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거듭난 삶 2024. 4. 20.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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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의 개시

 

마태복음 935절 이하 :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미션(misson), 영어로서 이미 일본어로 된 것의 하나이다.

 

이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 제1은 파견이다.

파견하는 자 파견되는 자 있어서 미션이 있는 것이다.

일국의 주권자가 타국의 주권자에게 사절을 보내는 것을 미션이라 한다.

 

그 제2는 봉사이다.

단지 파견하는 것은 아니다. 호의를 표시하기 위해, 사랑을 베풀기 위해 보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미션에 권위가 따르고, 동시에 또 사랑이 따른다. 아름다운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출현을 기다려 비로소 이룩된 말이다.

 

그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로마서 1014-15절에 있어서의 바울의 말이다.

이르기를,

 

아직 믿은 일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으랴!

아직 들은 일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 을 수 있으랴.

아직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으랴!

만약 보냄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전할 수 있으랴!

기록하여 평화로운 말씀을 전하고 또 종은 일(소식)을 전하는 자의 그 발은

아름답도다라고 있는 대로이다.

 

참된 복음이 있는 곳에 미션은 반드시 생겨난다.

오늘의 세계 이르는 곳 어디에나 복음의 미션이 행해진다.

이것을 전도라 하여 오해되기 쉽다. 도를 전하는 것은 그 일부분이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주안이다. 그리고 이 존귀한 사업은 예수 자신이 창시한 바의 것이다.

 

예수 자신이, 파송된 분, 즉 미셔내리(Missionary)였다.

그가 선교사의 모범이다. 그리고 그는 이때까지 혼자서 선교에 종사하셨다.

제자들은 그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 파송된 그가 사람을 파송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도래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사람들이 고생하며, 또 유리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있다.

 

구원을 요하는 사람은 많이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고생하며, 상처입고, 심히 박해된다.

 

뿐만 아니라 일꾼이 되어 시랑(jackal and wolf)의 도()에게 대항할 수 없는데서

유랑(流浪) 이산(離散)하여 그 곤혹한 바도 된다.

 

이것을 보고 예수의 마음은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약한 자로서 양 같은 것은 없다.

그에게 자위의 무기 없고, 다만 목자의 보호에 의해서만 안전하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양이다.

천국의 시민 될 성질을 가진 자는 특히 그러하다.

 

그리고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는 자신이 약한(불쌍히 여길)자이면서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 반대로 자기는 강한 줄, 안전한 줄로 여기는 점에 있어서 양보다도 일층 가련히 여길 자이다.

 

이 상태를 보고,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의 마음에 강한 연민의 정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자가 이산하는 양에 대한 연민의 정 , 그것이 동기로 되어, 여기서 12 사도의 파견, 즉 크리스천 미션, 오늘 이른바 그리스도교 전도가 시작된 것이다.

 

목자 없이 고생하며 이산하는 양에 대한 예수의 연민의 마음에서 그리스도 전도는 시작되었다고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청결한 샘에서 발하여, 모든 전도는 청결하고, 또 유효적이다.

그리고 이 샘 의외에서 발하는 전도는 모두 탁(impure)하고, 따라서 무효이다.

 

오늘 냉정한 두뇌가 무엇보다도 귀히 여겨지는데, 두뇌에서 나온 전도는 효 적고 실패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하물며 교세 확장 위한 전도, 국위 선양 위한 전도, 사회 봉사위한 전도, 기타 모두 정치가적 야심을 섞은 전도, 오늘날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많은 이른 바 전도

이들 모두가 예수의 개시하신 전도와 전혀 성질을 달리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내장의 깊은 곳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연민의 정

세상에 실은 이것보다 깊고 맑은 동기는 없는 것이다.

 

아비가 그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시련 103:13)고 있다.

 

아버지 하나님의 연민의 마음

인류의 구원은 이 마음으로서 시작된 것으로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예수의 마음으로서 오늘의 세계를 볼 때, 연민의 마음 생겨나지 않으랴?

특별히 야만인이라 않는다, 이른바 문명국의 백성인 자가 축하할 만큼 행복한 자인가?

 

다시 묻는다. 우리들 자신이 연민을 요하지 않는 자인가?

 

우리들은 자유를 자랑하지만 그 자유란 참된 자유가 아니라 노예 및 수인(prisoner)이 속박에 익숙해져 이것을 자유라 칭하기에 이르게 된 유() 아니랴?

 

그 증거로는, 우리들 몇 사람도 복음에 의해 각성하여, 실로 고생하며, 또 눌린 자임을 깨닫는 것이다.

특히 유리(流離) 산란(散亂)의 상태에 이르러서는 누구나가 그것이 사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목자를 떠난 우리들은 지리멸렬이다.

이웃 서로가 알지 못하고, 형제가 서로 돕지 않으며, 일단이 되어 움직임의 이익과 쾌락을 알지 못한다.

하늘에서 이 상태를 보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랴?

특히 그리스도 신자의 이산에 이르러서는, 실로 연민의 극이다.

 

이 세상의 이리(wolf)들에게 쫓기면서, 그들은 서로 도와서 자기를 지키며 적에게 대할 줄을 알지 못한다.

심한 경우에 있어서는 서로를 괴롭혀, 그 피로 곤비(exhaustion), 실패로 우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상태이다.

 

실로 이산하는 인류는 목자를 요한다.

우리들 한 우리(cell) 안에서 한 무리로 되기 위해 한 사람의 선한 목자를 요한다.

 

하나님은 그 목적으로서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도 또 그 목적으로서, 미션 즉 선교를 개시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연민의 정에 움직인바 되어,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고 일군은 적다. 그러므로 그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을 수 확장으로 보내주시기를 원하라.

 

많은 사람은 예수의 이 말씀을 통독하고, 그 의미 있는데 주의하지 않는다.

 

도대체 수확이란 누구의 것인가?

우리들의 것, 내 교회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교회 확장의 기회 많으나,

그러나 이것은 이용하는 인물 부족하다고, 그들은 주의 이 말씀을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수확의 주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기 전포(field)의 수확을 요구하신다. 이것을 정당한 요구인 것으로서, 이것을 거슬리는 것은 사람의 죄, 또 커다란 불이익이다.

 

사실은 마태복음 2133절 이하, 기타에 있어서 기록되어 있는, 포도원 주인의 경우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마련하신 과원의 열매를 요구하시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을 거부하고, 주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이 상태를 목격하시고, 하나님 위해 열심히 일어남이 당연하다.

그리고 예수는, 갈릴리 호반에 있어서의 수개월에 걸친 전도의 결과로써, 이 열심을 일으켜 주신 것이다.

 

로마의 군인 백부장, 귀신들린 가다라 사람, 그에게 고침 받은 나병환자, 맹자, 아자 등, 모두 하나님의 수확 아닌 것 없다.

이것을 방기해 두면, 이방인, 광인, 불구자로서 사람에게 업신여겨져 밟힐 뿐.

 

하지만 이것을 도와 인도하면 하나님의 창고에 거두어드려야 할 귀한 수확물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대한 열심에 잡혀 다시 선교(mission)를 계속 또는 확장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말씀의 뜻이다.

 

즉 사람에 대해서는 연민의 정, 하나님께 대해서는 충성의 마음,

이 두 가지가 동기로 되어 예수의 선교는 시작된 것이다.

 

거둘 것은 많고, 일하는 자는 적다’, ‘희소하다로 읽을 것이다.

 

수확의 재료는 어디에도 있다.

 

도시와 마을로 가서, 가난한 자, 불구자, 맹인, 절뚝발이 등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누가복음 14:21)고 주는 말씀하셨다.

 

그들은 모두 귀한 수확으로서 아버지의 창고에 거두어 들여져야 할 자이다.

이것을 생각하여, 금은보석이 내 발아래 굴러가는 듯 함이 있다.

이른바 구도자 적음을 탄식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눈을 들어 보라. 이미 밭은 물들어 수확 때가 되었다’(4:35참조).

 

예수께서 다른 곳에 있어서 말씀하신대로이다. 구원될 자, 구원되려는 자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일군이 희소한 것이다. 전혀 없는 것 아니다. 아주 희소한 것이다.

예수의 마음으로서 미션에 종사하는 자가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수확이 오르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전도사는 예수의 시대에 있어서도 지금의 시대에 있어서와 같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도 그들은 모두 고용된 목양자로서 자기의 수확을 도모하는 자이지 하나님의 수확을 목적하는 자는 아니다.

 

그러므로 양은 그 음성에 따르지 않고, 곡식은 익어도 수확은 없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연민과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 격려되어 일하는 사람, 즉 참된 전도사 이는 참으로 희소하다. 그리고 거둘 것 많은데 대하여 일군 적음은 실로 비탄의 극이다.

여기서 간절한 기원이 생겨나는 것이다.

 

수확(추수)의 주께서 일꾼을 수확장(추수터)에 보내주시기를이라는 기도이다.

 

단지 선한 전도사가 생겨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전도사를 일으켜

이것을 그 자신 소유의 동산에서 열매를 거두기 위해 보내주시기를 이다.

 

전도사는 구하여 얻을 것 아니라 기도하여 주어진다.

누가복음 612절 이하에 의하면,

 

예수 기도하러 산에 가서 밤새우며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았을 때, 그는 제자를 부르시고, 그 중에서 12인을 택하여 이를 사도라 이름하셨다고 있다.

 

예수 자신이 기도에 의해 12사도를 얻으신 것이다. 하물며 우리들에 있어서랴!

사람의 입장에서 보거나, 또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에 의하거나, 참된 전도사의 출현만큼 필요한 것은 없다. 우리가 이것을 위해 기도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보다 적절한 기도는 우리들 각자가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심에 임하는 일이다.

혹은 내 아들 내 딸이 그 택하심에 참여하는 일이다.

예언자 이사야의 경우와 같이, 내가 만약 여호와의 음성으로서

 

내가, 누구를 보내랴 누가 우리 위해 갈꼬?라는 말씀을 들으면,

 

나도 또 젊은 예언자와 함께 마음에 대답할 것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서 6:8)라고.

 

구미제국에 있어서, 많은 유위의 청년 남녀가 이 음성을 듣고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의 어떤 사람은 만난을 배척하여, 혹은 북방양의 연안에, 혹은 아프리카, 지나, 몽고 등, 인생의 행복이라 일컬을 것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수확의 업에 종사했다.

 

위대라 칭할 것이다. 명예라 할 것이다.

 

단지 일위대수를 사이에 둔 우리 인방(隣邦) 지나(중국)를 본대도 수천의 구미인은 복음의 사자로서 정치상, 상업상, 아무 목적하는 바 없이, 영혼의 수확에 종사하고 있다.

실로 부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을 추수터에 보내주기를 기도하라’.

 

그리고 그 일군이 자신이기를 기도하라. 혹은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자이기를 기도하라.

그리고 이것은 희생이면서 결코 희생이 아니다. 즐거움의 극치이다.

 

추수하는 자는 삯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자(하나님)와 거두는 자와 함께 기뻐할 것이다라고, 주는 말씀 하셨다(4:36참조).

 

인생의 행복은 결혼과 성공이라는 근대인의 사상 같은 것, 예수의 눈 앞에는 일고의 가치 없는 것이다.

 

나는 단언하여 주저치 않는다,

인생의 행복은 사람에 대한 맑은 연민의 정과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충성의 마음에 잡혀,

예수처럼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고, 또 백성의 모든 병, 모든 질고를 고쳐주는 일이라는 것을.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