.

그들은 드디어 예수의 가르치심이 자기의 요구에 알맞지 않음을 알았다.

 

예수께 의뢰하여 반드시 나라가 흥하지 않고,

반드시 사회가 개량되지 않고,

반드시 일약 성인군자로 되지 않고,

몸의 행복 지식 그로 말미암아 획득하는 아님을 알았다.

 

그들은 이에 실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복음에서 물러났다.

수다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수다한 사람이 그를 떠났던 것이다.

장부상으로는 많은 신자를 가진 교회도 출석자는 극히 소수인 상태를 보이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을 보신 예수는 아마도 지금도 남아있는 우리들 소수자에게 향하여,

 

'너희도 또한 가고자 하느냐' 퇴거를 촉구하실 지도 모른다.

 

우리도 비애의 정을 금치 못할 것이다.

다수의 형제는 이미 우리를 남기고 가버렸다.

그리고 지금 우리 자신의 신앙마저 매우 위험상태에 있는 , 갑자기

 

'너희도 어찌하여 떠나가지 않느냐'

 

예수의 최고의 음성을 듣고서는, 실제에 있어서 우리들도 떠나 버리고 싶어지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물러가 생각하건대, 우리가 그를 떠나 누구에게로 가야 것인가?

혹은 묵은 공자로 돌아갈 것인가?

사람은 자칫하면 말한다.

 

'공자는 그리스도에 비하여 훨씬 실제적이다. 특히 우리들 동양인의 사상에 적합하다. 그리스도를 승상 하는 나머지 공자를 떨어뜨려 낮추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유교로 태어난 우리들은 유교로 돌아가야 것이다'라고.

 

그러나 우리들은 아는 것이다.

유교가 우리들에게 주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주는 것과 비할 것도 아님을.

 

가령 죽음의 문제를 취하여 것인가?

 

이는 누구나 조우하지 않을 없는 가장 확실한 인생문제이다. 그런데 공자는 말한다.

 

'아직 생을 모른다, 어찌 죽음을 알랴'.

 

말을 가지고서 죽음에 대하는 , 우리들은 자기를 위로 없다.

물론 죽으려는 타인을 위로 수가 없다.

 

죽음에 대하여 유교의 가르침은 전연 세력이다.

기타에 이르러서도 모두 거의 마찬가지이다.

유교는 실제적이라고 하지만도, 천박함이란 도저히 그리스도교와 같은 표준으로 생각할 없는 비교도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예수를 떠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공자로 돌아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는 어떤가?

 

불교는 철학적이다. 불교는 심원하고 복잡한 사색을 만족하게 한다.

나도 근래 불교를 연구해 보았다.

하지만 결과, 나는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불교에 가는 것이 불가능임을 발견했다.

 

나로서 만약 불교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토종(-2 208역주 참조) 또는 정토진종(-796역주 참조)이리라.

 

이는 타력주의와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르침이 혹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 삼아 정토진종의 의거하는 삼부경을 펴서 이것을 신약성서의 요한복음 또는 로마서와 대비할 것인가?

 

누구나가 유치함에 놀라리라.

정토종 정토진종이 의거하여 서는 바는 다만 무량수경중, 법장비구의 48 중의 18 있을 뿐이다. 이는 대종파가 파유하는 유일한 은혜스런 말이다.

그런데 보라. 신약성서 중에는 이런 종류의 말은 어디에라도 두어져 있다.

 

그러한 한마디 말에서 불타의 자비를 구한 호넹, 신랑(-5 414역주 참조) 심심을 살필 때는 동정을 금할 없다. 건물은 광대하지만도 기초는 실로 미약하다.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바는 훨씬 넓고 보다 깊은 데가 있다.

단지 자비의 가지로서 본대도, 참으로 인심을 만족케 하는 가르치심은 불교에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에 이르러 어찌 신약성서를 버리고 삼부경에 돌아갈 있으랴!

그러면 혹은 사회주의에 돌아갈 것인가?

혹은 니체로 돌아갈까?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못된다.

 

니체, 그는, 누구인가?

한마디로서 이것을 설명 수가 있다.

복음을 버리고 본래의 묵은 윤리로 돌아간 , 이것이 니체이다.

 

율법을 폐하고 은혜에 의지한 바울을 배척하여, 율법으로서 가장 귀하다 하고,

율법을 파괴하는 것은 인생을 파괴함이라고 한다.

 

니체는 아직 그리스도교의 근본을 모르는 것이다. 어찌 우리가 그에게 돌아 있으랴!

 

기타, 논해오면 오늘 제공되는 신구의 제교, 하나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나의 말을 기다릴 없이 제군 자신, 이미 느낀 바이리라.

그러므로 예수를 떠난 자는 심중에 언제나 적요(lonely)금할 없음을 느끼는 것이다.

종종 지난날을 회상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베드로가 말한대로

 

'내가, 주를 떠나서 누구에게로 가리이까'이다.

 

영생의 말씀을 가진 이는 예수이다.

인심에 가장 깊은 곳에 만족을 주는 이는 예수이다.

인심에 가장 깊은 곳에 만족을 주는 이는 그를 두고서는 달리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숙고해야 것이다.

그에게 실망한 것은 사람의 죄는 아니다. 그에 대한 오해의 죄이다.

그가 주시려는 최대 최미의 것을 얻으려 않고서, 그저 부산물만을 기대한 죄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그의 살이다. 그의 피이다.

이것을 마시고 이를 먹음으로서 생명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서 그를 믿는 자는 다시 그를 떠날 없다.

뿐만 아니라, 앞서 기대한 모든 선한 것도 또한 간접으로 임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로지 권한다.

차제에 숙고(熟考)하여,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그의 충실한 종으로 되어 영생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기를.

 

제군이 떠난 죄는 반드시 이것을 제군에게만 돌려야 것은 아니다.

힐책의 일반은 교사 자신 이것을 나누어야 할찌도 모른다.

교사의 언행이 제군으로 하여금 실족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교사된 자의 깊이 뉘우쳐야 일이다.

 

특히 복음을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 제공하지 않고서 속화로서 것이 요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책할 때는 아니다.

지금은 다만 예수께서 제공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명백하게 알아 다시 그에게 와서 구원에 참여해야 때이다.

 

(이상 강연이 끝난, , 오래된 신자의 실험담을 듣고, 다시 다음의 주의를 부언했다.)

제군의 이야기를 듣고서 거슬리게 느껴지는 말이 둘이 있다.

 

첫째는 '(자기)'라는 말이다.

'' 믿고 '' 힘쓰고 '' 노력이 부족하여 '' 신앙을 버렸다고 한다.

 

실로 신앙이 '자기'것인 들려진다.

생각건대 제군에게서 신앙이 퇴각한 주된 이유는 거기에 있었으리라.

 

'(자기)'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전부는 하나님께서 행해주시는 것이다.

 

'(자기)' 없이 하는 , 이는 신앙의 시초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대신하여 전부를 행해주신다는 , 이는 신자의 생애이다.

 

'(자기)'라고 하기를 그만두고,

'하나님'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스도'라고 하기에 이르면,

필경 새로운 신앙이 생기리라.

 

그리스도교를 도덕으로 보고서 '(자기)' 노력에 기대하면 누구나가 실망으로 끝마치지 않을 없다.

 

바울, 루터라 해도, 자기에게 의뢰했다면 일찍이 그리스도를 버렸으리라.

그들의 위대한 사업은 전적으로 '하나님' 의뢰했기 까닭에 이룩되었던 것이다.

신앙은 인격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들 중에 가장 약한 자가 참된 신앙을 획득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교'라고 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고조하는 일이다.

 

제군이 믿는 것은 모두 '가르침'이다.

'가르침' 주의이다. 문자이다. 의문이다. 사물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에 생명은 없는 것이다.

 

복음은 '가르침' 또는 의문을 기초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에게 인도해 주심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자기) 가르침은 아니다.

(자기) 사람(인격 persona)이다.

 

그리스도라는 ,

지금 살아계시는, 능력 있는,

우주 만물을 자기 손에 장악하신 동시에

우리에게 무한한 동정을 기울이시는 친구를 가지는 일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리스도교를 목표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그치고 그리스도 신자이고자 하면,

반드시 신앙 일변하리라.

 

오늘까지의 제군의 실패의 원인은 어쩌면 거기에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문자의 구별은 미소하다. 그러나 사실은 천지의 차이다.

 

* 내촌감삼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