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제2장의 후반
예레미야서 2장 20-24절 : 옛적에 내가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매 네가 이르기를, 내가 범법하지 아니하리라, 하더니 네가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돌아다니며 창녀 짓을 행하는도다.
21) 그럼에도 내가 너를 귀한 포도나무 곧 온전히 올바른 씨로 심었거늘 네가 내게 이방 포도나무 즉 변질된 초목이 됨은 어찌된 까닭이냐?
22) 네가 천연소다로 네 몸을 씻고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불법이 여전히 내 앞에 표시되어 있느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23) 어찌 네가 이르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으며 바알들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할 수 있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고 네가 행한 바를 알라. 너는 길을 달리는 빠른 암낙타요,
24) 광야에 익숙한 야생 암나귀 곧 자기 쾌락에 빠져 바람을 맡으며 킁킁대는 암나귀니라. 그것이 이렇게 행할 때에 누가 그것을 돌이킬 수 있겠느냐? 그것을 찾는 모든 자들은 자신을 지치게 하지 아니하리니 그것의 달에 그들이 그것을 만나리라.
예레미야 시대에 유대국의 주위에는 여러 가지 민족이 살았다.
그들은 각각 자기 민족의 신을 가지고,
이것을 경배했다.
유다의 신은 말할 것도 없이,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언제나 자기의 신을 경배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신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불리는 이스라엘이,
자기의 하나님을 버리고서, 다른 데로 마음을 옮긴 것이다.
더구나 그저 자기의 하나님을 바꾼 것이 아니고,
참되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무익한 우상으로 바꾸고,
그 영광을 허탄한 것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의 배신은 아주 이방인 이상이다.
누가 그 어리석음에 어이없어 하지 않으냐고.
이것이 예레미야의 주장이었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축복하며,
한없는 은혜로써 인도하시고, 많은 놀라운 기사를 보여 주신 선민이,
어찌하여 그러한 어리석은 미신에 타락했는가를 생각할 때,
누구나가 이것을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들, 소위 그리스도 신자라고 하는 자는 어떤가?
우리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으로서 방관 할 수 있는가?
우리들도 이 가증이 여길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았는가?
세계의 그리스도교국이라 일컫는 자가,
과연 옛적 이스라엘처럼 혹은 그 이상의 배신미망에 빠지지 않았다고
할 수가 있는가?
보기를 멀리 외국에 구할 것까지도 없다.
오늘날 우리들 사이에서 우리는 이것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의 소위 배교자란 무엇인가?
그들도 이스라엘인과 같이 한번은 참신을 믿은 자이다.
더구나 그들이 믿었던 그리스도교에
이스라엘이 가지지 못했던 많은 역사의 증명이 있다.
또 몇 백만의 귀한 성도의 피로써 한 실험(체험)이 있다.
또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들 자신도 또한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히브리서 6:4-5)
십자가 밑에서 구원의 실험(체험)을 가진 자이다.
그렇듯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
후에 타락하는 배교자는 실로 어리석은 짓을 행하는 것 아닌가?
그들은 생수의 근원되시는 참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버리고서,
아주 무익한 것으로 달려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림의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학문, 혹은 사업, 혹은 정치, 혹은 이욕,
혹은 연애라는 낮은 하찮은 이유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 없이 모든 사업도 정치도 학문도 헛되다.
이러한 것은 모두 무익한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타락신자에게 향하여,
같은 말을 되풀이하리라.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어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예레미야서 2:12-13)고.
예레미야는 예언자인 동시에 시인이었다.
그의 눈은 아주 평범한 광경 중에도,
깊고 아름다운 진리를 볼 수가 있었다.
유다의 들에서 일하는 농부의 생활을 보고,
그는 거기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깊은 관계를 깨달아 알았다.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리는 일,
그것이 모든 악한일의 뿌리,
그리고 하나님께로 귀환하는 것이 모든 선한 일의 기초,
예레미야가 부르짖는 바는 다만 진리,
실로 간단명료하다.
하지만, 그 말은 심원,
그 미치는 바는 광대무변이다.
이는 아주 근본적인 복음적 진리이다.
신약이 가르치는 복음도 이것 이외의 것은 없다.
태양처럼 밝고, 푸른 하늘처럼 깊은 것은, 이러한 진리이다.
20절 이하는, 이스라엘의 타락의 순서를 명시하고,
또 그 결과를 그려 보여 주고 있다.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2:20 한글 역)
이는 모두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버리는 자가 하는 일이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율법에 거슬려 거역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속박을 부수고, 자기 소욕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무엇도 그들을 제지할 수가 없다.
그들 자신의 악이 그들을 징계하고,
하나님을 버리는 결과가 얼마나 나쁘며,
또 쓴 것인지를 스스로 깨닫도록 기다리는 길 외에는 없는 것이다.
(2:19 네 자신의 사악함이 너를 바로잡고 네 타락함이 너를 꾸짖으리라. 그런즉 네가 주 네 하나님을 버린 것과 네 속에 나를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 악한 일이요, 쓰라린 일인 줄 알고 주의하라. 주 만군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그리고 하나님을 버린 결과로서 얼마나 무서운 타락에 빠지는지,
20절 이하에 분명하다.
우상숭배에 언제나 불결하기 그지없는 습관이 따름은,
고금동서 다를 바 없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소욕대로 동요되는 백성의 추상을 남김없이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은 자기의 육욕을 채우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우상숭배의 세력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의 엄밀한 가르침을 싫어하고,
스스로 우상숭배로 달리려 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결코 이유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준엄한 그리스도교의 남녀 도덕에 견딜 수 없어,
안이한 우상숭배 그늘 아래에 숨어,
자기의 정욕을 채우려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몇 번이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으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들에게로 옮겨간 것은 무엇 때문이었든가?
즉 ‘사르시는 불’이신 하나님,
‘거룩, 거룩,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에,
자기의 더러워진 흑심을 비추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참조 : (로마서 1:20 이하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
‘주 여호와 네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2:22)
우상숭배에 반드시 따르는 것은, 성대한 의식제사이다.
그들에게는 종교는 도덕이 아니라, 의식이다.
그들은 어떠한 불결을 상관치 않는다.
그러나 모든 제례의 의식은 모두 다 이것을 행하는 것이다.
죄의 세정은 다만 형식의 일 뿐이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숨기기 위해,
더욱더 열심으로 모든 결례의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몸을 씻는데 비누를 쓰고, 또 잿물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불결한 행실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소다는 이 지방에서 산출되는 세탁재료이다. 이집트에도 역시 유명산 산지가 있다.
그들은 이것으로 비누 대용으로 썼다.
이러한 말은, 이 글이 사막 가까운 지방에서 기록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듯 외측의 세정에 치중하는 것은,
모든 위선자에게 공통된 심리이다.
중세의 로마교회의 타락도 또한 전적으로 이것이었다.
23, 24절은 결코 읽기에 좋은 말은 아니다.
(23-24 어찌 네가 이르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으며 바알들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할 수 있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고 네가 행한 바를 알라. 너는 길을 달리는 빠른 암낙타요,
24) 광야에 익숙한 야생 암나귀 곧 자기 쾌락에 빠져 바람을 맡으며 킁킁대는 암나귀니라. 그것이 이렇게 행할 때에 누가 그것을 돌이킬 수 있겠느냐? 그것을 찾는 모든 자들은 자신을 지치게 하지 아니하리니 그것의 달에 그들이 그것을 만나리라)
하지만, 예레미야가 얼마나 잘 동물의 습성을
관찰하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이로써 안다.
그는 천연 인사백반의 일에 대하여,
언제나 신중 서리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예언을 읽고서 크게 흥미가 생기는 것은,
하나는 이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높은 산위, 푸른 나무 아래,
창녀처럼 몸을 굽혀 우상을 경배하며,
이에 맞추어 실로 외설하기 그지없는 꼴을 볼 때,
예레미야는 분히 성욕 때문에 바람 때문에 헐떡거리는 암나귀,
또는 암약대에 비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모든 타락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물론 여호와를 떠난 까닭이라고 예레미야는 대답했다.
그들이 뉘우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며,
그의 죄는 주홍 같아도 눈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스스로 비누로써 몸을 씻고,
잿물로써 이것을 깨끗이 한 대도,
그 행위에 의해, 그들의 악과 정(오예)은
여호와 앞에서 정결해지지 않는다.
이 다만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일,
죄 있는 대로 하나님께로 와서,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
그것이 모든 선한 일의 시작이다.
이것 없이 다른 어떠한 공부도, 노력도 무효이다.
여기에 신앙과 도덕과의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
종교는 의식이 아니다. 도덕이다.
물론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 그 청결한 도덕을 지킬 수 있을까?
신앙의 길이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일이다.
그런데 메이지(1868-1912 까지),
다이교(대정 1912-26까지)의 일본에 있어서와 같이,
도덕 도덕이라고 하여 밤낮으로도 족할 수 없을 만큼 도덕이 주창되면서,
오늘날 보는 것 같은 반대의 결과를 낳은 것은,
사실을 가장 잘 증명하는 일이다.
너는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라.
그리하면 너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올바를 수 있으리라.
*내촌감삼의 (석원병영필기)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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