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거듭난 삶 2023. 12. 2.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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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2

[안디옥 교회]

 

 

성 경: [11:23-26]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11: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21절에서 언급된 이방인의 개종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21절에서 많은 이방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들어오는 것이 `주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묘사했듯이 바나바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바나바가 `기뻐했다'는 말은 안디옥 교회의 선교 활동을 공인(公認)한다는 표현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기독교인들을 기독교 공동체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굳은 마음으로 - 이 마음은 한 목적을 향해 흔들림이 없음을 뜻한다. `굳은'으로 번역된 `프로데세이'는 본래 여러 사람 앞에 차려놓고 진열하는 것을 뜻하며

 

(12: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한 `계획, 결의,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따라서 여러 사람 앞에서 맹세하듯

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주를 따르라는 말이다.

 

주께 붙어 있으라 - 이 말은 초기 기독교의 메시지로 예수를 삶의 중심이 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가 모든 삶의 원리이며 기준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모든 종교적 율법과 유대교적 전통들로부터 자유하여 예수에게로 돌아오고 오직 예수만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 바나바에 대한 누가의 평가라고 할 수 있는 본문은 바나바가 선언한 23절의 내용을 정당화하고 보증(保證)하기 위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즉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는 이방 기독교인을 인정한 것이 정당한 것임을 보증하고 나아가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한 것임을 암시하기 위한 누가의 의도이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 바나바의 안디옥 방문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교회의 확장을 가속화시켰는데, 그 이유가 바나바의 착함과 성령이 충만한 믿음 때문임을 누가는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이에'라는 말은 헬라어 접속사는 본래 본 절의 처음에 나와서 큰 무리가 주께 더 나오는 까닭을 말해주는 문장을 이끌고 있다.

 

따라서 본 절 전체를 직역하면,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무리가 주께 더 하더라'가 된다.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 9:30에서 사울이 다소로 보내진 사실이 언급된 후 처음으로 사울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가게 된 것은 환상 중에 받은 명령에 따른 것으로 사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2:17-21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사울이 다소로 가서 머문 기간이 얼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것으로 보인다. (Haenchen, Ramsay).

 

왜냐하면 예루살렘 2차 방문이 14년 만에 이루어졌다고 사울 스스로 밝히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안디옥에서의 1년을 빼면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13년 정도의 시간이 남기 때문이다.

 

바나바가 찾아간 다소는 안디옥에서 북서쪽으로 약 12.9Km의 거리에 위치한 길리기아의 중요한 도시로 무역이 성행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계(中繼) 무역을 했으므로 헬라 철학을 비롯한 헬라 문화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곳은 사울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간 뚜렷한 이유에 대해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안디옥 교회를 바나바 혼자 이끌 수 없었고, 대상이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

 

(1: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사울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바나바의 모습은 9:27의 내용과 함께 사울을 초대 교회의 중요한 사역자로 등장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일 년간 모여 있어 - 바나바와 사울이 협력하여 안디옥 교회에 사역하는 기간이 일 년으로 언급되는데 그 시기가 A.D. 43-44년경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Lenski),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 여기서 `일 년간' 이란 표현은 아마 바울과 바나바가 부근의 일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제자들이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이란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이며 이방 기독교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이해된다.

 

당시 안디옥의 50만 인구 중 약 1/7 정도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 중에 유대인들이 포함되었음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 - 이 단어는 기독교인들에게 붙여진 고유한 명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수치스럽고 간교한 것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한다.

 

신약에서 세 번 언급되는(26:28;벧전 4:16) 이 말은 비기독교인에 의해 붙여졌다는 의미에서 경멸적인 별명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본문에서 누가가 소개하는 어투를 보면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칭호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사울과 같은 쟁쟁한 사람이 이끄는 기독교인에 대해 수치스러운 단어를 소개한다는 것은 문맥상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로서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집단을 표현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안디옥 교회는 타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음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임을 인정받게 되고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교회의 설립에 대한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보존받게 될 수 있었다.

 

당시 추종하는 대상의 이름을 따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

 

(`헤롯당' -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에게 붙여진 지극히 당연한 칭호였다.

 

참조 : (11:19-26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따라서 이제 기독교는 안디옥에서 유대교와 전혀 구별되는 새롭고 독특한 종파로서 부각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유대교와 완전히 구분된 종파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문제는 다음 두 가지로 고려된다.

 

(1) 로마 제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박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유대교와 같은 합법적 종교가 아니라 신흥종교(新興宗敎)로 구분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점이다.

 

(2) 구약 성경과의 관계성에 관한 문제다. 즉 구약 시대의 구원사를 이해하는 데 유대교와 무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사실 바울은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였고 유대교적 전통과 기독교를 조화있게 연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Haenchen).

 

이런 점에서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sect)로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