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거듭난 삶 2024. 4. 19.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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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 사도의 선임

 

마태복음 101-4: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참조 : (마가복음 313-19, 누가복음 612-16)

 

마태복음 102절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십이 사도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베드로라 불린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당의 시몬과 가룟 유다, 이는 곧 예수를 판 자이다’.

 

형제 일조, 시몬 두 사람, 야고보 두 사람,

또 누가복음 616절에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는 이름을 보매,

유다도 두 사람 있었음을 안다.

 

십이인 중에, 잘 알려진 자는 베드로, 요한, 그 형제 야고보, 및 가룟의 유다 4인이다.

조금 알려진 자는 안드레, 빌립, 마태, 도마의 4인이다.

조금도 알려지지 않는 자는 바돌로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야고보의 형제 유다의 별명이리라), 가나안 당의 시몬의 4인이다.

 

십이 사도 가운데마저, 그 이름 외에 행동 공적이 조금도 전해지지 않는 자가 4인이나 있었음을 알 때, 무명의 신자도 또한 하나님 앞에 무위무능의 신자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사도는 중직이라 해도 하나님의 그릇임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롭게 해야 할 이는 하나님이지, 그릇이 아니다.

그 공적이 나타나고 아니고는 소한 문제이다.

예수는 그 제자들에게 고하여 말씀하셨다.

 

귀신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기쁘게 여기지 말라.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쁘게 여기라’(누가복음 10:20).

 

예수의 12 사도로써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은 최대의 명예, 또는 특권이다.

새 예루살렘의

 

도시의 성벽에 열 두 토대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 있다’(계시록 21:14)고 한다.

 

하늘의 기록에 있어서는 사도 중 제1위를 차지한 시몬 베드로도,

무명이나 다름없는 가나안 당의 시몬도, 그 받은 영광은 마찬가지이다.

 

건조무미한 듯이 보이는 사도 명부록가운데, 위안의 복음이 복재(lurking)함을 본다.

 

서양의 속담에 말하기를

내게 사람의 친구를 보이라. 나는 이에 의해 그 사람이 어떠함을 보여 줄 것이다라고.

즉 사람은 그 친구에 의해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한가지로 스승은 그 제자에 의해 알게 된다.

예수께서 택한 십이 제자에 의해, 예수와 그 가르치심이 무엇인지가 명시된다.

 

첫째로 분명한 것은 12사도 중에 한 사람의 학자, 또는 귀족, 또는 부자, 또는 종교가가 없었던 일이다.

모두 노동 또는 사무인, 평민 또는 중류 이하의 사람, 특히 신앙 독실한 평신도였다.

 

그중의 4인은 분명히 어업가, 날품팔이의 어부는 아니었으나,

스스로 어로(fishing)에 종사하는 자였다.

 

마태는 세리로서 소관리였다.

기타의 사람에 관하여 그 직업을 알 수 없다 해도, 베드로를 으뜸으로 가진 사도단 중에,

전문(專門)의 학자 또는 종교가가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대는 결코 무학의 시대는 아니었다.

길리기아의 다소에,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훌륭한 대학이 있었고, 철학, 문학, 정치, 경제, 예술이 그 최고의 형태에 있어서 공구되었다.

 

특히 국도 예루살렘에 있어서, 고원한 유대 신학은 힐렐(Hiller), 가말리엘(Gamaliel)등의 석학에 의해 강의되고, 허다한 학생은 그 발아래 앉아 천계의 오의에 달하여 했다.

 

예수는 그 제자를 학자 중에서 택하려 하여, 적재를 얻는데 결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 자신이 학자가 아니고, 그의 복음이 학자에게 맞지 않았다.

그 자신이 노동의 사람으로서, 그 복음이 노동에 의해서만 해득될 것이었다.

 

그는 그의 복음이, 이 세상의 지자 또는 식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무식계급에 의해 영접됨을 기뻐하여, 말씀하셨다.

 

천지의 주가 되시는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 있는 자와 현명(총명)한 자에게 감추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여, 옳습니다. 이런 것은(아버지의)뜻에 합의하나이다’(누가복음 10:21)라고.

 

학문을 경시하고 노동을 중히 여기는 점에 있어서 예수는 예외이다.

석가도, 공자도,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제자라면 학문의 제자였음에 대하여,

 

다만 예수의 제자는 학문을 떠나 행위의 사람이었다.

예수의 제자라 하여 그의 문하생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일하는 자, 그와 함께 걷는 자, 그분처럼 하나님께 쓰이는 자였다.

그는 제자를 부르심에 있어서,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다.

 

나와 사상을 함께하라,

내 인생관, 우주관, 예술관을 가지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베드로와 요한과 마태, 그들로서 대표되는 사람이, 그의 뜻에 합하는 사람이었다.

 

그리스도 교회는 본래부터 십이 사도로써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적이 아니고, 학문적이 아니고, 물론 예술적이 아니고, 갈릴리의 시골로서 대표된 단체였다.

 

그들 중, 가룟 사람인 유다 한 사람이 유다 생장의 사람으로서, 그 사람이 스승을 판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오늘의 그리스도 교회는 갈릴리인의 교회인가?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누구라고 안다.

 

먼저 첫째로 베드로로 불린 시몬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지금의 교회의 수장 될 수 있는 자는 아니다.

그 감독, 목사, 전도사, 집사, 장로는 모두 어부 또는 세리의 계급에 속한 자는 아니다.

예수께서 마련한 교회와 오늘의 그것과의 사이에 천지운니의 상위가 있다.

 

십이 사도의 한 사람을, 가나안당 일명 젤롯당(Jealot)의 시몬이라고 칭했다.

 

가나안당이란, 오늘 말하는 과격파였다. 과격 수단에 호소하여 혁명을 실행하려고 도모한 당파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예수께 부르심 받아 그 제자로 되고, 마침내 택함 받아 사도의 한 사람으로 되었던 것이다.

 

물론 크리스천으로 되어 과격 사상을 계속한 것 아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가 과격파의 한 사람이라 하여 그를 물리치시지 않았다.

그 수단은 잘못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정신에 위할 바가 있었다.

성령의 은화에 의해, 과격파의 시몬도 예수의 온량한 사도로 되었다.

 

과격의 사람이라고 하면 사갈(snakes and corpions)처럼 염오하는 오늘의 그리스도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도 크게 반성하는 바 없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그러한 사람들을 가지고서 세계 교화의 대사업을 시작하셨다.

이 일에 관하여 바울은 말했다.

 

형제여, 부르심을 입은 너희들을 보라. (인간적)에 의한 지혜 있는 자 많지 않다.

능 있는 자 많지 않다. 귀한 자 많지 않다. 하나님은 지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자를 택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랑하는 일 없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고린도전서 1:26-29)라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학문, 교양, 지위, 소유는 도리어 방해이다.

참된 천재는 도리어 그릇이 부족한 것을 가지고 나타나듯, 하나님의 능은 도리어 평범 무능의 사람을 가지고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있어서도 역시 참된 교회는 갈릴리인의 교회이다.

즉 세상의 비천한 자, 업신여김을 받는 자, 즉 없으나 다름없는 자로서 이룩되는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의연하여 평신도의 교회이다.

지자, 학자, 교회자는 이것에 가세할 수 없어, 그들은 교회를 주재한다고 하면서 실은 그 밖에 선자이다.

만약 그들이 참된 교회에 가입하려고 하면, 먼저 그 지혜와 지식과 재능과 이에 의해 얻은 지위를 그리스도 앞에 바쳐 스스로 어린 아이로 되어 그의 축복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학은 물론 자랑할 것 아니라 해도 학문도 의지할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많은 오류가 학문에 의해 전해지는 오늘날, 우리들은 학문을 과중 시 해서는 안 된다.

 

가장 건전하고 확실한 지식은 눈 또는 귀를 통하여 오는 것 아니고, 손과 발을 통하여 온다.

 

최량의 교육은 신앙으로서 행해지는 근육노동이다.

예수가 그 복음을 갈릴리의 노동자에게 맡기신 것은 그중에 깊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세계가 오늘 노동자의 손에 돌아가고 있는 것은, 예수의 손에 돌아가고 있는 전조이다.

영국에 있어서의 노동당의 승리 같은 것, 이 점에서 보아 의미심장하다.

 

오늘까지 정치라고 하면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양() 대학의 출신자에 한해져 있었으나,

지금은 보통(평상)의 노동자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바가 훨씬 정치전문가의 하는 바에 능가하는 상태이다.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종교는 신학자 즉, 종교전문가의 손을 떠나, 이것 또한 평신도의 손에 넘어가고 있다.

 

대학의 교수에 치중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나사렛의 예수를 주로 모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의 무리가 세계를 지배하려 하고 있다.

인류의 행복 그 이상 없는 것이다.

 

인세(人世) 가장 의뢰할 만한 것은 학교와 서적에서 얻은 지식은 아니다.

활동과 실험에서 얻은 상식이다.

사상가에 인도되어 나라는 망해버린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