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거듭난 삶 2024. 2. 20.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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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성 경: [25:13-22]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5: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아그립바 왕 - 아그립바 세의 아들이자 헤롯 대왕의 증손인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 2'(Marcus Julius Agrippa II, A.D. 27-100)이다.

 

그는 어려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Claudius)황실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부친처럼 친로마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A.D.44년 그의 아버지가 별세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7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토를 이어받아 다스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팔레스틴은 로마 행정관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다가 A.D. 50년경에 글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아그립바 2세는 갈기스(Chalcis)의 왕으로 임명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팔레스틴의 통치자로 부상되었다.

 

그후 글라우디우스는 그에게 더 많은 영토를 맡겼는데, 빌립의 관할 지역, 아빌라(Abila), 트라코니티스(Trachonitis), 아크라(Acra)등이 그것이다.

 

아그립바의 통치지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로에 의해 갈릴리, 다리게아(Tarichea), 디베랴(Tiberias)등에 까지 확장되었다(Jos., Wars II).

 

아그립바는 매우 친로마적이어서 유대인들이 반로마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공작을 하였고, 66-70년에 걸쳐 있었던 전쟁 기간에는 더욱 철저히 로마에 충성했던 관계로 전쟁 후 더 많은 영토를 부여받았다.

 

이처럼 아그립바 왕은 로마와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 특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로마 총독이 부임할 때마다 예방(禮訪)하여 경의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버니게 - 이 여인은 아그립바 2세의 한 살 아래 누이이자 벨릭스 전() 총독의 처인 드루실라(24:24)의 언니이다.

 

(24: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그녀는 일찍이 철학자 필로(Philo)의 조카인 마르쿠스와 약혼한 적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지는 못했다.

 

후에 그녀는 삼촌인 헤롯과 첫 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48년에 남편이 죽자 오빠인 아그립바 2세의 집에서 살았다.

 

그후 그녀는 길리기아 왕 폴레몬(Polemon)과 두 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곧 이혼하고 다시 오빠에게 돌아왔다.

 

이때 이들 사이에는 근친상간(近親相姦)의 불륜이 저질러졌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었다.

 

70년 이후에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Vespasian)의 아들인 티투스(Titus)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으나 여론의 악화로 끝내는 헤어지고 말았다.

 

오빠와 함께 베스도의 취임을 축하하러 온 지금은 아마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오빠 집에서 함께 거할 때였을 것이다.

 

 

 

[25: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의 베스도 문안이 다소 길어진 듯하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의 명성과 권위로 보아 바울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판단하고서 바울이야기를 화제로 꺼냈던 것 같다.

 

아그립바 왕이 직접 유대를 통치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글라우디우스 황제가 '성전의 후견인'의 자격과 대제사장의 임명 및 파면권, 그리고 성전 창고와 제사장의 예복을 관리하는 권한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유대 사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5: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 베스도는 자기가 겪은 사건의 줄거리를 아그립바에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새로운 사실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단지 바울을 고소만 한 것이 아니라

 

(2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유죄 판결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25: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 본문에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억지 주장과 총독 베스도의 법적 공정성이 대조된다.

 

로마의 사법 관행은 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며, 피고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베스도는 사사로운 감정에 매이지 않고

 

(3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법을 준수함으로써 로마법의 정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베스도의 진술은 자신이 법에 의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소 과장된 표현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가 예루살렘에서의 재판 요구를 거절할 때 제시한 이유는 지금과 달랐으며

 

(4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재판 과정에서도 유대인들을 의식함으로써

 

(9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완전한 불편 부당(不偏不黨)함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25:17]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지체하지 아니하고 - 사실상 베스도는 재판을 신속하게 열었었다.

 

(6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그는 재판을 지연시키면서 직무를 유기(遺棄)하거나 뇌물을 기대하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하였다는 것을 넌지시 강조한다. 이는 전임자인 벨릭스의 우유부단한 처사와 대조된다.

 

(24: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5:18]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 -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력한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바울을 고소했을 때,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명망으로 보아 문제 거리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소송을 제기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베스도는 필시 바울이라는 자가 상당히 중대한 악행을 법했으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재판이 열리자 베스도의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로마법에 의해 유죄에 처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7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 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25: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 여기서 성전 모독에 관한 사항은(24:6) 제외되고

 

(24:6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그 대신 부활에 관한 주제가 등장한 것이 흥미롭다.

 

(24: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베스도 자신이 말하듯이 부활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범죄자로 정죄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관한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부활에 관해서는 바리새인들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예수의 부활만큼은 그들을 포함한 유대교 지도자들 전체가 기를 쓰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문제는 로마 법정에서 다룰 성질이 아님은 자명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경우에도 종교적 문제로써 정치적 올가미를 씌우고자 안간힘을 썼을 뿐이다.

 

(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14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 죄를 찾지 못하였고).

 

한편 '종교'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시다이모니아스''미신'(superstition)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대체로 로마 관리들은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베스도 역시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유대의 종교를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는 아그립바 였으므로 그런 의미로 사용 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25:20]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 베스도는 9절에서와 달리

 

(9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여기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의 재판을 제의(提議)한 것이 자신의 종교 문제에 관한 무지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두 진술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가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머뭇거린 것은 무지 탓도 있었겠지만, 그 배후에는 고소자들 앞에서 바울을 무죄로 선언하기를 원치 않은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Howard Marshall).

 

 

 

[25: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황제 - 라틴어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 해당하는 형용사로서 '존엄한', '존경스러운'이란 뜻이다.

 

B.C. 27년 로마 최초의 황제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헬라어로는 '세바스토스')라는 칭호를 받은 이후로 이는 '가이사'와 더불어 로마 역대 황제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25:22]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본 절은 아그립바가 바울에 관하여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다시 한번 증언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로마의 총독(본디오 빌라도) 앞과 아그립바의 증조부인 헤롯 안티파스 앞에 섰던 예수의 경우(23:8)를 연상시킨다.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그러나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했던 반면

 

(23: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