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인생항로

거듭난 삶 2010. 3. 24.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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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항로

 

행 27: 1-26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作定되매 바울과 다른 罪囚 몇 사람을 아구사도 대의 百部長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行船할새 마게도냐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바울을 親切히 하여 親舊들에게 가서 待接 받음을 許諾하더니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海岸을 依支하고 行船하여5 길리기아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무라 城에 이르러6 거기서 百部長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風勢가 더 許諾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海岸을 依支하고 行船하여8 간신히 그 沿岸을 지나 美港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城에서 가깝더라. 9 여러 날이 걸려 禁食하는 節氣가 이미 지났으므로 行船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荷物(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打擊과 많은 損害가 있으리라 하되11 百部長이 船長과 船主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港口가 過冬하기에 不便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過冬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그레데 港口라 한 편은 東北을, 한 편은 東南을 向하였더라. 13 南風이 順하게 불매 저희가 得意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行船하더니14 얼마 못 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狂風이 大作(대작)하니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船體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 가더니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風浪이 그대로 있으매 救援의 餘望이 다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황금빛 별 저편에는 누가 사는가?’ 詩人 하이네의 물음이다.

 

마지막 석양빛을 깃폭에 걸고,

흘러가는 저 배는 어디로 가느냐.

海風아 비바람아 불지를 마라

파도소리 구슬프면 이 마음도 구슬퍼

아... 어디로 가는 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黃布 돛대야

順風에 돛을 달고 黃昏 바람에

떠나가는 저 沙工 故鄕은 어디냐

사공아 말해 다오 떠나는 뱃길

갈매기야 울지마라 이 마음도 서럽다.

아... 어디로 가는 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黃布 돛대야

 

인생을 表現하는 말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그네길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이들은 잠시 왔다가는 길이라고도 합니다.

시 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 4: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시 89:47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그러나 인생을 표현하는 여러말들중에서 가장 共感이 가는 말은 「人生은 航海」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것도 수십년간 쉬임 없이 가야하는 긴 항로가 아닐까요?

 

넓은 바다에 놓여진, 그것도 삶의 窮極的인 目的地를 향하여 쉬임없이 前進하여야만 하는 한척의 배가 바로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때로는 順風을 타고 거침없이 前進할 때도 있고, 그런가 하면 심한 暴風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메일 때도 있고, 暗礁에 坐礁되기도 하고, 부서진 배를 修理하여 再 出發하기도하며, 때로는 燃料와 食糧을 補充하고 지친 몸을 잠시 쉬기 위한 中間 寄着地에 碇泊(정박)하기도 하는 그런 배의 항로가 바로 우리의 人生 旅程이 아닙니까? 매사가 순풍에 돛단듯 하는 일마다 成功에 成功을 거듭 할 때도 있고 그런가 하면, 每事가 잘 안 풀려 오랜기간 暗黑의 터널을 기어가야 할 때도 있으며, 어느 순간 도저히 恢復될 수 없을 것 같은 絶望을 맛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새로운 覺悟를 갖고 絶望을 딛고 일어서서 나아가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배라 할찌라도 그 모든 항로를 아주 자그마한 방향키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방향키가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배가 정해둔 목적지에 올바로 到達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決定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人生航路를 지탱하는 방향키 역시 어느 방향키느냐에 따라 우리인생의 終着點도 엄청난 차이를 갖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로 가기 위해 떠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인생항로에서 접할 수 있는 여러가지 모습들을 敎訓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떠나서 도착하게 될 궁극적인 목적지가 결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이달이야의 수도인 로마를 향하여 갈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궁극적인 목적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혹 어떤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權力을 가진 사람이 되고자하는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이들은 최고의 부자가 되기 위하여,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걷고 있는 분야에서의 최고의 권위자가 되겠다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나름대로 최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예수믿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구원입니까? 천국입니까?

 

맞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나서 구원받고 천국을 소유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욱 더 중요한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4: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의 窮極的인 삶의 目的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만을 榮華롭게하고 그분만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속의 主人公 바울은 最終的인 目的地가 로마였습니다. 그는 當時 世界를 支配하던 로마帝國의 首都인 로마시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傳播하고 그를 通해 온 世界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기를 渴望하였습니다. 따라서 로마로 가려는 시도를 여러번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번번이 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結局 罪人의 모습으로 드디어 로마를 向하여 첫 발을 내밀게 되었습니다. 外形的으로는 바울은 자신을 告訴하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로마의 皇帝 앞에서 자신의 潔白을 신원하기 위하여

로마행을 요구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궁극적인 目的은 바로 하나님의 福音을 로마에 傳播하기 爲한 方便으로 자신이 罪囚가 됨을 마지 않았다는 事實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榮光을 드러내기 爲하여 자신은 罪人의 汚名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직 하나님만을 依賴하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 우리가 바라는 구원도 이루어지게 될것이요, 天國도 所有하게 될 것이며 이에 더하여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엄첨난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기쁨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말씀 1절은 우리의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바울이 로마로 가지만 그가 로마로 가도록 作定해 준것은 결코 바울 자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도록 일시를 정해주고 떠나도록 하고 護送할 軍隊를 배치해준 모든 일은 바울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로마의 總督이 決定 한 것이요,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마음과 決定을 主張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設定해 주신 분도 하나님 입니다. 인생의 生死禍福을 主觀하시는 분도 하나님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삶을 맞추기 위하여 最善을 다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뜻을 順從하기 보다는 나 자신의 결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내 마음대로 나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하나님을 모르고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으니까 자신의 결정을 최고로 아는 것은 당연 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욱 제멋대로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주인이되시고 나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결정에 순복하며 따르는 믿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생의 항로 가운데는 수많은 동반자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한 배를 탓던 사람들을 한번 헤아려 봅시다. 먼저 이 글을 썼던 누가와 아리스다고와 같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울과 다른종류의 죄목으로 로마로 함께 끌려가는 죄수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또 바울의 일행을 指揮하고 監督하는 율리오라는 백부장과 隨行하는 軍人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기 자신의 일을 보기 위해 그 배에 함께탄 商人, 學者, 旅行者 등등 여러 사람들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이 배를 責任지고 이끌어가는 船長 이하 많은 船員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數를 모두 合하면 자그마치 276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중에는 바울과 깊은 聯關을 맺고 親分을 두텁게 갖고 교류하는 성도들도 있었으며 또한 바울을 監督하고 지시하는 백부장도 있었으며 또한 바울과 아무상관 없는 여러 사람들 그리고 바울과는 다른 입장이지만 죄를 짓고 재판을 받기 위해 가는 죄수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함께 어울려 한길을 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28장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오히려 아무상관 없던 이들이 하나가 되어 죽을 지경에 놓였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바울과 하나가 되어 함께 行動했음을 찾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항로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게 됩니다. 그 속에는 함께 믿음의 은혜를 나누는 성도들도 있으며, 끈끈한 사랑의 情을 나누며 살아가는 家族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 그리고 오히려 나에게 不利益이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띠로 하나되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고 競走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傳播하기 위해서 同分 西周 뛰어 다녔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에게 명령하는 백부장의 말도 순종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앞으로 死刑을 言渡받고 죽을지도 모르는 죄인들에게 조차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는 아마도 아름다운 人間關係를 맺기 위해 最善의 노력을 다 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나에게 利益을 주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에게 불이익을 끼치는 그들까지도 사랑하고 容納하는 가운데 함께 어울려 하나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여야 합니다.

 

네번째로 바울이 탄 배는 最終 目的地인 로마로 가기 위해서 여러 항구에 碇泊 했음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시돈, 구부로, 무라, 멜리데등 여러 항구에 그 배는 정박합니다. 그 곳에서 그들이 탄 배는 바람을 피하기도하고, 여러가지 필요한 것을 공급받기도 하며, 배를 옮겨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나아가다가 여러가지 必要에 의하여 中間 寄着地에 잠시 정박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궁극적인 目標를 樹立해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작은 목표들을 達成하여야만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작은 목표 몇개를 달성하고서는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했다고 착각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인생론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寓話]호랑이에게 쫓기던 한 사람이 한참 도망가다가 절벽을 만났습니다. 뛰어내리면 살수도 있을 것 같아서 용기를 내서 뛰어내리다 보니 절벽아래에는 커다란 독사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급한 김에 손을 뻗어 절벽 중간에 삐죽히 나와있는 나무 뿌리를 움켜잡았습니다. 그런데 왠일입니까? 흰쥐 한마리와 검은쥐 한마리가 번갈아 나타나 뿌리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그의 머리위로 묽은 액체가 한방울씩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손으로 그것을 찍어 맛을 보니 그것은 단 꿀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사실 조차도 잊어 버리고 열심히 그 꿀을 한손으로 찍어 먹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만 한다는 궁극적인 목표는 잊어버린 채 꿀맛에 정신을 빼앗기는 모습이 바로 궁극적인 목적을 잊어버리고 작은 목표 몇 개의 성공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榮光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는 궁극적인 목표는 잊어버리고, 物質的 福을 받았다고, 남부러울 것 없는 좋은 직업을 갖었다고. 또한 敎會의 重職이 되었다고, 그 속에 自慢하여 지고 驕慢함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를 삶을 잊어버리고 사는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독교인의 모습, 또는 나의 모습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人間의 經驗이나 計劃에 依存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順從하여야만 올바른 인생의 항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 9절로 14절의 말씀은 行船의 時機를 놓고 意見의 對立을 빚고있는 바울과 船長이하 뱃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항해의 經驗이 그리 많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장과 많은 뱃사람들은 오직 航海를 위하여 平生을 바쳐 수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백부장과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代言하는바울의 말 보다는 인간적인 經驗이 豊富한 선장과 뱃사람들의 말을 따르기로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은 有限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外面하고 인간의 경험을 믿고 따라간 그들은 심한 폭풍을 만나 목숨을 威脅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는 자신이 자랑하는 인간적인 경험과 自慢心까지도 다 내어버려야만 하는 處地에 놓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경험과 자신감을 믿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고 그에 순종하여야만 합니다. 고기잡이에 평생을 바쳐 수많은 경험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베드로 조차도 고기를 잡아본 적 없는 목수 예수님의 한마디 말에 자신의 모든 경험과 자신감을 果敢히 내 던져 버리고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머언 人生航路를 航海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인생이라는 배의 방향키는 어디를 향하여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항로의 궁극적 목표를 설정해 주시고, 또 떠나도록 결정해 주시고 그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보내셔서 어울려 살게 해주시며 궁극적 목표를 향해 인간적인 경험을 버리고 오직 당신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방향키가 맞추어져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의 인생은 올바른 인생의 목적지에 當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지으셨나이다. 그런고로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내게는 平安이 없었나이다.“ 라고 어거스틴은 告白했읍니다.

예수를 모르고는 나도, 하나님도 모른다(파스칼).

 

이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 분의 뜻에 순종하고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베풀고 인간적 자만과 욕심을 버리는, 그리하여 하나님께 사로잡힌 聖徒가 되기 위해서 이 週間도 最善의 努力을 競走하는 여러분과 내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祝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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