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의 세력
이사야서 63장 1-6절 : 에돔에서 나오며 물들인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나오는 이 자가 누구냐? 의복이 영화롭고 자신의 큰 능력으로 다니는 이 자가 누구냐? 의 안에서 말하는 나니 곧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자니라.
2) 어찌하여 주의 의복이 붉으며 주의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와 같으니이까?
3) 만백성 중에서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노라. 내가 친히 분노하여 그들을 밟고 친히 격노하여 그들을 짓밟으리니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히리라.
4)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속에 있고 내가 구속할 자들의 해가 이르렀으나
5) 내가 보니 도와주는 자가 없었으며 또 떠받쳐 주는 자가 없었으므로 내가 이상히 여겼노라. 그러므로 내 팔이 내게 구원을 가져왔으며 내 격노가 나를 떠받쳤느니라.
6) 내가 친히 분노하여 만백성을 밟으며 내가 친히 격노하여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기력을 땅에까지 끌어내리리라.
지금은 누구이든 일을 하고자 함에 있어서
다수에 의해 하고자 한다.
다수의 찬동을 얻는 것이 성공 제 1보(譜)이지,
이 찬동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오늘의 사람은 믿는다.
여기서 선전의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선전의 목적은, 다수의 찬성환기에 있다.
사회의 세론을 불러일으키고,
자기설에 찬성을 얻어 가지고서,
그런 후에 그 실행을 기대하는 것이
지금의 사람이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이다.
정치계에 있어서, 정당의 필요가 제창되고,
종교계에 있어서 교회의 필요가 주창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이 단독의 힘(능력)을 믿지 않고,
다수에 의하지 않고서는,
무슨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사람에게 있어서도 다수,
있는 세력이다.
의회에 다수를 제어하기까지는,
대진리라 해도,
이에 실력은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로는,
성서는 다수의 세력을 인정치 않는 것이다.
성서는 먼저 제일로 하나님의 세력을 인정하고,
그런 후에 하나님께 의뢰하는 개인의 세력을 인정한다.
다수는 약한 사람의 다수로서,
위대한 일이 그들에게 행해질 것으로 믿지 않는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라는 것은,
단지 왕공귀족만을 가리켜 한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을 가리켜 한 것이다.
정당도 교회도, 단체도 조합도,
사람이라는 사람은,
그 수는 아무리 많다 해도,
모든 풀의 꽃과 같다는 것이다.
성서는 군주정치도, 대의정치도 믿지 않는다.
성서는 다수에 의하지 않고서는 일을 할 수 없다고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고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대사를 행하심에 있어서,
다수의 세력으로써 하지 않고서,
단독의 힘으로써 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심에 있어서,
민족운동을 일으키게 하시지 않고서,
모세 한 사람을 택하사,
그를 보내어 그 한 사람으로써 노예 백성에게 자유를 주셨다.
더 거슬러 올라가,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려함에 있어서,
어떤 민족을 택하여 이를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 한 사람으로써 성민,
4천년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이스라엘의 왕 아랍 치세에
예언자 엘리아는 다만 한 사람,
왕과 바알의 예언자 400인을 상대로,
신앙혁정의 열매를 올렸다.
기타 이사야도 한 사람,
예레미야도 한 사람,
에스겔도 한 사람,
아모스도 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 개혁의 세력이었다.
왕에게 의뢰치 않고,
다만 한 사람,
대 타락,
대 부패에 대하여 싸워 근본적인 혁정을 이룩했다.
실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국민의 역사를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용자가
혼자서서 구원을 베푼 그 사적의 기록이다.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같은 방법으로써 세계를 구원하셨다.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을 밟았도다’(이사야 63:3)라는 것은,
세상의 구주께서 발하신 소리였다.
예수는 다만 혼자(한 사람),
세상 죄를 몸에 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이를 제거하셨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운동은 아니었다.
예수 1인의 속죄의 생애와 죽으심으로였다.
인류는 이에 의해 구원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본받아
스데반은 혼자 순교사하고,
그에게 격려되어 바울은 혼자 세계교화의 길에 올랐다.
단테(1권 4p 역주)도 혼자서,
사보나롤라(1권 237p 역주)도 혼자서
루터도 처음은 혼자였다.
대운동은 모두 민중의 집회에 있어서 시작된 것 아니고,
신자 개개의 밀실에 있어서 시작되었다.
세계 개조의 실력은,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신(영혼)에 접하는 곳에서이다.
집회 집회라고 하여,
다수의 세력을 기다려,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성서적은 아니다.
또 그리스도적은 아니다.
회의 또 회의,
대회 또 대회이다.
이 일본에 있어서도 이미 세계 청년회대회를 보고,
또 세계 일요학교대회를 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교세는 조금도 오르지 않고,
신앙은 조금도 오르지 않고,
신앙은 조금도 진보되지 않는다.
듣는 것은 여전히 교세부진의 소리이다.
그리고 이제 또 예루살렘에 있어서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 신도의 대회가 개최되려하고 있다.
그것이 신앙적으로 아무런 영구적 결과를 기대할 것이 없을 것임은
오늘까지의 예에 비추어 보아 분명하다.
다수에 있어서 세력을 인정하는 것은 미국인의 버릇이다.
민중은 그들의 우상이다.
민중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그들은 일컬어 성공이라고 한다.
그들은 분명히 성서의 가르치심을 어기면서
성서의 가르치심을 세상에 펴려하고 있다.
깊이 성서를 상고(공부)하지 않고서,
다만 널리 성서를 반포하여,
세계교화를 도모(꾀)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배워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엘리야,
한 사람의 예레미야가 일어나기를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가 그 한 사람됨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결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멀리 예루살렘까지 그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갈 필요는 조금도 없다.
이 일본에 있어서,
이 후지산(4권 7p 역주 참조)를 바라보면서,
이 다마가와의 물을 마시면서,
만군의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그 성령을 받아 능력 있는 자로 될 수가 있다.
오인,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나 한 사람은 전 세계보다도 강함 있다.
이렇게 말함은,
결코 과대적 망상은 아니다.
진지한 사실이다.
다수에 의함은 말과 전차에 의지하는 만큼의 배신이다.
우리들은 집회호사의 미국종교가에 따를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따라,
먼저 홀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그에게, 힘입음을 얻어,
대중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내촌감삼의 (1928년 2월 성서지연구)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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