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거듭난 삶 2024. 11. 29.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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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예언

 

성 경: [2:36-40]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아셀 지파 비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 - 시므온의 소개와는 달리, 안나의 경우는 지파명까지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시므온의 경우는 구체적인 신분을 확인할 수가 없었으나 안나는 삶의 배경이 기술되었다.

 

아셀은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이었다.

 

(30:13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예수 탄생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주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어 있어 나머지 10지파의 행방은 불투명했다.

 

이는 바벨론 포로지로 부터 귀환(歸還)한 자들 중 거의가 이 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던 연유도 있겠는데, 안나도 바로 다른 지파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신들의 족보를 보관하고 그 잃어버린 지파 백성의 후손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한편 '바누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 이라는 지명에서 나온 이름이다.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따라서 히브리식으로는 '브니엘'이며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그리고 '안나'는 히브리어의 '한나'에 해당한다.

 

(삼상 1: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 이 이름은 사사이며 제사장이고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름과 동일하다.

 

그녀는 구약 성경의 드보라와,

 

(4: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훌다와 같이 훌륭한 여성 예언자였다.

 

(왕하 22:14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

 

 

[2: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

 

당시 유대 사회의 조혼 풍습에 비추어 볼 때, 안나는 14세를 전후하여 결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안나의 나이는 14+7+84=105세 쯤 되는 셈이다.

 

이처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긴' 여인이었다.

 

이는 그녀가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이스라엘의 소망 곧 메시야를 대망하며 기도했던 여인임을 나타내준다.

아마 그녀는 오직 메시야 만이 그녀와 이스라엘의 가슴에 수십 년 동안 맺혀있던 응어리를

풀어주고 위로해 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한편, 안나는 성전에서 시므온의 송가(頌歌)를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송가를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그 아기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였다.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 '감사하고''찬양하다', '감사하다' 등의 뜻 외에 '단호하게 신앙을 고백하다',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안나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신앙 고백적인 믿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나의 감사는 순종 및 메시지의 선포와 결합되고 있다.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 이 구절은 사가랴가 이스라엘의 속량을 노래하고,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25)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52:9에 나타난 메시야의 예루살렘 구원에 대한 대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52:9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사실 '구속'은 예수께서 이룩하실 신적 구원 개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2: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주의 율법을 따라 - 누가는 예수의 부모들이 율법이 명하는 바를 열심히 준수하였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본장 내에서만 하더라도 예수의 부모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었는가 여러 차례 강조되고 있다.

 

22- (모세의 법대로),

23- (주의 율법에 쓴 바),

24-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27- (율법의 전례대로),

 

미루어 보건대 마리아 부처는 경건한 삶을 사는 유대인의 전형(典型)이었다.

 

본 구절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친히 율법을 지키셨음을 시사한다.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 누가는 마태복음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방 박사의 방문이나, 애굽으로의 피난 기사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그것은 누가가 마태의 기사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마태는 또 하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실례를 들기 위해서 그 기사의 내용을 넣었겠지만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빌어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려고 하는 누가에게는 그러한 내용이 그다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예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정상적인 어린아이로 성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

 

이 구절은 침례 요한의 어릴적 성장 모습을 묘사한 1:80의 내용과 비교된다.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그리고 52절은 이 구절에 대한 보충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가 12살이 되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자라며 강하여지고'라는 표현은 신체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범한 아이와 같이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지혜가 충족하며'라는 표현은 정신적 성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표현은 영적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어릴 때부터

지혜와 은혜를 가진 인물로 침례 요한보다도 훨씬 탁월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