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된 예루살렘
이사야서 4장 1-6절 :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의 빵을 먹으며 우리의 옷을 입으리니 다만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불려서 우리의 수치를 없애게 하라, 하리라.
2) 그 날에 주의 가지가 아름답고 영화롭게 되며 또 땅의 열매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들을 위하여 심히 좋고 아름답게 되리라.
3) 시온에 남은 자,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살아 있는 자들 중에서 기록된 모든 자는 거룩하다고 불리리니
4) 이때에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불태우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어 내시며 예루살렘의 한가운데로부터 그것의 피를 깨끗이 제거하시리라.
5) 또 주께서 시온 산의 모든 거처와 시온의 집회들 위에 낮에는 구름과 연기를 창조하시고 밤에는 타오르는 불빛을 창조하시리니 모든 영광 위에 방벽이 있으리라.
6) 또 장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며 폭풍우와 비를 피하는 피난처와 은신처가 되리라(한글 KJV)
이상의 예루살렘에 대하여,
실제의 예루살렘이 있었다.
이상은 아름다운 데가 있음에 대하여,
실제는 추한 데가 있었다.
실제를 보고서 예언자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크신 심판이 임할 것임을 예언했다.
실제의 예루살렘은,
존귀한 것도, 비천한 것도,
남자도 여자도, 보존됨의 필요 없는 데까지에 부패했다.
이사야는 아무런 고려하는 바 없이,
마음껏 당시의 유다와 예루살렘을 저주했다.
하지만 실망은 절망이 아니었다.
심판은 섬멸을 의미하지 않았다.
심판은 정화되는 일이었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진멸하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구조하기 위한 심판 이었다.
거기에 예언자 이사야의 강한 신앙이 있었다.
그는 그 장자를 이름 지어 ‘스알야숩’이라고 했다.
(7:3 그때에 주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이제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세탁공의 밭의 큰길에 있는 위 연못의 수로 끝으로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이것을 역하면, ‘남은 자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이다.
다시 이것을 설명하면
‘그 남은 자,
야곱의 남은 자는 대능의 하나님께로 돌아 올 것이라’(10:21 일역)는 뜻이었다.
즉 심판되어,
좋다(선하다)고 인정되어 남은 자는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 은혜에 참여하리라는 것이다.
심판을 그 일면에서 보면 이것이다.
남은 자가 나타나기 위해서이다.
찌끼(가스)가 소진되고, 순은만이 남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뽑은 백성은,
모두가 가스는 아니었다.
그중에 확실히 순은이 있었다.
‘내가 아주 너를 멸하지 아니하였었노라’(겔 20:17; 레 26:44등 참조)고,
그는 몇 번이나 예언자로써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분노에 언제나 끝(한계)이 있었다.
그들은 폭풍 뒤에 언제나 갠 하늘(청천)을 바랐다.
예루살렘은 심판으로써 구속되리라고 했다.
멸절되리라고는 하지 않았다.
이사야서 4장은 소묵시 문학이다.
요한계시록을 축소해 놓은 듯한 것이다.
이세상의 종말에 대해 나타낸 것이다.
문자대로 해석할 것은 아니지만, 대체의 사실은 명백하다.
그 안의 중심적 진리는,
남아있는 자는 구원되리라는 것이다.
‘피난하여 남은 자, 시온에 남은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4:2-3 참조)
라는 것이 그것이다.
즉 스알야숩(7장 3절 란 외에 남는 자가 돌아오리라)이다.
그리고 모든 은혜는 그들 위에 임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땅은 개조되어 그 소산은 풍요히 되고,
남은 자에게 그것이 주어지리라는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의 삭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며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4:2-한글 개역)란 이것이다.
이른 바 만물의 부흥이다.
제 5절은 하나님의 임재를 명시한다.
‘모든 영광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란다.
묵시록(계시록)21장 3절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고 있는 그대로이다.
제 6절은,
이와 같이하여 축복된 백성에게 은신처(피난처)가 주어질 것을 보여준다.
‘한 장막(천막)이라고 있음이 그것이다.
천막이 폭풍우를 피하는 곳으로 되리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그것이 묵시문학이다.
문자대로 해석 할 수 없다 해도,
그 안에 깊은 의미를 찾아 볼 수가 있다.
구속된 자라해도, 피난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죄인은 구속되어도 아직 ‘진노의 자녀’이다.
언제 심판의 영에 휘말려, 그 입장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에 피난처가 필요하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이다.
시편 94편 22절에,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반석이시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은혜는 모두 심판되고 나서 후에 임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되었음으로라)’(4:4 한글 개역)고 있다.
은혜는 전체가 심판되고서 후에 남은 자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심판을 거치지 않고서 은혜는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예언자전체의 주장이었다.
심판에 의해 부정(더러움)이 씻은바 되고,
그런 뒤에 은혜는 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내려 주심에 있어서,
취하시는 변함없는 길이다.
불변의 법칙이라고 하여,
실제로 틀림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인 동안은, 심판이 필요하다.
심판은 세정, 세척이며, 시련이다.
그리고 오물이 소진되고서 잔부가 구제되는 것이다.
국가도, 인류도, 사회도, 개인도,
이 길을 거쳐 구원되는 것이다.
심판 없이 구원은 없다.
‘모든 것은 피로써 정결케 된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 받는 일이 없다’(히브리서 9:22 참조)는 것은,
인생의 전부에 걸치는 대 진리이다.
이리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뿐 아니라,
위들 각자도 역시 심판의 영의 역사(일)에 의해,
모든 오예를 씻음 받고,
우리 속에 남은 것으로써 구원되는 것이다.
나의 전부가 구원되는 것 아니다.
불타지 않는 것이 남아, 그것이 구조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4:3 한글 개역)라고 있다.
생명서 가운데 기록된 자는 구원되리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연히, 요행으로 타다 남은 것은 아니다.
생명의 책 가운데,
미리 기록된 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남는 일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출 33:19 참조)
복음적진리가 여기에서도 또한 보여 있음을 본다.
그리고 심판은 여러 가지의 형태를 취하여,
우리에게 임한다.
혹은 유혹이 되어,
혹은 위협으로서 임한다.
우리가 이에 이길 것인가,
(그때) 어떤 것을 잃고 어떤 것이 남는다.
그리고 그 남는 것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죽음의 최후의 심판이다.
우리들의 부정(더러움)을 불태워버리시는
아주 뜨거운(맹렬한) 불이 시다.
그리고 ‘남은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이다.
*내촌감삼의 (1928년 5월 ‘성서지 연구’)를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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