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거듭난 삶 2019. 7. 18.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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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종교가

성선(聖善) 승리

 

요한복음 8 2-11 :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나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한글개역)

 

 

새벽녁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왔다.

그는 앉아 그들을 가르치셨다.

 

이때 간음하다가 잡힌 부인이 있었는데, 학자와 바리새인이 이를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모인 무리 가운데 세워 놓고 말하기를

 

선생이여, 부인은 간음을 행하다가 잡힌 자니이다. 이런 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모세는 율법 중에 명했나이다.

 

당신은 어떻게 말할 것인지요?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얻으렴 에서 였다.

 

예수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이 재촉하여 물으니, 예수 일어나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 없는 , 먼저 돌로 그녀를 치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몸을 굽혀 땅에 썼다.

그들이 이것을 듣고, 노인을 비롯하여 젊은 사람까지 사람 사람 물러가고, 다만 예수만 남으셨다.

 

부인은 가운데 두어진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예수 일어나 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고소한 , 어디로 갔느냐, 죄를 정하는 (정죄하는) 없느냐.

 

부인이 말하기를,

 

주여, 아무도 없나이다.

 

예수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도 또한 죄를 정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8:2-11).

 

 

이것은 어떻게 보아도 일폭의 그림이다. 하지만 화가의 상상으로 이룩된 그림이 아니다.

 

사실을 보여주지 않으면 어떠한 화가라 해도 같은 명화를 그릴 수는 없다. 취향이 전연 초인적이다.

 

'이때까지 사람같이 말한 사람 없었다'(7:46) 것이다.

 

여기에 예수의 인품(인격 character) 밝히 그려 내어져 있다. 예수는 그런 분이었다고 , 이를 읽는 누구나 놀라고 탄상하지 않을 없다.

 

신약성서는 다수의 소복음서로 이룩된 복음서인데, 일편 같은 ,

이것을 복음의 축사로서 수가 있다.

 

만약 이편만이 남아 있었다고 해도, 예수의 감화는 영구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오인의 신앙을 위에 쌓을 수가 있다.

주의를 끄는 것은 학자와 바리새인의 태도이다.

그들은 종교전문가 였는데, 마음의 냉담 잔인함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들은 죄를 범한 부인을 보고 그녀에 대하여 아무런 동정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면 그녀가 범한 죄를 미워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의 안중, 없고, 죄인 없으며, 다만 교적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연약한 죄의 부인을 잡아다가, 그들의 교적 예수를 책잡음의 도구로 썼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를 군집 중에 끌어내어 구경거리로 삼는 잔인을 감행했다.

무정 무자비!

 

하지만 종교 전문가의 종교는 종종 여기까지 타락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서에 밝다. 해석, 정통파적(orthodox)이다.

하지만 죄인에 대하여 얼마나 무자비한지!

 

그들의 종교는 성서를 이끌어다가 자기를 의로 하여 교적을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교육가가 교육칙어를 이끌어다가 동료를 책잡고 지위를 빼앗고서 쾌재를 부르는 유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문제를 제출 받아, 예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현행범인 간음죄를 다루어 판단하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기질에 맞지 않는 문제였다.

만약 범인을 구하라고 하는 것이었다면 예수는 기꺼이 이에 응했으리라.

하지만도 언짢은 사람들에 의해 제출된 언짢은 문제에 대하여 예수는 침묵 외에 취할 없었다.

 

특히 타인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간음은 부끄럽게 여길 , 공개 취급할 아니다.

 

'모든 것을 덮는다'(고린도전서 13:7) 것은, 특히 간음죄에 대하여 가르침이다.

 

예수가 죄를 면전에 제시받아 일종의 수치를 느끼셨음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는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 쓰셨다고 있음은 실로 그분다운 바가 있다.

 

다수의 주해자는 예수는 특히 십계의 하나인 '너는 간음하지 말라' 쓰셨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주 의심스러운 있다.

 

수치스러운 문제를 제시받고 아주 난처(embarrassment)스러운 상태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손가는 대로 쓰셨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생각된다.

당혹한 나머지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보신 것이다.

 

그런데 종교전문가들은 다시 질문으로 예수께 다가서서 그로 하여금 무엇인가 마디 대답하지 않을 없게 하였다. 여기서 그는 부득불 몸을 일으켜, 다만 마디 그들에게 하셨다.

 

'너희 , 없는 , 먼저 돌로 그녀를 치라'.

 

예수는 여기서 학자와 바리새인을 부끄럽게 만드시렴에서 말을 발하셨을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누구에게 대해서도 악의를 품지 않으셨다. 그의 교적에 대해서도, 호의 외에 아무 표시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경우에 있어서 그가 누구에 대해서도 발할 있는 오직 마디였다. 순수하신 예수는 경우에 이것 외에 달리 말할 것을 가지지 않으셨다.

그런데 순수하신 이의 순수한 일언이 경이를 이룬 것이다.

청결은 청결을 불러일으킨다.

예수의 말에 접하여, 정평 있는 유다의 종교전문가도 본심에 돌아섰던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심판할 있는 자가 아니다.

사람이라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이다.

죄인이 어찌 죄인을 심판할 있으랴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기이다. 본심이다.

 

그러므로 종교가들은 사람 가고 사람 가버려, 마침내 군중은 사람 남지 않고 그림자를 감추었다.

 

남은 이는 예수와, 죄를 고소당한 가련한 부인, 하나님의 아들 앞에 군집 전부가 정기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고, 여기에 신성한 장면은 현출 것이다.

()-일본 성서에는, , 개정 모두 '양심에 가책되어'라고 있는데, 그것은 미국 개정역 동양, 없이하는 것이 옳다. 이것 없이하는 편이 도리어 의미를 깊게 한다.

 

반드시 양심에 가책되어서가 아니다. 자기의 잘못을 알아차리고서이다.

 

예수는 바리새인이라 해도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경우에 있어서도, 자신의 성선성으로서 그들의 마음 (심령 ) 잠든 선성(善性) 불러 일으키셨다고 생각한다. 그러함으로서만이 그는 모든 사람의 구주시라고 생각한다.

군집 모두 흩어져가고, 남은 것은 예수와 부인과 다만 사람,

야곱의 우물 곁에서 그가 사마리아 여인과 상대하여 있을 때와 마찬가지이다.

 

예수 어떻게 부정해진 부인을 취급하셨던가? 이는 누구나 알고자 하는 바이다.

 

그는 차근차근 그녀의 부정행위를 깨우쳤을까?

그녀에게 '청결' 말씀하셨을 것인지?

혹은 또는 엄하게 그녀를 힐책하셨을지?

사람인 교사는 그렇게 그녀를 취급했으리라.

하지만도 예수에게는 예수의 길이 있었다.

 

'예수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도 또한 죄를 정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

 

하나님이신 교사가 아니고서는 발할 없는 말씀이시다.

뜻은 해특하기에 너무 면백하면서 너무 심원하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류와의 관계가 표시되었다.

여기서 개혁이 세계에 임했다, 종교윤리가 새로운 기초 위에 놓여졌다.

 

학자와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시험하려고 부인을 끌어 가지고 와서, 그에게서 진리를 끌어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사람을 죄로 정하지 않으신다.

인류의 죄는 이미 하나님의 면전에서 제거되었다.

 

이제부터 이후, 만약 사람이 죄로 인하여 멸망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죄를 택하여 망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벌하셨음으로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여 인류의 죄는 충분히 이것을 벌하셨다.

벌은 이미 끝난 것이다.

 

이제부터 이후는 다만 사유와 은혜가 있을 뿐이다.

 

'나도 또한 너를 죄로 정하지 않는다'.

 

아아 예수님,

나는 말씀을 듣고 안심하나이다.

주님 당신께서 나를 죄로 정하시지 않는 이상,

악마는 물론,

교회의 법왕도 감독도 집사도 목사도 선교사도 나를 죄로 정할 수는 없나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상,

나도 사람을 판단해서는 되오리이다.

하나님은 같은 자에게 가장 적합한 구주이십니다.

감사입니다.

 

(로마서 8:33 이하 -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내촌감삼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