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거듭난 삶 2024. 12. 29.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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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하루

 

누가복음 431-41: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고향 나사렛에 있어서 예수께서 행하신 것은 기적 없는 설교였다.

 

그는 그 향인이 기적을 보기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행하시지 않고, 또 그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이것을 행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이르시자, 그 전도 개시에 있어서 그는 먼저 기적의 하루를 보내셨다. 날은 안식일이었다.

 

아침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낮에는 시몬의 집에 들어가, 그 장모의 중한 열병을 고치시고, 저녁에는 각종 병 앓고 있는 다수의 사람을 고치셨다고 한다.

 

(해질 무렵, 사람들이 많은 병자를 데리고 그에게로 왔다는 것은 필경 유대의 달력에 의하면 일몰에서 일몰까지를 하루로 하는 까닭에, 해질 무렵으로서 안식일은 끝나고, 따라서 그 날의 제한이 풀렸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들은 안식일에는 병자의 치유 위해 하는 일마저도 금지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질 무렵에, 집에 병자 있는 사람들, 다투어 예수께로 왔다고 있음은 우연히 그 '반면'에 있어서 기사의 진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다망한 하루였다.

 

'기적의 문제는 이제는 이미 낡아빠진'일 같지 만도, 실은 가장 중대한 문제이다.

기적에 조우하는 때마다, 사람은 의문의 소리를 발하여 말한다.

 

'그러한 사실,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에 갖가지 실명주식을 붙여, 혹은 이것을 심령상의 있었던 일로 보고, 무사히 통과해 버리려는 자가 많다.

 

그들은 성서를 읽을 때, 기적 이외의 교훈에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의 신신학 같은 것은 전적으로 이 입장에서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기적의 기사는 성서 중 결코 선소(選訴)하지는 않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모두 난관이다.

여기 이를 때마다 그들은 좌절(방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참된 신자에게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 만물의 조물주가 육체로 되어 우리들 사이에 강림하셔서 세상 죄를 제거하신 분임을 믿는 자는, 기적을 보고 이상히 여기지 않는 것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적합한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만이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기적의 기사에 아무런 주석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옳다, 옳다(, )'이다.

오히려 성서에 이것이 없다면 그는 아주 어쩐지 불만스럽게 여기리라.

 

이 일에 대하여 다시 생각나는 것은, 저 미국 죤스 홉킨즈(Johnes Hopkins) 대학의 켈리교수의 부활에 관한 논문이다.

외과적 부인과의 세계의 권위(authority)인 대의(大醫)로서 더구나 그 부활을 논함에 있어서 극히 단순, 거의 일요학교의 아동의 신앙과 다름없다.

 

이르기를

 

'사람 중에 혹 물으리라. 당신이 의가로서도 이것을 믿는 가고. 그러나 나는 이것을 믿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없다. 성서가 이것을 명언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성서가 말해주는 바를 믿는다. 그리고 성서는 사람이 부활의 기적을 행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의심하려해도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하신 이는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나사로는 일어났던 것이다.

이때 만약 '나사로야'하지 않고서, 그저 '일어나라'고 하셨다면, 필시 만인이 부활했으리라'.

 

그렇게 하여 저 닥터 켈리는 기적 중의 최대 기적인 부활을 믿어 조금도 의심치 않은 것이다.

 

같은 신앙이 또 저 천재 화가 렘브란트의 마음에 있었다.

그의 붓으로 이룩된 명화에, 예수, 저녁에 많은 병자를 고치신 그림이 있다.

일폭의 회화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사람의 신앙을 일으키게 하는데 있어서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실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신학자,

전도사라 해도 예술의 한 천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신앙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으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란 어떠한 병인을 말하는 것일까?

 

뒤의 기사에 비추어보면, 그 질병 발작의 상황은 소위 전간(간질병 epilepsy)에 유사해 있다.

하지만 성서가 단지 일종의 질병이라 하지 않고, 특히 '귀신' 또는 '악귀'라고 명언 한 것은 어떤 이유가 없을 수 없다.

 

옳다, 악귀이다. 악마이다. 그리스도 오신 때에 특히 악마가 발호 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해도, 이것은 사실이었다.

 

무릇 광명이 빛나는 때에는 암흑도 또 한층 더해지는 것이다.

한집(일가)에 강한 신자가 나오는 때, 그 주위에 반드시 악인을 낳는다.

 

사회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선인의 출현의 반면에는 반드시 악인의 발호(횡행)를 수반한다.

 

하물며 광명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출현에 있어서랴!

 

이때 악귀의 도량(rampancy) 심한 것은,

가끔 그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광명이심의 반증으로 볼 수가 있다.

 

'악귀(사귀)에 들린' 것은, 필경 하나님의 아들의 출현에 따르는 특별한 질병이었으리라.

 

그리고 악귀는 그리스도를 보자,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아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이 와서 우리를 멸하십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곧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입니다'(33-34일역).

 

이때까지 귀신(사귀)은 다만 그 사람 속에 거할 뿐으로서, 아직 그 힘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그리스도를 보자 곧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악마로 하여금 대() 활동을 하게 하신다.

그는 실로 검()을 가지고 와서, 이 세상에 대 전쟁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 모두 악마에 들린 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동안은 평안무사했다 해도, 일조 그의 빛을 받을 것인가?

악마는 소생(蘇生)하여 우리 가슴 속에 대 파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전도의 처음에 있어서 기적의 하루를 보내시어 허다한 병을 고치셨다.

그는 어찌하여 오늘도 또한 이것을 하지 않으시는가?

 

일부의 신자는 대답하여 말한다.

'오늘이라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게 의지하는 자의 병을 고쳐주신다'.

 

이는 소위 신유설이다. 그리고 또 이 설을 증명할 사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유설의 흠점(결점), 육체의 치유를 너무 중시하는데 있다.

 

그리스도 재림의 목적은 이 세상의 고통을 제거하시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을 이 세상으로서 있게 하시고, 이에 대신하여, 또 죽음 없고, 슬픔, 탄식, 아픔(a pain) 없는 완전한 세상을 최후에 실현케 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모든 악의 원천인 죄를 제거하시는 것이다.

그의 출현의 목적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이 구원에 참여한 그는 세상에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가령 육체의 병은 고침 받지 못한다 해도, 이 몸 그대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치유(완쾌)되지 않는 것이 도리어 기쁨이다.

영혼의 구제(구원)는 육체의 치유(전치 cure)보다 나은 일 얼마이던가!

 

우리들이 사랑하는 자 위해 그 병이 완쾌되기를 기도하지 않는 것이니라 해도, 그 영혼이 구원되기 위해서라면 단명(短命, short life) 조금도 슬퍼할 것 못된다.

하나님이여, 뜻대로 하옵소서이다.

 

최대의 은혜는 육의 치유가 아니라, 영의 구원이다.

그리스도가 기적으로서 허다한 병자를 고치신 것은, 그가 만물을 복종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것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실물교육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는 확실히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이다.

그러나 기적 그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목적은 절로 다른데 있었다.

그가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심의 방법은 이러한 기적 이상이다.

병에 있어서 이에 이김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그렇듯, 기적의 기사는 그대로 이것을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동시에 또 이들 기적은 그리스도 출현의 목적이 아니라 구제(구원)의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서에 기록된 많은 기적의 설명은 여기에 있다.

이것을 마음에 둘 때.

다시 기적의 기사에 조우한대도, 그 설명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24.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 (19173'성서지연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