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의 예언자
예레미야서 1장 15-2장 13절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1:17)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1:18)
예언자란 어떠한 자인가?
그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종이다.
그의 바라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
그의 행하는 바는 오직 하나님의 명하시는 일이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고,
사람이 이것을 듣거나 아니 듣거나,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바를 명백하게,
솔직하게, 대담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감심을 구하여서는 안 된다.
세상의 비평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에게 속해야 할,
어떠한 교회, 당파, 권세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홀로 굳게 서서, 모든 사람에게 향하여 하나님의 명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가 대적하는 바는,
꼭 일반인민에게 한정하지 않는다.
그는 왕후, 또는 귀족, 또는 제사장, 또는 정치가,
그리고 또 국민 전체를 대적으로서 가지는 것이다.
죄는 누가 행하더라도 죄이며,
불의 포학은 가령 왕자가 행하는 것이라 해도,
그의 눈에는 용서할 수 없는 악사(惡事)이다.
그는 세상의 죄를 책망하는데 결코 지위의 고하,
신분의 귀천을 구별하지 않는다.
책망해야할 죄악을 책망함에 있어서,
누구도 기피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바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불의에 대하는 때는,
그 이마를 금강석 같이 두텁게 하고,
반석(바위)보다도 굳게 하여 서는 것이다(에스겔서 3:9).
아나돗의 농촌에 거하던 제사장의 아들,
이름도 없는 예레미야도 역시 그러한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이 아직 성년에 달했을 뿐,
의뢰할 교회 없고, 종파도 없으며,
아직 세상에 인정받지 못한 한 청년일 뿐.
하지만 그에게는 의뢰할 것이 다만 하나 있다.
만군의 여호와 그 자신이시다.
그(하나님)에게로 부터 예언자여야 할 대명은 주어졌다.
그는 이미 약한 일개의 청년은 아니다.
그는 만국과 만민 위에,
동시에 왕과 제사장과 관원과 국민 전체 앞에 서는 예언자로 된 것이다.
그리고 왕도 제사장도 관원도
또 국민 전체가 그에게 거슬려 궐기한대도,
결코 그에게 비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편이 되어,
그와 함께 싸우시는 까닭이다.
가령 그들이 그를 죽인데도,
그가 말한 말은,
도리어 그들을 멸하고,
그들을 정복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실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견고한 성, 쇠기둥, 놋성벽처럼 강해진 것이다.
예언자는 그렇듯,
모든 계급에 걸쳐, 또 모든 종류의 죄악을 책망했던 것이다.
특히 과부 또는 고아에 대한 불공평,
혹은 빈자에 대한 압제 같은 것은,
아주 세차게 그들의 의분을 불러일으켰다.
아모스, 이사야 같은 이는, 그 가장 좋은 대표자였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귀족, 제사장, 관원들 서로가 도모하여
무력 무권의 과부, 고아를 착취하며,
빈자의 생혈을 짜내고,
자기는 안락의자에 누우며,
조롱에 새가 가득하듯,
불의한 재물로서 그 집을 채우고,
백성의 우고를 돌아보지 않는 현상을 볼 때,
과연 예언자가 커다란 분노를 나타내고,
그들에게 저주의 말을 발한 것은 실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
그리고 도저히 충분하게 이것을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그들의 노이다.
그들은 다른 어떠한 죄를 용서하지만도, 이 죄만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떠한 불의 죄악보다도,
아니 그 모든 죄의 괴수(수령)로서,
또는 원천으로서, 이 우상숭배를 공격했다.
이에 대한 그들의 분노와 저주는,
도저히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것이다.
살아 계시는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나무라든가 돌을 가지고서 새긴 우상을 섬기는 일,
또 여기에 신전을 세우고 제단을 쌓고,
국민 모두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는 모양,
그들은 이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여호와 예배와 우상숭배,
이 이자에는 지소의 공존할 지보가 없었다.
그들은 온갖 힘을 다하여,
이것과 싸우고, 이것을 책망했던 것이다.
‘내가 그들의 모든 악한 짓(악행)으로 인하여 내 심판을 그들에게 베풀리라.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께 향을 사르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였음으로라’(1:16 일역)고.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원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형벌이 임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모든 악과 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또 이르기를
‘내 백성은 두 가지 악한 일을 했도다.
즉 생수의 근원인 나(하나님)를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도다,
즉 터진 물웅덩이요,
물을 간직(저수)하지 못하는 것이라’(2:13 일역)고.
이것이 예언자의 싸움의 중심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 모든 예언자가 언제나 국민전체의
가장 격렬한 반대와 박해를 받은 이유였다.
예레미야서 2장 1절 이하 13절 같은 것은
그러한 예언의 대표적인 부분으로,
이것을 연구할 때,
우리들은 예언의 중심문제,
그들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예언자는 우상을 부르는데 있어서,
특별한 명칭을 썼다.
2장 5절에 허탄한 것,
혹은 2장 8, 11절에 무익한 것,
또 1장 16절, 2장 11절에 다른 신, 신이 아닌 것이라고 있음은,
모두 이것을 가리켜한 말이다.
즉 우상이란 손으로 작성한 것, 허탄한 것, 무익한 것,
죽은 것,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는 자라는 뜻이다.
(이것을 가장 적절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이사야서 44장 9절 이하이다. 우상이 어떠한 것인지, 또 우상숭배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배우는데, 이것 이상의 좋은 곳은 달리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타락은 여기서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불행과 죄악은,
이 원천(근원)에서 흘러나왔다.
그들이 젊었을 때에, 여호와께 대하여 진실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과 사랑의 언약(약속)을 맺으며,
또 황야에서 그에게 따르던 때는,
그들의 황금시대였다.
그런데 그들은 동산 같은 땅으로 인도되어,
그 땅의 좋은 것을 먹을 수 있게 된 때에,
그 땅에 있어서 신신에게 마음을 옮기고,
마침내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여호와에 대한 커다란 간음이다.
그들은 이것으로서 하나님의 땅을 속되게 더럽히고,
그 산업을 가증한 것으로 되게 했다.
그러나 제사자은 여호와께 듣는 일을 하지 않고,
율법을 취급하는 학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목자는 그를 배반하고,
예언자는 참되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서,
도리어 바알에 의해 예언하고,
무익한 우상을 경배하며,
백성도 모두 이것을 기뻐했다.
그리하여 상하 모두 마침내 우상숭배에 빠지는 양상을 보고,
참된 예언자 예레미야의 마음은 열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는 깃딤(일역-구브로)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
이 같은 일의 유무를 자세히 살펴보라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2:10-12 한글 역)
무엇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형용할 것인가.
세계 어디에 그렇듯 어리석은 것을 행하는 나라가 있으랴!
그들은 참신을 바꾸어 무익한 것으로 그 영광을 바꾼 것이다.
구브로는 오늘의 키프러스 섬이다.
게달은, 아라비아 반도의 동북지방, 팔레스틴의 동방일대를 부르는 말로서,
아라비아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 게달이란 이름에서 생기고,
그들의 자손의 거주하던 지방임은 창세기 25장 13절 또는 16장 12절 등에 의해서 알 수가 있다).
즉 동(東)은 멀리 아라비아 사막을 사이에 둔 게달의 토지,
아라비아인의 거주처에 사신을 보내어 묻고,
서(西)는 지중해의 한 섬인 키프러스 섬까지도 건너가서 살펴보게 하라.
‘실로 이 백성의 짓 같은, 어리석음을 행하는 나라,
자기 신을 바꾸고 더구나 영광을 무익한 것으로 바꾼 백성이 어디에 있는가,
천지도 이것을 듣고 놀랄지어다’ 라고,
예레미야는 호소하는 것이다.
이상은, 예레미야가 2500년 이전에,
유다에 있어서 말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시험 삼아, 오늘의 일본에 있어서,
특히 이 제도인 도쿄 거리에 예레미야가 왔다고 하면 어떠하랴!
이 수도에 차고 또 찬 몇 천의 신사불각과 대소 각양의 사사,
그 중에 봉안 되어 있는 우상의 갖가지,
그리고 이것을 중심하여 행해지는 실로 은성한 자세,
우상적인 의식을 그가 보았다면,
어떠한 말을 발했을는지!
그는 물론, 옛날 유다국을 책망한 것과 같은 준열한 어조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고, 죄의 형벌을 선고했으리라.
‘일본이 만약 이런 짓을 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크신 진노로써 이것을 불살라 버리시리라.
이 굉장한 도쿄시는 모두 외적의 손에 빼앗기리라’고.
우리들은 그러한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서 잠잠 할 것일지?
아니, 결코 그러한 불길한 폭언을 용서치 않으리라.
이 금구무결(金甌無缺)의 우리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특히 이것이 외적의 손에 탈취 당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폭언,
우리는 도저히 그런 말을 지껄이는 자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여,
그를 비난하리라.
그리고 또 신사불각을 참배하는 것이 어찌 나쁜가?
너희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다.
우리가 귀자 모신, 나리다야마를 신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몇백 만인의 선남선녀가,
귀의하는 귀한 신심 무슨 해가 있는가?
아니, 이것 있음으로써 세상의 부패타락도 다소나마 방지되고,
민심의 사상도 선도할 수 있는 것 아닌 가고 하여 맹렬히 반대하고 나서기도 하리라.
오늘의 우리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부류의 예언자의 노(怒)이다.
그들은 모든 나쁜짓(악사)의 원천 모든 타락의 근본을 이 우상에 두었던 것이다.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허탄하고, 무익한 우상을 경배하는데서,
모든 나쁜 악한 일이 생겨나고,
이것 있음으로써, 나라도 사회도 개인도 마침내 멸망한다고 하여,
그들은 언제나 이 점을 아주 대담하게 말한 것이다.
그들이 언제나 왕자, 제사장, 국민전체에게서
세찬 박해와 비난을 받은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다.
만약 오늘에 있어서, 이 예레미야와 같은 입장에 서서,
그와 같이 여호와의 말씀을 받는다면 어떨까?
그는 실로 지난 한 입장에 선 자이다. 그리고 반드시 국민 전체의 반대,
불인망 중에 싸우다가, 마침내는 생명까지도 빼앗기기에 이르리라.
물론, 우리들은 오늘 반드시 예레미야의 방법을 취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 정신은 조금도 다를 데가 없다.
우리들도 언제나 유일한 참신(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고,
다른 모든 우상을 배척하여, 이것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헤겔(1770. 8. 27-1831. 11. 14 독일의 철학자-3권 188역주)의 말 가운데,
‘인간의 잘못 가운데서 하나님에 관한 잘못 만큼 큰 것은 없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을 범하여, 도덕에 있어서 잘못하고,
또 정치, 사회, 교육, 기타 일체의 사물에 있어서 잘못하기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철학자의 말로서 참으로 적합한 말이다.
여기에 또 우리들의 신앙의 싸움의 본거가 있다.
이 사상은, 20세기의 언어로써 예레미야의 정신을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근본원리에 있어서, 양자의 사이에 아무런 어긋남이 없다.
참되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일,
이것이 오늘 선사, 또는 행복의 원천이며,
이 점을 잘 못 할 때,
우리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그르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조금의 가차도 없이 우상숭배를 공격함은,
전혀 이것 때문이었다.
이제 최후로 남은 것은,
우리들 자신의 문제이다.
우리들은 과연 이 표준에 비추어 보아 어떤가?
우리들은 현금의 상태를
이대로 계속하여 과연 존재를 유지 보존할 수 있으랴의 문제이다.
여기에 세계 역사상의 대 문제가 있다.
즉 모든 방면에 진보된 문명을 가지고,
또 세계의 최대강국과 줄지어 지구상에 활약하려는 구가,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은 신앙 없는 국민의 운명은 어떨 것인가이다.
만약 예레미야의 말로써 이것을 헤아린다면,
문제는 일목요연, 다만 멸망 있을 뿐.
왜냐하면,
하나님 없는 문명-그 군비, 정치, 경제, 교육기관은 아무리 완비된대도-
이는 결국에 있어서 제로이다.
예레미야가 말한바 허탄한 것, 또 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대로 나아갈 것인가?
그 행선은 명백, 그 명수는 이미 판정되었다고 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의 최대문제는,
학문이 아니다, 정치가 아니다. 국비가 아니다.
혹은 경제문제가 아니다. 교육제도가 아니다.
국민은 하나님에 관하여 어떠한 관념을 가지는가,
이것이야 말로 재망에 관계되는 중심문제이다.
그리고 이 세계 만민에게 있어서의 최대문제이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이는 무엇보다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는 이 척도로써 만국의 문명을 측량했다.
유다는 어떤가, 이스라엘은 어떤가, 에돔은 어떤가,
바벨론, 이집트(애굽)는 어떤가고.
그리고 그는 명백하게 대답하여 말했다.
아니, 아니, 아니라고.
그러면 무엇이 남는 것일까?
그는 대답하여 말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문명국은 멸망하고,
또 하나님을 버린 유다국도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유다 중에서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고,
하나님을 믿는 소수의 사람이 남으리라.
그리고 그 후 길이 번영할 것이라고.
실로 대담하기 그지없는 선언이다.
저 대국인 바벨론, 이집트가 멸망하고,
저 좁고 좁은 약소한 유다가 재속한다는 예언이다.
누가 그의 말을 믿으랴!
그러고 보면 그의 예언은,
광망이든가, 진리이든가, 이자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천고의 대 문제를 무엇이 해결하는 것일까?
역사이다. 사실이다.
바벨론은 망했다. 이집트는 망했다.
후에 몇몇 대국이 일어나, 번영했으나 드디어 쇠멸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은 소국민은 유대인은,
2500년 후의 오늘도 세계의 대세력이다.
사실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전개되어 왔다.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이 의미에 있어서 그는 참으로 만국의 예언자였다.
*내촌감삼의 (석원병영필기)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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