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거듭난 삶 2024. 2. 2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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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변명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성 경: [26:1-11]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26:1]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 지금은 청문회가 아그립바를 위하여 열린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바울에 대한 청문의 주도권은 아그립바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진행된다.

 

(25:22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사실상 베스도가 자신은 유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으므로 바울에 대한 심문을 아그립바에게 일임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하겠다.

 

바울이 손을 들어 - 바울의 항소가 받아들여진 이상, 재판은 끝난 것이며 바울이 자신을 위해서건 아니면 청중들의 호기심을 위해서건 다시 변증을 해야 할 의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기회를 자신의 무죄 됨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 보다는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손을 들어'라는 표현은 21:40처럼 청중들을 조용하게 하거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취한 행동이 아니라 연설을 시작하면서 예의(禮意)를 표시한 것이라고 본다.

 

가이사랴의 최고 권력자들과 학식있는 자들이 위엄있게 앉아있는 자리 앞에 사슬에 묶인 채,

 

(29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손을 들어 연설을 시작하는 바울의 모습은 차라리 비장하다고 할 수 있겠다.

 

 

 

[26: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 바울은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정중하면서도 간결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

 

(24: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그립바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고 한 것은 의례적인 인사치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26: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 2절에서 다행스럽다고 말한 이유이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종교적인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바울의 설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베스도가 선뜻 판결을 내리지 못한 데에는 유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한 무지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볼 때 당시 바울의 심정은 상당히 답답하였으리라 본다.

 

바울은, 베스도가 이미 그에게 정치적인 죄를 정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25:25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변명할 필요는 없었고 여기서는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변명하면 되었다.

 

 

 

[26: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 - '생활한 상태''생활 방식'(manner of Life, KJV)을 뜻한다.

 

바울의 고향은 '다소'였으나 실질적인 그의 정신적 배경은 예루살렘이었다.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바울이 구체적인 그의 성장 배경이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유대 사회에 두루 알려져 있는 바임을 힘주어 말한 것은 그의 바리새적 배경과 유대교적 열정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먼저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26: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우리 종교 - 여기서 바울이 유대 종교를 '우리 종교'로 표현한 것은 아그립바와 자신의 동족성(同族性)을 은연중 확인시킴으로써 공감대를 넓혀 보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여지며 (4절의 '다 아는 바라'는 말과 연결됨)

 

또한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청취자들이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 의도도 엿보인다.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 - 이는 바울이 한 때 유대교적인 정통성에 누구 못지않게 철저했음을 말하기 위한 진술이다.

 

바울은 이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3:5-6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실제로 바울은 힐렐(Hillel) 학파의 가말리엘로부터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이라 하면 가장 엄격하고 완벽에 가까운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26: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 바울은 과거에 대한 언급을 간단하게 끝내고 심문을 받고있는 현재의 상태를 주목하게 한다.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란다 함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뿌리를 둔 것임을 의미한다.

 

그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명료(明瞭)하게 언급되지는 않고 있으나 메시야와 부활에 관한 것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구약의 언약들과 예언들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또 온전히 성취되어 갈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초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성취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맞춰져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6: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본 절에서 바울은 자기를 송사한 유대인들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이 소망은 전체 이스라엘이 간절히 바라마지 않던 것인 바, 이 소망을 인하여 다른 민족이 아닌 바로 유대인에게 송사를 받았다는 것을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바울은 자기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25:25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종교적으로 허물이 없음을 먼저 분명히 하고 있다.

 

한편 '소망'이라는 말은 바울의 변호 연설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핵심적인 용어이다.

 

(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28: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6: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

 

여기서 '당신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가 분명치 않다.

 

바울이 유대교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을 이교도들에게 이러한 주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는 아그립바와 버니게 외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참여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이 질문은 그 특유의 치밀하고 예리한 논증을 보여준다.

 

즉 만일 그 자리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당연히 부활을 배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질문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이라고 하는 일반론적 차원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긍정의 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의 진정한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맞춰져 있음은 물론이다.(H. Marshall)

 

 

 

[26: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 여기서 '나도'는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오히려 적대했던 과거를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증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다는 투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 자신도 극적인 변화를 받았듯이 반대자들의 태도가 궁극적으로는 바뀌어야 함을 역설하려는 준비 작업일 뿐이다.

 

바울은 복음의 탄압자에서 선포자로 바뀌는 극적인 반전(反轉),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강렬한 인상과 설득력을 유발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22:3-4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러나 이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극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원만하고 점진적인 신앙을 키워가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바울의 경우에는 극적인 전환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 강한 설득력을 주는 힘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하여야 될'에는 바울이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핍박했던 데에는 나름대로의 투철한 종교적 의무감이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가편 투표를 하였고 - 바울은 자기가 기독교를 어떻게 박해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 표현은 고대에 재판할 때 배심원들이 피고가 무죄라고 판단될 때는 흰 자갈을, 유죄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검은 자갈을 던졌던 판결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재판할 때 사형에 처하는 판결에 투표를 하였다는 진술은 이곳이 처음이다.

 

 

[26: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 '모든 회당'은 예루살렘 내에 있는 회당들을 가리키는 듯하며, `형벌'은 당시에 회당 형벌로 관례화 되어 있던 채찍질을 가리킬 것이다.

 

강제로 모독하는 말 - 이것은 예수를 부인하거나 저주하는 말을 하게 하여 성도들을 배교자(背敎者)가 되게 유도하려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는 배교를 강요하는 바울의 시도가 쉽게 성공하지는 못했으며, 그리하여 더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Bruce, Robertson).

 

어떤 특정한 집단을 탄압함에 있어서 그들이 믿고 있는 신조나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는 것은 가장 잔인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대 수리아의 폭군 안티오커스는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 하나님을 모독하도록 강요한 일이 있었다.

 

또한 트라얀(Trajan)에게 보내는 젊은 플리니(Pliny)의 보고서에는, 만약 기독교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독하면 그를 놓아 주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Epistle X. 96).

 

외국 성까지도 - 바울이 기독교를 핍박할 때 유대지역 밖으로 나간 것으로 언급된 곳은 다메섹 뿐이었다.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그렇다면 '외국성'은 다메섹으로서 출장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핍박하였고 - 반복되는 핍박 시도를 뜻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은 참으로 지독한 정도였으며 마치 사냥감을 쫓는 자나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뒤쫓는 자와 같았다.

 

열심으로 말하면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했던 유대인들을 능가하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